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추석 단상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어서 추석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어렸을 적 추석 즈음의 여러 풍경을 더듬어본다.
이때쯤, 초등학교에서는 가을 운동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고전무용, 현대무용, 기마전은 정말 열심히
연습해야 했다. 스피커에서는 선생님의 구령과 민요와 현대무용에 맞춤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소리는 학교 담장을 넘어 마을로 퍼져 나갔다.
대나무를 쪼개 적 꼬치를 만드는 아버지가 계셨고 샛어머니와 함께 차례 음식 만들기에 분주한 어머니가
계셨다. 모든 음식은 각자 가정에서 손수 만들었으니 얼마나 바쁘게 움직여야 했을까. 차례상에 올릴
음식 말고도 친지들과 먹고 나눌 음식까지 어떻게 다 만들었는지…. 그땐 다 그랬다고 생각하니 옛
어른들은 초능력이라도 갖고 있었던 걸까.
어머니가 만들어야 했던 떡은 종류도 많았다. 쌀가루와 팥고물을 시루에 켜켜이 넣어 찐 친떡, 막걸리로
발효시킨 빵떡, 납작한 반죽에 고물을 넣고 반 접은 새미떡, 둥근 가장자리가 별 꼭지처럼 뾰족뾰족하게
틀로 찍어낸 찹쌀 지름떡, 보름달처럼 동그란 곤떡, 그리고 소녀의 중절모처럼 예쁘게 만든 송편….
송편과 솔잎은 당연히 함께 할 관계인데 예나 지금이나 실상은 그러지 못하다. 솔향기를 담을 만큼
맛에 대해 섬세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물에 삶거나 배보자기를 깔고 쪄냈던 것
같다. 그런데 그해는 달랐다. 어떤 낭만적 발로였을까. 언니와 내게 옆에 있는 밭에 가서 솔잎을
따오라며 소쿠리를 건내셨다.
나직하고 엉성한 돌담 두 개를 넘어서면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새(띠) 밭이 있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부드러운 바람은 솔향기를 실어 나르고, 우리는 마직하게 낮은 소나무 가지에서 솔잎을 땄다.
꼭꼭 찌르며 저항하는 솔잎을 따 모으는 건 쉽지 않았다. 소쿠리는 좀처럼 차오르지 않았고, 덜
채운 소쿠리를 가져다 드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송편에서 솔향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터진 송편을 주시던 젊고 예쁜 어머니와 샛어머니의 다정한
모습만 아련히 기억할 뿐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태주의 '추석 지나 저녁때'란 시가 어찌나 공감이 가는지….
"그때는 할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 어머니도 계셨는데 / 어머니래도 젊고 이쁜 /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때는 뼈만 앙상하지 않고, 오랜 세월 누워 계시지도 않은 젊은 어머니가 계셨다.
요즘 손수 떡을 쪄내는 집은 거의 없을 것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끼어 함께 돌아야 하므로
늘 바빠서일까. 떡은 떡집에서 그 외는 마트에서 반가공식품을 사다가 조리한다. 그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다고 더 편리한 방법을 찾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그게 AI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
딥페이크 기술이 정교해지고 쉬워지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다. 이를 악용하는 사건들이 보도되기도
한다. 한편, 그리운 이를 딥페이크로 소환하여 함께하는 시대도 가까이 와 있다. 가령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석 같은 집안 행사에 모셔다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좋은 점과 나쁜 점은
공존할 것임에 틀림없다. 흐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내는 추석이 됐건 따뜻한 정을 잃어버리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생기게 될
내 손자나 혹은 손녀가 자라서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을 때,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손자의 손자까지도.
글: 좌여순 시인·수필가
출처: 제민일보 2024. 09.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