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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14,27-31ㄱ
평화라는 안전망 없이 다리를 건설하지 마라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홀로 방치되어 기계어로 말하는 6세 아들’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금쪽이는 울면서도 컴퓨터 게임기에서 말하는 기계어로 엄마는 물론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계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게임기를 거의 엄마처럼 여기고 게임기와 물아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엄마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까지 혼자 술을 마십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를 깨우지 못하고 엄마 옆에서 게임을 합니다. 오전 내내 그럽니다.
아이는 불안합니다.
불안을 해소해주는 이는 엄마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평화를 주지 못하고 게임기만이 불안을 잠재워주니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게임기를 엄마처럼 여기게 된 것이고 게임기의 목소리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떤 아이들이 자기가 게임기라고 여기는 이와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는 외톨이가 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이고 그분에게서 오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맺어주는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기 절제, 혹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능력들입니다.
엄마는 먼저 이처럼 성령을 받아서 내 안에 평화의 열매가 맺히게 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문제는 사랑도 기쁨도 평화도 자기 안에서 저절로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와 떨어진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먼저 평화를 얻는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평화를 해치는 것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아입니다.
자기를 믿으면 불안해집니다.
엄마를 믿지 않고 자기만 믿는 아이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엄마와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순종입니다.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문도 안 열고 그냥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하들은 그것보다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아마 했을 것이라며 자존심을 좀 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몸을 씻었더니 나병이 나았습니다.
자존심을 죽여야 평화가 옵니다.
나를 믿으며 동시에 엄마를 믿을 수 없습니다.
엄마를 믿으면 나를 맡겨야 합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로부터 평화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에게 진흙을 발라주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까지 가면서 소경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씻고도 눈이 생기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순종은 자존심을 없애고 겸손해진 이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지원을 한없이 받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고 하시는 것은, 내가 먼저 평화를 갖지 않으면 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성령의 평화를 가지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평화를 얻는 법을 모르면 아기를 낳으면 안 됩니다. 엄마의 자격입니다.
금문교를 지을 때 안전망이 없을 때 많은 인부가 떨어져 죽어서 그물망을 하고서는 진척이 잘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평화가 없다면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에게 불안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매일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4,19-28
요한 14,27-31ㄱ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말을 갈아탄 바오로 사도를 향한 유다인들의 증오와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열성 유다교 신자요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감 청년 바오로였기에 유다인들이 느꼈던 상실감과 배신감은 대단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배반자요 매국노인 바오로 사도를 절대로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다른 유다인들의 개종으로 이어졌기에, 어떻게서든 신속히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향한 극에 달한 유다인들의 반감과 적개심이 오늘 첫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는데,
참으로 끔찍한 광경입니다.
“그 무렵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사도행전 14장 19절)
몰려온 군중은 스테파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바오로 사도에게 큼지막한 돌들을 인정사정없이 투척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돌세례에 바오로 사도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죽은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면서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습니다.
다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속시원해 했습니다.
다행히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워낙 정신력과 의지가 강한 분이라 치명적인 돌팔매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비틀비틀 겨우 일어선 그는 피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죽었다 되살아난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나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음 선포 여정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 같았으면 우선 응급실로 갔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상처난 부위 치료도 받고, 뇌파 검사도 받고, 진단서도 끊고, 고소장도 접수하고, 충분히 회복될 때 까지 몇달이고 휴양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데르베로, 데르베에서 리스트라로, 리스트라에서 이코니온으로, 이코니온에서 안티오키아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박해 속에도 바오로 사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했고 의연했습니다.
언제나 제자들을 격려하고 고무(鼓舞)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주님의 복음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겪은 고통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끔찍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신자들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 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코린토 2서 11장 23~27절)
그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강론>
(2024. 4. 30. 화)(요한 14,27-31ㄱ)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27-31ㄱ).”
1) ‘평화’가 무슨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물건을 주고받듯이 평화를 주고받을 수는 없고, 주님께서 주신다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주님의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가운데
하나이며, ‘영혼의 평화, 내적 평화, 영적 평화’입니다.
<‘영혼의 평화’를 ‘마음의 평화’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영혼과 정신과 마음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경우에 이 세 가지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 겁을 내는 것”은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모습의 반대쪽에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의 모습은,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될 것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용기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몸의 평화, 겉으로 아무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온갖 의심과 불안과 미움과 증오심과 탐욕이 가득 차 있어도, 겉으로 아무 일이 없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합니다.
2) 주님께서 주시는 ‘주님의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첫 번째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29절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말씀이고, ‘믿음을 통해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평화를 잃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인생에서도,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믿음을 잃으면 평화도 잃게 됩니다.>
3) ‘주님의 평화’를 온전히 누리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 자체가 없이, 혼자서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자들이 있긴 한데, 피해자가 어떤 고통 속에 있든지 신경 쓰지 않고 혼자서만 마음 편하게 지내는 그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어떤 고통을 겪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이 혼자서 잘 지내는 독재자의 경우, 그 자신은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은 착각일 뿐이고, 혼자서 잘 지내는 그것은 결코 평화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무덤 속 같은 적막함’일 뿐입니다.>
4) ‘주님의 평화’를 누리려면 믿음과 회개 외에도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살아 있어야만 참 평화를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평화도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 상태는 ‘죽음’과도 같습니다.>
5) 주님께서 주신 ‘내적이고 영적인 평화, 마음의 평화’를 온전히 얻어 누리는 모습을,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야고보 사도를 죽인 다음에, 베드로 사도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사도 12,1-3).
“그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사도 12,4-7).”
사형 집행 전날 밤인데도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그것도 천사가 ‘옆구리를 두드려’ 깨워야 할 정도로 아주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린 채 ‘참 평화’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