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완 수경사령관
병사들의 관리에 관심이 많아, 체력증진을 위해 포상휴가 등 많은 보상으로 공을 들였고
휘하 병력 식단에도 관심을 기울여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귀한 반찬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본인이 불시에 사병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여 현장에서 병사들 식사 준비에 소홀하지 않도록 감시하였다고 한다.
12.12 당시 반란군 측의 계략으로 술집에 초대되어 뒤늦게 진상을 파악하였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불법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경사령부로 달려갔으나 이미 반란군에 의해 모든것이 넘어간 상태.
반란군 측이 회유하려 들자 "너희들한테 선전포고한다.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저항할 것을 밝혔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구출을 위해 경비병력을 보내고 휘하 부대를 지휘해보려 노력하였으나
반란군에 의해 군사력은 전부 장악당하고 그나마 이용 가능한 서울 외부 병력도 서울에 출입이 불가능하게 길목이 관리되고 있는 상황.
긁어모을 수 있는 서울 내부의 취사병 행정병등 비전투 병력을 모아 100여명을 준비하였으나 상대인 반란군의 세력이 너무나도 강력하였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본인이 말한대로 목숨을 버리려 하였으나
부하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수 없어 치욕을 감내하고 결국 체포당한다.
반란이 성공하자 이에 저항한 장군은 쫓겨났다
장태완의 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나라에 반란이 있는데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곡기를 끊고 술로만 지내다가 몇달이 지나지 않아 사망.
장태완의 외동아들은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으나 행방불명되어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후 반란군 측도 미안은 했는지 공기업 사장에 임명하고 이미 다 항복한 마당에 본인도 별 수 없으니 승락.
1994년 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하여 회장직에 오르고
김영삼 정권에서 반란에 대한 청산을 시도하자 증인으로 법정에 섰으며
이후, 국회의원직에도 올랐고 2008년 암에 걸린 이후 투병을 하다 2010년에 별세하였다.
첫댓글 이분 말고도 다른 분들도 몇분 계셨는데 다 의문스러운 죽음이라 너무 가슴 아팠음 문어 대가리 새끼
아니 아들은 왜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