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해 1994년 만든 서울 남산의 타임캡슐 광장. 기념사가 새겨진 대리석 구조물 지붕의 처마에 어른 가운뎃 손가락만한 회색'고드름'같은 것이 달려 있다. 석회동굴도 아닌 곳에 나타난 이 '녀석'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만져보면 분명 딱딱한 돌덩어리, 석회동굴 천장에서 석회석이 녹아 내려오다가 굳으면서 생기는 종유관과 비슷하다. 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고 물방울이 떨어진 바닥에는 희뿌연 얼룩이 나 있다.
정부 과천청사 내 후생관의 옥외 계단에도 어른 새끼손가락 크기의 종유관 같은 것이 빼곡히 돋아나 있다.
"산성비 등 대기오염 물질에 의해 콘크리트.대리석.석회석 등이 녹아내리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생성 원리도 종유관과 같지요."
㈜라파즈한라시멘트 연구팀의 민경소 박사는 "시멘트의 경우 일부 성분이 대기의 수분과 만나 수산화칼슘이 되고, 이것이 다시 대기의 이산화탄소와 만나 탄산칼슘이 된다"고 설명한다. 석회석 성분인 탄산칼슘이 녹아내리면서 '종유관'이 생긴다는 것이다.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에도 같은 원리로 '콘크리트 고드름'이 생긴다.
산성비를 맞으면 이런 현상이 더 빨라진다. 콘크리트는 원래 강알칼리성이지만 산성비를 계속 맞으면 중성이나 산성에 가까워진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 청계천 복개구조물을 뜯어냈을 때 콘크리트의 중성화 현상이 뚜렷이 관찰됐다. 뜯어낸 콘크리트에 시약을 뿌리자 중성화된 겉은 흰색을, 알칼리성을 유지한 속 부분은 붉은색을 나타냈다.
1998년 이후 서울에는 pH(산도) 4.7~5.0의 산성비만 내리고 있다. 산성비의 원인은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를 태울 때 발생하는 황.질소 산화물. 오염방지 시설을 갖추고 청정연료를 쓴다지만 2001년 한 해 국내에선 황산화물 52만6600t, 질소산화물 104만5333t이 발생했다.
전력 부족으로 화력 발전을 위해 질 나쁜 석탄 사용이 늘고 있는 중국의 오염물질도 큰몫을 한다. 최근 서울대 박순웅 교수팀은 국내 아황산가스 오염 가운데 중국 것의 비중이 연평균 40%, 질소산화물은 49%를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콘크리트가 중성화되면 철근이 부식되고, 그렇게 되면 철근 부피가 최대 여덟배로 늘어난다. 철근이 팽창하면 구조물에 균열이 생기고 심하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서울시 건설안전본부 관계자는 "지방의 낡은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면 몰라도 서울시내 교량.고가도로는 정비가 주기적으로 이뤄져 이 같은 위험은 없다"고 말했다.
민경소 박사는 "중성화를 억제하려면 콘크리트를 만들 때 물을 적게 타고 건물.도로를 건설할 때 충분히 양생해 콘크리트의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산성비 맞으면 머리카락 빠지나…산성도 낮아 안 빠져
◇ 진실 또는 거짓=속설처럼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반도에 내리는 비는 커피(pH 5.0) 정도의 산성도를 나타내긴 하지만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산성이 강한 것은 아니다. 비를 맞더라도 머리 감을 때 쓰는 비누.샴푸가 알칼리성이기 때문에 산성이 중화된다. 빗물에 포함된 오염물질이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산성도 자체가 피부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공기 중의 황산화물.질소산화물이 녹아든 산성 안개가 사람의 폐.호흡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실제로 조사해보면 우려할 수준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산성비가 석조 유물에 미치는 영향은 그 유물이 어떤 암석으로 돼 있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유럽 등지에서는 대리석 유물이 많아 산성비 피해를 쉽게 받는다.
국내에는 화강암 유물이 많아 피해가 유럽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나 울산.포항 등 공단이 인근에 있는 경주 지역의 경우 문제가 된다. 서라벌대 정종현(생명보건학부)교수는 "불국사 다보탑.석가탑이나 감은사지 석탑, 경주 남산의 유물에서 표면이 얇게 벗겨지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