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6
유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사과맛 버찌맛
온갖 야리꾸리한 맛, 무쓰 스프레이 풸라폼 양기 흩날리는 거리
휀디스의 소녀들, 부띠끄의 여인들, 카페 상류사회의 문을 나서는
구찌 핸드백을 든 다찌들 오예, 바람불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저 흐벅진 허벅지들이여 시들지 않는 번뇌의 꽃들이여
하얀 다리들의 숲을 지나며 나는, 끝없이 이어진 내 번뇌의 구름다리를
출렁출렁 바라본다 이 거추장스러운 관능의 육신과 마음에 연결된
동앗줄 같은 다리를 끊는 한 소식 얻디 위하여, 바람 부는 날이면
한양쇼핑센터 현대백화점 네거리에 떡하니 결가부좌 틀고 앉아
온갖 심혜진 최진실 강수지 같은 황홀한 종아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부정관(不淨觀)이라도 해야 하리 옛날 부처가 수행하는 제자에게 며칠을 바라보가 던져준
구더기 끓는 절세미녀의 시체, 바람부는 날이면 펄럭이는 스커트 밑의
온갖 아름다움을, 심호흡 한번 하고, 부정해 보리 내 눈은 렌트겐처럼 번쩍
한 때의 해골바가지를, 뼈다귀를, 찍어내려고 눈버둥친다 내 코는 일순
무쓰향에 썩은 피고름 냄새를 맡아내려고 킁킁 벌름댄다. 정말 이러다
이 압구정동 네거리에서 내가 아라한의 경지에.....? 아서라
마음속에 영원히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 것 같은 다리 하나 있다
바로 이 순간, 촌철살인적으로 다가오는 종아리 하나 있다 압구정동
배나무숲을 노루처럼 질주하던 원두막지기의 딸, 중학교 운동회 때
트로피를 휩쓸던 그 애, 오천 원짜리 과외공부 시간 책상 밑으로 내 다리를 쿡쿡 찌르던,
오천 원이 없어 결국 한 달만에 쫓겨난 그 애, 배나무들을
뿌리째 갈아엎던 불도저를 괴물 아가리라 부르던 뚱그런 눈망울
한강달 아래 궁글던 물새알과 웃음의 보조개 내게 던지고 키들키들
지금의 현대백화점 쪽으로 종다리처럼 가라지던, 그 후로
영영 붙잡지 못했던 단발머리 소녀의 뒷모습
그 눈부시던 구릿빛 종아리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991)
[어휘풀이]
-다찌 : 일본인들을 상대로 하는 기생
-부정관(不淨觀) ; 음욕(淫慾)이 많은 중생들이 닦는 수행법으로, 육체의 부정함을 느끼고 깨 달아 번뇌와 욕망을 떨쳐 버리는 관법(觀法)의 하나이다.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육신의 덧없음을 깨우치고 이성에 대한 정욕을 없애는 오정심관(吳停心觀)이 그 대표적 수 행법이다. 또한 『법구경(法句經)』에 나오은 부처의 일화는, 빼어난 미모로 모든 제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갑자기 죽은 한 여인의 시신을 그들에게 가져가 썩어 가는 과정을 며칠에 걸쳐 보여 줌으로써, 그들에게 육체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고 수행에 전념하게 한 것을 말한다.
-궁굴던 : 궁글다. 뒹굴다.
[작품해설]
이 시는 한국 자본주의의 최전선이라고 하는 ‘압구정동’을 상징물로 하여 현대 문명의 천박성과 공허함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작품으로 연작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압구정동’은 허구적 상상의 공간으로, 시인은 과시와 소비와 관능으로 가득 찬 그 곳을 묘사하기 위해 비속어에 가까운 표현이나 외국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자에게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갖 허위와 허영이 쓰레기처럼 쌓여 가는 ‘압구정동’은 지금의 물질문명이 쏟아져 들어오기 이전, 그 곳에 가득했던 ‘배나무숲’만큼이나 건강하고 순수했던 화자의 꿈을 빼앗아 버린 곳으로, 시인의 비판 대상이 될 뿐이ᅟᅡᆮ. 이렇득 이 시는 소비 중심의 물신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오늘도 ‘압구정동’에는 ‘온갖 야리꾸리한’ 향기를 흩날리는 이른바 명품을 들고 오가는 ‘다찌’ 같은 여자들이 모여들어 춤을 춘다. 춤을 추는 그 ‘흐벅진 허벅지’의 여자들은 화장게 있어 조금도 시들지 않는 ‘번뇌의 꽃’들도 밤마다 그를 깊디깊은 정욕의 나라로 이끌고 간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런 관능의 한가운데서, 그녀들의 ‘하얀 다리들의 숲’을 지나 끝없이 출렁대는 ‘번뇌의 구름다리’를 건너 큰 깨달음이라도 얻겠다는 듯, ‘동앗줄’ 같은 끈질긴 욕망의 다리를 끊어내고 싶어한다.
‘황홀한 종아리’를 가진 관능의 주인공들이 스커트를 펄럭거릴 때마다 화자는 불꽃처럼 끓어오르는 애욕을 뿌리치기 위해 마치 ‘부정관(不淨觀)’을 하는 심정으로 관능의 아름다움마저 모두 부정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수행하는 제자들에게 욕망의 덧없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부처께서 가져다 준 구더기 끓는 절세 미녀의 시신을 보듯 그녀들을 바라보며, 그녀들에게서 욕정 대신 썩은 피고름 냄새를 맡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화자가 스스로 ‘아라한(阿羅漢:온갖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공독을 갖춘 성자, 나한)’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무수한 다리 가운데 자신의 ‘마음속에 영원히 빛날 다리 하나’가 떠오른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욕망의 통조림’(「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을 찍어 내는 물질문명이 들어오기 이전, ‘배나무 밭’이 즐비했던 시절의 기억으로, 기억의 주인공은 ‘배나무숲을 노루처럼 질주하던 소녀’이다. 그녀는 ‘오천 원’이 없어 과외를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원두막지기의 딸로, 배나무들을 갈아엎어 ‘욕망의 묘지’인 ‘현대백화점’을 만들던 ‘불도저’를 ‘괴물 아가리’라고 말할 만큼 건강하고 순수한 존재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녀의 ‘눈부시던 구릿빛 종아리’는 결국 현재 ‘압구정동’을 상징하는 ‘흐벅진 허벅지’와 대립되는 순수의 표상이자 화자가 잃어버린 소중한 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는 ‘한강다리 아래 궁글던 물새알’과 ‘웃음의 보조개’를 남긴 채 거대한 문명의 물살에 떠밀겨 사라진 이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제 ‘압구정동’에는 그 ‘단발머리’ 소녀가 지녔던 순수하고 건강한 삶이 더 이상 없다. 그것은 ‘압구정동’ 어디에도 암아 있지 않은, 전설도도 남아 있지 않은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그 순수하고 아름답던 자연의 삶 위로 편히함과 화려함으로 치장한 온갖 욕망들이 퇴적물처럼 쌓여갈수록 화자는 옛 시절이 점점 더 그리워진다. 그리하여 비록 가난했지만 ‘구릿빛’으로 빛나는 순수와 건강이 있었던 과거에 비해, 현재는 풍요 속에 온갖 욕망과 더러움이 살아 번득이는 곳임을 시인은 과거와 현재, 자연과 도시, 가난과 풍요, 순수와 비순수라는 대립적 관계를 통해 비판하는 동시에 모든 현대인들에게 하루빨리 도시적 욕망에서 벗어나 예전에 ‘배나무숲’같이 풋풋하고 건강했던 삶을 복원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유하
본명 : 김영준
1963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세종대학교 영문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과 졸업
1988년 『문예중앙』에 시 「무림일기」 등을 발표하며 등단
『21세기 · 전망』 동인
시집 : 『무림일기』(1989),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1), 『세상의 모든 저녁』(1993),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995),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1999), 『천일마화』(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