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 은행' 아닌 '보노보 은행'
[책소개] 『보노보은행』(노대명 외/ 부키)
섬뜩했다. 악마의 현시였다. 2008년 9월 16일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한 다음 날, 월스트리트의 리먼브라더스 건물 앞에 세워진 은행장 리처드 펄드의 초상화에 행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적었다. ‘탐욕’ ‘약탈’ ‘부패’ ‘카지노’ ‘흡혈귀’…. 분노와 조롱의 주석이 빼곡했다. ‘미스터 월가’의 모습은 악의 화신이 되었다.
뜨악했다. 잘못은 했는데 ‘내 탓’만은 아니라는 거였다. 구제금융에 손을 내밀면서도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챙기는 금융계의 파렴치에 비난이 쏟아졌다.
멀뚱했다. 금융 위기로 삶이 위기에 빠지면서도 우리는 그랬다. 2009년 세밑, 미국에서는 불량한 거대 은행에서 계좌를 빼자는 ‘계좌 옮기기’ 운동이 시작됐다. 2012년 말까지 미국인 1000여만 명이 월가의 공룡 은행과 거래를 끊었다.
불길은 영국으로도 번졌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유럽에선 미국보다 먼저 조용하게 계좌 옮기기가 진행됐다. 계좌 옮기기 참가자들은 금융 위기에 분노하고 실망했지만 계좌를 옮기고 싶은 ‘다른 은행’에서 희망도 발굴했다. <여는 글 중에서>
위기는 기회를 품고 있다. 2008년 월가의 금융 붕괴로 겪은 ‘섬뜩’하고 ‘뜨악’한 경험은 이윤 극대화로 치닫는 거대 은행의 추악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거대 은행의 덩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뼛속까지 ‘제대로 된 금융’을 발견하게 했다. 이들은 ‘윤리적 은행’ ‘녹색 은행’ ‘통합의 금융’이라 불린다. 야심만만하고 폭력적인 유인원 침팬지에 비해, 평등을 좋아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또 다른 유인원 ‘보노보’를 닮았다 하여 ‘보노보 은행’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노보 은행’은 사람과 환경, 이익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시장, 주주, 성장만을 앞세우는 기존의 거대 은행 ‘침팬지 은행’에 비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면서 활동한다.
침팬지 은행이 실물경제에 돈을 돌리지 않고 거품을 키워 돈으로 돈을 벌 궁리나 할 때, 보노보 은행은 무기나 마약, 아동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이나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더러운 돈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다만 기존 금융 시스템의 틀 안에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금융을 지향할 뿐이다.
주주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적 실험, 보노보 은행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영미ㆍ유럽권에서는 보노보 은행이 내세우는 가치에 주목하며, 보노보 은행을 각박한 주주 자본주의 사회를 헤쳐 나갈 희망으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금융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할 여력도, 보노보 은행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사회적 금융 전문가 10명이 머리를 맞댔다.
침팬지 은행이 내팽개친 ‘금융의 사회적 책임’을 끌어안고 금융이 금융다움의 새 길을 여는 창조적 파괴의 생생한 현장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img class="aligncenter size-full wp-image-57503" alt="보노보은행" src="http://www.redian.org/wp-content/uploads/2013/07/-e1373080965965.jpg" width="350" height="514" />
“구린 건 사람이지, 돈이 아니다” … 1원까지 투명한 윤리적 금융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제도권에서 침팬지 은행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보노보 은행들을, 2부에서는 정부 관련 민간 기금과 사회적 벤처 캐피털 등 다양한 사회적 금융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들 보노보 은행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환경과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곳에만 투융자하고, 1원까지 투자처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윤리적 금융’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 은행이 존재할까? 존재한다. 투융자할 곳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투자 내역을 낱낱이 공개하는 보노보 은행들을 만나 보자.
- 독일 GLS 은행 “더러운 사업엔 돈 대지 않는다”
GLS은행은 대출과 투자를 할 때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시행한다.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기업이나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 무기나 원전으로 수입을 올리는 기업은 대출 신청 자체를 할 수 없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미국 재무부 채권도 사지 않는다. 미국이 최대 환경오염 유발국이라는 이유에서다. 은행을 들고나는 자금은 사외보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1유로까지 공개된다.
- 미국 뉴 리소스 은행 “오늘 밤 당신의 돈은 어디에 투자될까?”
미국 최초의 녹색 은행인 뉴 리소스 은행은 주로 신재생에너지, 에너지 효율 제고 기술, 유기농 먹거리, 환경 제품 등 친환경 사회적 기업에 집중적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오늘밤 당신의 돈은 어디에 투자될까요?” 이런 광고 카피를 내세우며 고객이 맡긴 돈이 사람과 공동체와 환경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쓰인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돈이 사회적ㆍ환경적 가치를 위해 활용되기를 원하는 윤리적 금융 고객의 유치에도 힘쓰고 있다.
“금융 사각지대에서도 용은 난다” … 지역사회를 키우는 공존의 금융
보노보 은행은 열린 유대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나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돕는다. 사람과 사람을 잇고, 고객과 금융의 대화를 유도하여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가난한 유학생을 어엿한 음식점의 사장으로 변신시키고, 해마다 1억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을 말라리아의 공포에서 해방시킨 보노보 은행의 사례는 소외 계층과 지역 격차 문제로 고민하는 우리 사회에 큰 시사점을 준다.
- 캐나다 밴시티 “지역민의 꿈을 응원하는 감동의 자본”
1946년 밴쿠버 시민 14명이 5달러씩 출자하며 시작해 현재는 캐나다 최대의 신용협동조합으로 성장한 밴시티는 밴쿠버 지역의 개발과 지역민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역 밀착형 금융기관이다. 기존 신협들이 배타적인 유대성을 가진 반면, 밴시티는 열린 유대를 지향한다. 밴쿠버의 시민이라면 인종, 언어, 직업을 불문하고 금고의 문을 연다. 터키 출신 가난한 유학생의 음식점 창업을 응원하며 창업 자금을 지원해, 개업 2년 만에 하루에 1000여 명의 손님이 드나드는 소문난 맛집으로 키워낸 사례는 밴시티의 지역 지향성을 잘 보여 준다.
- 미국 어큐먼 펀드 “1명의 혁신가에게 투자해 1억 명의 생명을 살린다”
어큐먼 펀드는 자선 사업가와 재단, 민간 기업에서 기부를 받아 비전과 능력을 지닌 사회적 기업과 기업가에게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이다. 단지 보조금을 주는 데 그치는 전통적 기부 방식에서 벗어나 건강, 물, 주택, 대체에너지, 농업, 교육 등의 분야에서 빈곤층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기업과 기업가에게 투자하여 전 지구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2003년에는 탄자니아 섬유 업체인 에이투제트를 이끄는 아누즈라는 사업가를 발굴하고, 잘 찢어지지 않는 살충 처리 모기장을 만들도록 지원하여 매년 2000만 장의 모기장을 생산하는 업체로 키웠다. 말라리아가 극심한 아프리카 지역으로 보내지는 이 2000만 장의 모기장은 가구당 5명으로 계산할 경우 해마다 1억 명 이상이 혜택을 보는 셈이다.
따뜻한 자본주의를 향한 희망 ‘보노보 은행’
위기 속에는 기회도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우리는 ‘침팬지 은행’의 참모습을 발견했고, 착한 금융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보노보 은행』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더 밝고 건강하게 만드는 금융의 모습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보노보 은행은 돈을 ‘나쁜 주인’으로 만들어 버린 ‘침팬지 은행’과 달리, 돈을 ‘착한 하인’으로 만들고자 한다. 돈보다 사람, 환경을 앞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장 만능주의 앞에 내팽개쳐졌던 사회적 기능을 금융의 본업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보노보 은행』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얼굴을 한 금융, 참 금융을 보여 준다.
보노보 은행 가운데는 미국의 쇼어 은행처럼 금융 위기의 여파로 아쉽게 사라진 곳도 있지만, 네덜란드 트리오도스 은행이나 독일 GLS 은행처럼 침팬지 은행과 어깨를 겨루며 금융권 안에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곳도 많다. 이들의 성공과 실패 사례가 이제 태동하는 한국 사회의 사회적 금융에 희망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으로 투자하고, 지역사회와의 공존을 추구하며, 사회문제까지 해결하려 애쓰는 ‘착한 은행’이 가능함을, 그것도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그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