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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 8월…대왕의 치세에 남제왕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가 오래 섬길 것(장수)를 생각하며…최고급 구리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게(취하게) 했다.(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念長奉遣…所白上銅二百旱 取此竟)
일본 와키야마현(和歌山縣) 하시모토시(橋本市)에 스다하치만(隅田八幡)이라는 조그마한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신사에는 ‘인물화상경’이 보관 되어있다. 지름 19.8㎝ 정도인 인물화상경에는 9명의 인물상과 기마상이 그려져 있다. 거울의 둘레에 빙 둘러서 4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국립도쿄박물관이 소장중인 ‘인물화상경’은 일본 국보(고고자료 2호·1951)로 등재됐다.
이 ‘인물화상경’을 두고 에도(江戶) 시대(1837년)에 간행된 <기이국명소도회>는 “진구 왕후가 삼한을 정벌한 뒤 받은 거울”로 소개했다. 1914년 ‘인물화상경’를 처음 연구한 다카하시 겐지(高橋健自) 역시 이 점에 주목했다. 즉 “진구 왕후가 366년 왜국의 호족인 ‘사마숙례(斯摩宿니)’를 탁순국(가야연맹 소국)에 파견했고”, “372년 백제가 칠지도와 칠자경(七子鏡) 및 여러 보물을 바쳤다”(<일본서기>)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백제가 왜에 바쳤다는 ‘칠자경’을 ‘인물화상경’에, 한반도에 파견했다는 ‘사마(斯摩)숙례’를 명문에 등장하는 ‘사마(斯麻)염장’과 각각 연결 지었다. 그런 뜻에서 인물화상경에 등장하는 간지명을 ‘383년 계미년’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사마’하면 금방 떠오르는 인물이 있지 않은가. 바로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이다.
<삼국사기>에는 ‘斯摩’로, <일본서기>에는 ‘斯麻’로 한자만 다르게 되어있을 뿐 ‘사마’로 발음되는 것은 같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서 놀라운 명문이 보였다. ‘백제 사마왕(斯麻王)이 62세에 서거했다’는 것이다. 일본 국보 ‘인물화상경’ 명문에 보이는 ‘사마’는 백제 무령왕인 것이 틀림없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서 ‘백제 사마왕(무령왕)’ 명문이 보인다.
이렇게 ‘사마=무령왕’이 각광을 받게 되면서 ‘503년 계미년설’이 급부상했다. 명문의 ‘남제왕(男弟王)’을 게이타이(繼體) 일왕(재위 507~531)과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부레쓰(武烈) 일왕(498~507)이 후사 없이 죽자 오호도노미코토(남대적존·男大迹尊)이 게이타이 천황이 되었다”고 했다. 현대 일본어에서 ‘인물화상경’에 등장하는 ‘남제왕’(男弟王)’을 ‘오오토(ヲオト)’로 읽을 수 있다.
‘오오토’(남제왕)와 ‘오호도노미코토’(남대적존)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오토’, 즉 남제왕은 게이타이 일왕이라는 것이다. “계미년(503) 사마(백제 무령왕)가…오시사카 궁에 있던 남제왕(게이타이 일왕)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청동거울을 바쳤다”는 것이다. 이 ‘503년설’이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연구자들에게 지지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내 연구자들이 ‘계(癸)’로 읽었던 글자가 종미사인 ‘의(矣)’의 이체자라는 견해가 제기됐다. 따라서 ‘인물화상경’의 제작연도 역시 ‘미년(未年)’이라는 것이다. 또한 국내 연구자들이 ‘503년 무령왕의 게이타이 선물설’을 깨뜨리는 견해를 피력하는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박남수 동국대 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2022년 5월)과 홍성화 건국대 교수(2023년 4월)의 ‘인물화상경’ 관련 연구가 그것이다. 우선 박남수 전임연구원은 그동안 ‘계미년(癸未年)’으로 읽은 간지명이 잘못되었다고 논증했다. 그동안 ‘계(癸)’자로 읽었던 글자는 종미사인 ‘의(矣)’의 이체자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물화상경의 둘레에 빙 둘러 쓰인 48자의 명문은 ‘계미년’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미(未)’부터 시작해서 ‘의(矣)’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간지명을 쓸 때 ‘계미’ 아닌 ‘미’처럼 ‘천간(십간)’없이 ‘지간(12지)’만 쓰는 경우가 있는가.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고구려 ‘은제 그릇’(391)의 명문 중 ‘묘삼월중(卯三月中)’, ‘신삼월(辛三月)’ 처럼 지간만 표기한 케이스가 있다는 것이다. 또 경남 합천 해인사 길상탑지(895)에서도 7월을 ‘신월(申月)’로, ‘건녕 2년 을묘년’을 ‘녕이묘년(寧二卯年)’으로 표기했다.
홍성화 교수는 ‘503년 계미년설’의 다른 허점도 지적했다. 무령왕이 501년에 즉위했다. 그랬다면 503년 제작된 인물화상경에는 ‘사마’가 아닌 ‘왕’의 칭호를 사용했어야 옳다. 결정적인 흠이 또 있다. ‘남제’의 일본 발음인 ‘오오토’와 ‘남대적(게이타이 일왕)’의 일본 발음인 ‘오호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호(ホ)’는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야 ‘오(オ)로 발음됐다는 게 일본 학자들의 견해라는 것이다. 따라서 5~6세기의 남제왕을 ‘게이타이 일왕’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게 홍성화 교수의 주장이다.
백제 무령왕과 동성왕의 계보는 역사서 마다 다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이라 했다. ‘503년 계미년’도, 또 ‘사마(백제 무령왕)가 일본 게이타이 일왕에게 준 선물’도 아니라면…. 대체 인물화상경은 누가 만들어 누구에게 주었다는 것인가. 사실 고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까지도 무령왕과 동성왕의 출자를 두고 무척 헷갈려한다.
예컨대 <삼국사기>는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적시했다. 반면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라고 했다. 즉 461년 백제 개로왕(455~475)이 아우 곤지(?~477)를 일본에 보낸다. 곤지는 “임금님의 부인(婦)을 저에게 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개로왕은 해산을 앞둔 자신의 부인을 내준다. 과연 임신한 부인은 일본으로 가는 길목인 가당도(加唐島·가카라시마)에서 아이를 낳는다. 곤지 일행은 태어난 아이를 배에 태워 본국에 보낸다. 이 아이가 바로 무령왕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일화다.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가 감히 임금(개로왕)의 부인을 달라고 한 것도, 임신한 부인을 덜컥 동생에게 내준 개로왕도 상식적이지 않다. 아무튼 <일본서기>는 ‘곤지=개로왕의 동생’으로, ‘무령왕=개로왕의 아들’로 기록했다. <일본서기>는 곤지를 따라 일본으로 향하던 개로왕의 만삭 부인이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을 낳았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41년 후인 <일본서기> 502년조는 사뭇 다른 내용을 전한다. 무령왕의 등극(501) 소식을 전하면서 <백제신찬>이라는 원전 자료를 각주로 달아놓는다. <백제신찬>은 사마왕(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고, 말대왕(동성왕·479~501)의 배다른 형으로 기록했다. 이미 ‘무령왕=개로왕의 아들’로 서술한 <일본서기> 편찬자가 뒤늦게 ‘무령왕=동성왕의 배다른 형’ 기록을 읽고, 각주로 <백제신찬>의 내용을 추가한 것 같다.
또한 <백제신찬>은 신축년(461년)에 개로왕이 아우 곤지를 일본과의 우호를 위해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때 무령왕이 523년 62살의 나이로 서거했다는 명문지석이 나왔다. 그걸 역산해보면 무령왕이 461년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바로 <백제신찬>이 기록했다는 신축년(461년)과 딱 맞아 떨어진다.
그동안 <일본서기> 중에서도 단편적으로 인용된 <백제신찬> 기록이 나름 정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개로왕-곤지-무령왕-동성왕 관련 가계와 관련해서는 <백제신찬> 자료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무령왕(501~521)이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맏아들이고, 동성왕(479~501)의 ‘배다른 형’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하나 의미심장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일본에 온 개로왕의 동생 곤지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479년 백제 삼근왕이 죽자 일본에 있던 곤지의 둘째아들이 백제로 돌아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동성왕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곤지의 맏아들은 국내에 있던 사마, 즉 무령왕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왕위를 잇지 못하고 일본에 있던 동성왕이 귀국해서 등극한 것이다.(사마가 곤지가 일본에서 낳았다는 5명의 아들 중 장남이었는지, 혹은 5명의 아들과는 다른 자녀인지는 설이 분분하다.)
그렇다면 ‘인물화상경’ 명문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제작·선물연도가 계미년(503)이 아니라 그냥 ‘미년’으로 읽힌다면 ‘언제’라는 말인가. 박남수·홍성화 두 연구자의 견해가 여기서 갈린다. 박남수 전임연구원은 인물화상경의 명문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미년(동성왕13, 491년) 8월 10일, 대왕(동성왕)이 남제왕(일왕)에게 구걸하여 의시사가궁(일왕 모후의 거처)에 있을 때에, 사마(무령왕)가 (동성왕을) 길이 받들 것을 생각하여 백제에 귀부한 비직과 예인(穢人) 금주리 두 사람 등을 보내어 (당시 백제 국왕인 문주왕 혹은 삼근왕에게) 사뢰어 (동성왕에게) 올렸던 동(銅) 200두에서 이 청동거울을 취했다.”
앞서 밝혔다시피 동성왕은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생활을 ‘구걸’로 표현했을 정도로 곤궁했다는 것이다. 이때 본국에 있던 이복형 사마(무령왕)가 동생의 체재비로 청동 200두를 보냈다는 것이다. 일본에 머물던 동성왕은 그중 일부를 생활비로 쓰고 삼근왕 서거 후 귀국해서 등극한 후 남은 동으로 인물화상경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491년 미년’은 동성왕으로서는 의미심장한 해였다. 전해(490) 북위의 침공을 격퇴한 뒤 공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쪼그라든 국세의 회복을 모색했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일본 체류 때의 일을 회고하며 마음을 다잡는 기회를 삼으려고 ‘인물화상경’을 제작한 것이 아닐까.
박남수 연구원은 그런 측면에서 ‘인물화상경’ 그림을 분석했다. 세 편으로 이루어진 동경의 그림에는 우선 국왕의 좌우로 문무관료를 배치하고 무관의 앞에 북위의 장군으로 추정되는 무릎을 꿇은 인물이 보인다는 것이다. 또 국왕의 행차 때 백성을 되돌아보는 화상, 국왕으로 여겨지는 인물의 침소에서 시봉하는 신하(사마·무령왕)의 모습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국왕의 침소를 돌보는 신하의 모습은 ‘사마(무령왕)가 대왕(동성왕)을 길이 섬길 것(長奉)을 생각했다’는 명문의 내용에 부합된다고 보았다.
박남수 전임연구원은 ‘인물화상경’이 정사를 펼치는 백제왕의 모습을 그렸다고 해석했다. 양팔을 벌리고 중앙에 앉아 있는 인물은 화상인물경의 주인공인 대왕이 아닐까 여겨진다는 것이다. 국왕의 좌우로 문무관료를 배치하고 무관의 앞에 북위의 장군으로 추정되는 무릎을 꿇은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정사를 펼치는 동성왕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의 명문판독은 다음과 같다. “미년(479년) 8월10일 대왕년(삼근왕의 치세) 남제왕(동성왕)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가 오랫동안 섬길 것을 생각하면서 귀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2인을 보내 아뢴바, 동 200한을 올려 이 거울을 취한다.”
박남수 전임연구원의 판독과 같은 듯 다르다. 우선 ‘제작연도’가 479년(홍성화)과 491년(박남수)으로, ‘대왕’이 삼근왕(홍성화)과 동성왕(박남수)로 나뉜다. 홍성화 교수는 “461년 일본에 간 곤지가 이윽고(旣而) 아들 5명을 두었고, 479년 그 중 둘째아들(동성왕)이 즉위했다”는 <일본서기> 기록에 주목한다.
<일본서기>는 이 대목에서 “유랴쿠(雄略·재위 456~479) 일왕이 어린 동성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왕으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홍성화 교수는 이 대목이 일본 왕실과 동성왕의 특별한 관계를 암시하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즉 일본에 도착한 곤지가 일본 왕실 여인과 혼인했는데, 그때 낳은 아들 4명 중 첫째가 동성왕이라는 것이다.
곤지의 일본 부인은 누구일까. 홍성화 교수는 인교(允恭·재위 412~453) 일왕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보았다. 인교 일왕은 부인인 ‘오시사카 노 오나카쓰 히메(忍坂大中姬)’와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다. 그 아들 중 하나가 “어린 동성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는 유랴쿠 일왕이다. <일본서기>에 다르면 외삼촌인 유랴쿠가 어린 외조카의 백제왕 등극을 격려한 셈이 된다.
홍교수는 동성왕이 머문 ‘오시사카(意柴沙加)’궁의 발음이 장모 이름인 ‘오시사카 노 오나카쓰 히메(忍坂大中姬)’와 같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동성왕이 외가인 오시사카궁에서 태어나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홍교수의 설명이다. 그런데 곤지의 첫째아들인 무령왕은 왜 삼근왕 서거후 왕위를 잇지 못하고 이복동생에게 물려주었을까. 홍 교수는 서자인 무령왕이 일본 여인과 정식 혼인을 통해 낳은 정실자녀(동성왕)에게 밀렸다고 보았다.
그럼 ‘인물화상경’은 대체 뭐란 말인가. 홍교수는 삼근왕 서거 직후인 ‘479년 미년’ 8월 이복동생(동성왕)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동성왕을 ‘오래도록 섬길 것’(長奉)을 서약하며 제작한 것으로 보았다. 삼근왕이 479년 4월에 서거했고(<일본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동성왕이 귀국한 11월 등극한 것으로 보았다. 그 사이 국내에 머물고 있던 이복형 사마(당시 18세)가 삼근왕 서거 후 후계구도가 정리된 뒤 충성서약의 징표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어린 동성왕에게 ‘인물화상경’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홍성화 교수의 견해이다.
‘인물화상경’은 4세기 진구 왕후의 삼한 정벌과 관련이 있거나, 5세기 일본이 이미 ‘대왕’이라는 호칭을 썼음을 알려주는 유물로서 일본의 국보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최근 두 연구자의 견해에 따르면 ‘인물화상경’이 일본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유물이다. 도리어 백제 사마왕(무령왕)과 관련된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간직한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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