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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들 ‘잘 보내기’ 작업
-김효선, 권혁재 시인 작품론
인간의 삶은 불안정하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상실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안정성은 사회의 경쟁 구도 속에서 실직, 이혼, 사고, 질병 등 예기치 못한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현대사회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실연과 죽음은 상실을 가져오기에 인간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변심으로 인해 상실을 경험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상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의 「욕망, 그리고 ‘햄릿’에 나타난 욕망의 해석」에 의하면, 애도는 실연과 죽음처럼 주체가 사랑하는 자를 한순간에 잃고 상실과 충격에 의해 기억이 신체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떠난 자가 남은 자의 심리 과정 속에 같이 합체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애도 작업에서 주체가 실패할 경우 남은 자의 심리는 우울증으로 변해서 애도와 다른 애도 거부를 하게 된다.
그 예를 2014년 세월호 참사에서 찾을 수 있다. 참사 당시 유가족들은 한순간에 자녀의 죽음과 맞닥뜨렸고, 지탱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막막한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주변 반응이나 시선도 불편할뿐더러 언론의 지지도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들은 소외와 고립 속에서 부인을 반복하다가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이후 유가족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과의 갈등을 극복하거나, 반대로 그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애도 거부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유가족들이 죽은 자를 하루 바삐 떠나보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은 자들이 그 고통에서 얼마나 빨리,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예시를 참조하여 2020년 『문학과 사람』 가을호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주체가 애도작업을 통해서 이들을 어떻게 떠나보내는지, 만약 애도작업에 실패할 경우 어떤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는지, 김효선 시인의 『어느 악기의 고백』 과 권혁재 시인의 『당신에게는 이르지 못했다』를 통해서 남은 자의 구조 안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자의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자들 ‘잘 보내기’-김효선 시인
김효선 시인은 2004년 계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했다. 이후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2008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선정)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로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를 출간했다. 김효선 시인의 시에서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의 애도와 우울증이 나타난다. 먼저, 시인은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 어떤 사건인지 시에서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실하게 되고 이들과의 관계 때문에 소외와 고립속에 놓여 있을 걸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시인이 시에서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닌, 어떤 사건과 관련된 다수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 『어느 악기의 고백』에 나타난 애도와 우울증 구조를 살펴보면, 주체는 사랑하던 사람들을 상실하고 슬픔을 애도하지 못한 채 자신의 내부에 대상-카섹시스를 하는데, 이 대상들에 대한 양가적 감정으로 인해 대상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자아를 자학하게 된다. 비록 주체가 자기 추락이나 자기 소멸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적 대상과 연결되고, 애증과 자학의 양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에 나타나는 양가적 감정은 주체의 기질적 측면이 아닌,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 대상상실을 포함한 특수한 경험 때문에 일어난 정신적 상처의 승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면 사물에 대한 기억의 경험이 애도의 슬픔처럼 대상-카섹시스(사랑하는 대상에 성적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와 반대인 자아에 대상을 합체하는 우울증, 즉 무의식 조직에 의해서 양가적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들은 바른 방향을 따라 진행하는데 이 시들의 경우 어떤 원인 때문에 통로가 막히게 된다.(프로이트, 『정신분석의 근본 개념』, 윤희기, 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5.p.263) 이때 일어나는 애증 병존은 무의식이며 상징인 꿈이라고 할 수 있다. 꿈은 “누군가 물 위로 툭 떨어뜨린 발자국”처럼 알 수 없는 시를 쓰게 한다. (「우리도 소풍일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인들은 김효선 시인의 ‘알 수 없는 시쓰기’에 공감하는 측면이 강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의 고통 때문에 의식이 침해를 받아 우울한 감정선이 열리기 마련이다.
또한, 김효선 시인의 시적 주체는 ‘개인적 차원’에서 실연에 의한 대상애의 상실을 경험한다. 이 상실은 자아의 보유 과정을 거친 후, 현실이 아닌 꿈을 통해 이별한 자에 대한 기억의 찌꺼기를 드러낸다.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에 의하면, ‘증상은 기억의 상징’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타자를 상실한 주체는 지금까지 그 고통을 외재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 병합하다가 애도의 실패로 인해 리비도의 출혈을 맞게 된다.
주체는 모든 기억을 외재화해서 떠난 자와 죽은 자들을 추념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효선 시인의 시쓰기는 꿈을 통해 애증과 자학을 남기는 기억의 기념비 같은 것인데, 이는 일종의 특이한 심리 상태에서 느끼는 경험과 같다.
주체는 낮은 마음으로 신의 오른팔을 부르는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철회하지 못하고, 제 몸 속에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보유하고 있다.
또 첫눈이 내리고 오래 아프던 사람이 떠나고 사랑은 떠
나야 다시 오는 버스랬지 숲에서 죽은 얼굴은 어떻게 묻
어야 할까 버려진 거울은 귀신같이 사람을 알아보는데
오래전 죽은 이름들이 어제 들은 비보처럼 서러워지는
꿈, 속세처럼
서른 세 개 서른 세 번의 우기에서 시작된
모든 세계가 하나로 합쳐질 때 잘라 낸 소리는
리라의 연주처럼 부드럽게 심장에 꽂힌다
내 마음이 몬순을 지나 건기에 이를 때
어떻게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나요?
가슴 밑바닥에서 오래오래 뒤척였을
하심(下心) 하심(下心) 신의 오른팔을 부르는
몇 번의 풍장을 치러야 몸은 인연을 버릴 수 있을까요
- 「내 마음의 몬순을 지나」 일부분
주체는 현재 에고에 부착된 대상을 포기하면 다시 새로운 대상(버스)이 올 거라고 믿는다. 대개 ‘버스’에는 바퀴를 굴린다는 뜻에서 죽은 자를 추방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버스는 세계 질서의 밝음과 생명을 구성하고, 많은 사람과 관계된 사랑의 상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꿈속 주체의 여성적 원리 안에서는 죽은 자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난제가 들어 있다. 이들이 현실 세계에서 ‘버려진 거울’이라면 이 거울은 현실을 덮은 차폐물에 불과한데, 대상 포기의 문제의식을 지닌 시의 주체는 거울이 자신을 비추는 환영이다. 따라서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은 주체의 에고에 부착되어 있고, 주체는 아직도 이들을 철회하지 못하고 있다. 그 점에서 시인이 대상애의 상실을 치유하는 데는 과도한 에너지 소비와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
그러나 난이도 있는 고통이라도 종교에 귀속되는 순간 가능해진다. “서른세 개, 서른세 번의 우기에서 시작된 모든 세계가 하나로 합쳐질 때” 내는 소리가 빗소리다. 33은 불교에서 중생들의 고통인 백팔번뇌와 같아서, 모든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소리로 나타난다. 이 소리가 눈물이다. 따라서 주체는 마음 안에 있는 고통을 제거해야 ‘몬순이 지나는 건기’처럼 ‘리라를 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몬순이 지나가는 건기’와 ‘리라를 켜는 소리’는 논리적 인접성에 의한 인과관계의 환유다. 따라서 「내 마음의 몬순을 지나」의 시적 언어는 이야기를 가진 서술시라서 환유적 지배소가 강하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개인적 차원에서 대상애를 포기한 자리에 사회적 사건 차원의 “죽은 모든 사람”이 꿈을 통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주체에 의하면, 이러한 애도의 구조는 ‘몬순바람’과 같다. 계절풍처럼 리비도 반복 수행은, 오래전에 죽은 이들이 “하심(下心), 하심(下心) 신의 오른팔”을 찾으며 신에게 구원을 요청할 때 이를 지켜보던 주체가 “어떻게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타난다. 따라서 주체는 대상-카섹시스에서 오는 고통의 혼란 상태를 현실이 아닌, 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꿈을 통해서 자아가 틈새를 보인다는 건 상실에 대한 시인의 고립이 수위를 높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기다릴 게 너무 많은 사람이 나무로 태어난대
가문비나무에서 불어오는 미래도 시도레도 라라라라
어느새 벽은 소리를 가둔다
비는 언제까지 내리기로 한 걸까
아무도 그 벽을 허물지 못한다 딴딴딴
벽이 걸어가지 못한 길은 빗방울이 대신 걷는대
돌아가지 못한 빗방울이 나무의 소리를 갖는대
조금만 더 살아보자 살아 보자
아직도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으로 키가 자란다면
- 「여자 47호」 일부분
이 시 역시 꿈에 의한 무의식의 정동을 드러낸다. 주체의 정동, 즉 “기다릴 게 너무 많은 사람”이라서, “그 벽을 허물지 못”해서 떠난 자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부착된 리비도가 자아로 퇴각하는 순간 상처를 입게 되고 상실된 대상의 본질에서 문제가 생긴다. 우울증에서 상실은 곧 자아를 의미한다. 이 시에서는 주체의 죽음은 ‘나무’로의 부활이다. 죽음이 나무라면 새잎이 돋는 미래는 자기애의 파괴를 통해 가문비에서 리라 소리(음계)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흐름은 ‘벽’에 의해 소통을 차단당한다. ‘벽’의 계열성은 ‘비’다. 비는 주체를 고립시키는 물질이다. 그렇다고 벽이 중심을 이동해 해체할 수도 없고, 누가 주체의 마음을 해방시켜 줄 수도 없다. 대신 빗방울이 벽을 뚫어 주체의 고통을 허물어뜨린다. 결국 승화되지 못한 빗방울이 나무의 소리를 갖는다고 할 때, 천상의 소리가 지상의 소리를 덮는다는 의미에서 이 둘의 만남은 죽음과 연관이 있다. 그 시행에서 주체는 “조금만 더 살아보자 살아 보자”라고 죽음을 회유하거나 지연시킨다. 만약 대상과의 병합이 죽음으로 소멸된다면 시인의 결핍은 완전히 탈존재화 된다. 주체의 죽음을 지연시키는 꿈과 달리 현실에서 주체는 비와 나무가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까 두려워한다. 그러한 이유로 주체는 밤마다 자신을 안고 자는 꿈을 꾼다. 따라서 시인에게서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은 유아기 때의 상실된 대상이 아닌 상당히 변형을 거쳐서 모호한 타인으로 나타난 죽은 이들이다.
이 시에서 주체는 애도의 실패로 인해 우울증 초입에 들어서게 된다. 그 이유는 애증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싫어서 주체는 에고를 극단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바다유리심장」에는 주체가 어떤 결핍으로 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이 시에서 대상-카섹시스(cathexis)는 ‘원왕생’의 발복을 받는, 즉 실연의 상처를 주고 ‘떠난 자’다.
절벽에 핀 나리꽃은 얼마나 아찔한 목소리인지
휘파람에 허밍이 얹혀 오는 아침
너무 오래 미워하면 너무 오래 사랑하게 된다
깨지기 쉬운 심장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나비의 잠을 보고 온 날은 너무 빨리 늙어 버린 것 같아서
원왕생 원왕생
한 계절 앞서 달리는 편백나무 숲에서
그릴 사람 있다 사뢰고 싶습니다*
너무 많은 걸 생각하면 나를 잃어버려서
아무리 애써도 알 수 없는 것들
오다가 주웠어 그런 모서리에 기댄 밤
눈썹은 언제 다 자라서 바다를 가질까
- 「바다유리심장」 전문
너는 왜 자꾸 살아 있는 것만 주니?
화분 밖으로 튀어 나가길 좋아하는 애인과
여러해살이풀처럼 자꾸 돌아오는 인연
주머니에 신성한 콜라나무 열매를 간직해
흐리거나 슬픈 기억을 쥐여주고
밤을 지켜 줄 목양견을 만난다면
호루라기를 불어도 오지 않는 사람을 잊었을까
밑동이 잘린 나무 사막에 앉아
가시풀로 제 피 맛을 즐기는 낙타처럼
나를 키운 애인이 불안이라면
문밖의 죽음을 데려와
오래오래 사랑할 테다
- 「애인」 일부분
「바다유리심장」은 개인적 차원에서실연에 의한 대상 상실이다. 이에 우울증은 실제적으로 대상이 죽은 것이 아닌, 실연에 의해 대상이 돌아오지 않는 상실을 말하고 있다. 떠난 자의 이별 행위는 남은 자에게 거절 의사와 같다. 시인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자기 자학에 의해 애증으로 나아간다. 자기 비하는 일반 슬픔에서 진화된 특수한 사건의 경험에서 오는 우울증이다. 주체는 애증을 배제하기 위해 “깨지기 쉬운 심장을 바다”에 던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몸부림이 제 심장을 바다에 던지는 행위이다. 이 행위 역시, 꿈, 즉 “나비의 잠”에서나 가능하다. 이 나비의 잠에서 주체는 “나무 사막에 앉아 가시풀로 제 피맛을 즐기는 낙타”와 같다. 황량한 곳에 앉아 가시로 제 살을 찔러 피를 보는 낙타처럼 이 시에서 주체는 자학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주체는 금지된 대상을 내면에 합체하고 있으면 자기 소멸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모서리에 기대된 밤” 주체가 “너무 많이 잃어버려서” 건전한 자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한다.
주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역사가 있다. 일차로 주체는 유아기 때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 생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내면에 자리하게 된다. 유아기 때는 고통을 이기려는 주체의 기능이 취약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으면 곧 무의식을 억압하게 되는데, 그 억압이 “모서리에 기댄 밤”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밖의 죽음”이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인데, 그들은 시인의 고향과 연결된 서귀포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4·3 사건은 제주의 큰 사건이다. 이 사건이 녹아있는 「애인」에서 ‘문밖의 죽음’은 집안에서 고요하게 죽은 자가 아닌, 어떤 사건에 의해 ‘문밖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이때 유가족들은 큰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일반적인 슬픔이라면 정상적인 애도로 끝나겠지만 이처럼 큰 사건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실한 유가족은 애도에 실패하고 무의식의 싱징인 꿈에서 이들을 자신의 내부로 합체하게 된다. 따라서 꿈은 무의식적 대상인 양가적 감정과 관련되기에 이 시는 우울증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큰 사건이 주체와 시간적으로 먼거리에서 일어나지만 부모로부터 들었거나, 지인에게 들을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주체에게는 4·3 사건이 무의식에 남아 성인의 심리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2차 트라우마인 「애인」은 주체의 현재 심리를 지배하는 ‘떠나간 자’에 대한 대상 상실이다. 트라우마가 현재 성인기에서 발생한다고 현재에 원인이 있는 건 아니다. 유아기, 짐작건대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 생긴 4·3사건이 주체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억압되어 그와 비슷한 사건이나 행동이 있을 때마다 환기되어 나타난다. 유아기 때 특수한 경험을 한 주체는 “화분 밖으로 튀어 나가길 좋아하는 애인”의 상실에 마음이 불안해진다. 일반적으로 실연의 상처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이 있어, 세계와 자아가 부착된 자리에 다른 대상이 교체되면 완전한 애도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주체의 독백은 “신성한 콜라나무 열매”를 간직하길 원하고, “흐리고 슬픈 기억”을 쥐여 주고, 또한 “목양견”을 만나고 “호루라기”를 불어도 오지 않았다면 주체는 대상을 순조롭게 잊었을까? 양에 대한 네 가지 언어 선택은 세부와 전체 간의 유기적 연결고리인 환유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애인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주체는 자신 안에 부착된 이를 쉽게 떠나보낼 수 없고, 그 자리에 새로운 대상을 세워 사랑할 수도 없다. 오히려 불안만 가중시킬 뿐이다. 결국 애인이 자신에게 상실감을 주는 불안한 존재라면, 주체는 ‘애인’을 부착한 내면에다가 ‘문밖에서 죽어간 자들’을 다시 데려와 더 오래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주체는 처음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취하고 보유하는 몸의 에고를 철회하고 새로운 대상 선택인 “애인”에게 자리 세움을 한다. 그럼으로써 애도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애인’ 역시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처럼 불안을 주고 상실을 주는 존재다. 주체는 다시 ‘애인’에게 투사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고 그 자리에 ‘문밖의 죽음’을 데려와 대상애로 세우고자 한다. 이럴 경우 주체의 애도는 대상만 교체했을 뿐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자기 내면에 반복 소환해서 이들과 동일시하겠다는 뜻이다. 애도의 중요성으로 볼 때 주체는 억눌렸던 과거의 감정에서 벗어나 현실의 자유를 얻거나 산자와의 사랑을 위해 죽은 자에 대한 대상-카섹시스를 지연시키고 있다.
하지만 주체에게는 ‘나를 잃어버리기’ 싫고, 또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감정이 내면에서 일어나 자기 인식을 통해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이 ‘이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과의 카섹시스에서 벗어나 ‘이녁’ (「이녁이라는 말」)을 세우게 된 이유다. 따라서 김효선 시인의 『어느 악기의 고백』에서 나타나는 기억 속에 사랑하는 자 ‘잘 보내기’ 작업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 애증 병존의 갈등-권혁재 시인
권혁재 시인은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그의 시집으로는 『투명인간』, 『안경을 흘리다』, 『당신에게 이르지 못했다』외 5권이 있고, 저서로는 『이기적인 시와 이기적인 시론』이 있다. 특히 『당신에게 이르지 못했다』 시집에서 권혁재 시인은 제주 4·3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권혁재 시인은 4·3 사건의 과정에서 일어난 가족과 친지 그리고 지인들의 참사를 통해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의식과 무의식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그 이면에는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자아 결핍이 언뜻 스치기도 한다.
「바다무덤2」 에서 주체는 4·3사건의 총구에 의해 죽어간 제주 주민에 대한 죄의식을 제주 주변 섬에 그 원인을 돌리며 애도 콤플렉스의 심리적 현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뜻하지 않게 가는 이들은 모두 서귀포에서 떠났다
서녘으로 돌아가듯이 해풍을 안고 떨어져 내리는
목화꽃 같은 목줄 너머로 총구로 밀어 넣는 군화의 정렬
물에 뜬 주검을 떨어진 물줄기가 시포처럼 덮어
시퍼런 봉분을 이루며 출렁였다
보고도 못 본 목격자로 숨죽이다 말 못 하는 돌부처가 된
숲섬, 문섬, 새섬, 범섬이 사리가 드는 말마다
정방을 향해 천도재를 올렸다.
- 「바다무덤2」 전문
이 시에서 죽음의 통합성은 「서녘」, 「목화꽃 목줄」, 「주검」, 「시퍼런 봉분」, 「천도재」 등 환유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54년 9월 남로당 무장대 및 토벌대 등에 의해 많은 제주 도민이 학살당했다. 죄 없이 죽어가는 학살자들을 본 네 개의 섬들은 이 사건의 목격자들이어서 정방 쪽을 향해 천도재를 올린다. 이 시에서 천도재는 4·3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를 위해 명복을 비는 독경 의식이고, 불공을 드리는 의식이다. 슬픔은 애도 콤플렉스이다. 슬픔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어서 대중적 대상 상실로 본다. 특히 이 시에서 투사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죄의식이기 때문에 주체는 이를 외부 타자에게로 돌린다. 이 중에서 특히 외부 투사는 죄의식에 휩싸인 자아를 부정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다. 죽은 이들을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상실감에 젖는 주체는 죄의식을 느껴 이를 네 개의 섬에 투사하고 있다. 이 네 섬들이 정방을 향해 천도재를 올리는 것 역시 시인의 심리가 투사된 것이다. 정방은 4·3 제주사건에서 토벌대가 주민 250명이나 학살당한 장소이기 때문에 이 시에서 의미가 있다.
시적 주체는 이처럼 큰 사건을 접하면서 외적인 육체와 심리적인 고통을 동시에 느껴 투사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큰 사고라고 해서 모두 애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대구지하철 참사처럼 큰 사건이 일어나 현장에서 살아난 자의 정신적 외상을 입는 것은 애도가 아니다. 지하철 사고에서 현장에 죽은 사람의 유가족이 사후 그 사건에서 죽은 자를 몹시 그리워하고, 고독과 고립 속에 놓여 있다가 주체의 에고에 이들을 합체하면 애도가 된다. 이 시 역시 주체가 4·3 사건의 현장에서 죽은 이들처럼 참사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게 아니다. 죽은 자의 유가족으로서 주체는 이들을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체의 심리는 애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의 길」에서 주체는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린 유가족의 특별한 심리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상징계 안의 사람이 아닌, 인간관계 밖에 있는 사람이다. 참사 후 죽은 자를 끌어안고 있는 남은 자는 인간관계에 놓여 있는, 즉 생명에 귀속되는 삶이 아닌 죽음과 같은 특이한 심리 상태를 보이고 있다.
바람도 몰랐다
돌의 구멍으로 바다를 들여다보면
오래된 화병으로 죽은 조천 고모의
한숨이 들려왔다
섬에서 죽음은 매일 밤 용암 속으로
천천히 손을 밀어 넣는 잔혹한 시간
섬의 돌들은 죄다 바람의 길이었다
고모부가 끌려가며 몇 번이나 뒤돌아봤던
화산재 깔린 돌길을 바람이 불어와 위로하였다
고모의 한숨은 새의 울음으로 시작하여
날마다 더 커져 거대한 바람의 길이 되었다
화산석같이 구멍 난 고모의 가슴
구멍을 통과한 바람들은
어디선가 또 다른 가슴을 뚫었다
길 밖으로 밀려난 고모는
몇 십 년째 말을 잃었다
바람도 길을 잃은 채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섬의 돌들도 길을 잃고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바람의 길」 전문
이 시가 말하는 것은 제목이 암시하듯 ‘바람의 길’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에 의해 바람이 고모의 가슴을 뚫었는지, 이 바람이 왜 방향을 틀어서 다른 가슴을 뚫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이 시의 특성이다. 이때 이 시는 독자를 유인하고 있는데,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하든 시인은 독자의 상상력에 내용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슬픔의 문맥, 사랑하는 남편을 상실한 고모의 삶의 문맥에서 이 시를 읽고 있다. 의미화되지 않는 문맥에는 고모부가 살다간 ‘화산재 깔린 돌길을 따라 끌려간 자의 세 번이나 뒤돌아 본 들길’에 대한 상황, 이는 지금까지 전 생애를 바치며 살았던 한 농부의 허무한 생애로 읽을 수 있고, 아내가 자신을 생각하며 일을 해야 할 가슴 아픈 풍경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들길, 즉 사랑하는 사람이 부재한 텅 빈 상실의 공간으로 이 시를 읽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암시하는 공간은 고모의 입에서 나온 ‘한숨’처럼 세계의 고통인 ‘잔혹한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한숨’, ‘새의 울음’, ‘거대한 바람길’로 드러난다. 고모가 새의 울음으로 우는 것과 이후에 ‘거대한 바람길’이 된 것은 시에 시인의 슬픔이 투사되었기 때문이다. ‘새의 울음’을 노래라고도 하듯, 일반적인 새의 울음은 남은 자에게 행복한 울림을 주지만 ‘거대한 바람길’이 될 경우 대상 상실에서 오는 결핍은 곧 자애감의 추락으로 이어진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의 ‘구멍’은 죽음의 세계를 암시한다. 죽음 같은 암울한 현실은 이웃 타자와의 현실적 삶의 형태를 취할 수 없는 실어증자의 ‘태양의 소멸’이고, 바람도 방향을 상실한 채 ‘담벼락’에 붙어 있는 ‘소통 부재의 공간’이다. 따라서 닫힌 공간은 사랑이 재가동될 확률이 없는 자아의 빈곤상태를 말하는 우울증이다. 이 부분에서 시인의 시세계는 확장되지 않고 다른 목적이나 관심이 제공되지 못하는 불투명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자아가 빈곤한 상태를 드러낼 때, 즉 10년의 묵언이 자기 비난 속에 스스로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가깝게 다가가 있다는 뜻이다.
당신을 오름 한쪽에 묻고 왔지만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잊을 것도 잃을 것도 없었다
돌담을 쌓아 울타리를 치다 보니
산지기가 되어
세상과 담을 쌓는 듯도 했다
恨은 왜 자꾸 바람보다 먼저
대숲을 헤집어 놓는지
보름밤마다 눈이 붓도록 울었다
죽고 나서도 또 유배지에 들은 당신
총알이 뚫고 간 심장이 여전히 아프다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말 아닌 말들이
사람 아닌 사람들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위리안치
- 「산담」전문
이 시는 슬픔의 감정을 순식간에 해결해 준다. 대상이 시인의 자아에 합체되면 더는 대상-카섹시스(cathexis)를 철회하지 않아도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울음이 멈추지 않는” 고통과 “보름밤마다 눈이 붓도록” 울어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잊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사랑하는 어머니에 대한 관심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도 잊게 된다. 다만 ‘거부를 위한 거부’, 즉 상실의 이중기제를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실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이다. 주체가 자아를 소모시킨다는 것은 비록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슬픔의 한 작용에 관계되는 내면화일 수도 있다. 묘에 돌담을 쌓아 상실된 대상과 합체하겠다는 것은 주체가 내면화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과의 단절된 공간은 “돌담”, “울타리”, “산지기”로 나타난다. 타자를 합체한 자아의 내면은 ‘한’처럼 강화되어 마침내 대숲의 바람마저 죽은 자의 ‘유배지’가 된다. 다시 말해서 남편을 상실한 주체는 살아서 10년의 묵언과 죽어서 대숲 바람의 소리에 휩싸인 채 섬의 섬(「섬의 섬」)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때 시인의 투사는 “총알이 뚫고 간 심장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그 점에서 주체는 무의식의 억압과 슬픔에 빠져버린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우울증이 깊이 드러나는 행은 “말 아닌 말들”과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위리안치”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도 말의 내용이 분명치 않고 방어벽 또한 높아 경계를 넘나들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말 아닌 말들”에 대한 암시는 현실 세계에 대한 사랑의 상실이고, 사람들이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는 점에서 또한 무의식이다. 따라서 ‘산담’은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공간이고, 자아의 내면에 상실한 대상을 합체한 우울증의 공간이면서, 주체가 오직 자기애로 되돌아가는 목적을 위해 대상애를 포기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울증은 애도처럼 시간이 경과하면 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주체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향했던 무의식적 표상을 거두고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권혁재 시인의 시에서도 그 점이 나타난다.
오늘 이전의 오늘은 오지 마라
어제도 어제의 이전만 있어라
오늘은 하늘이 참 곱다
멀리 물결치는 파도도
방어 떼가 노니는 듯 눈이 부시다
늘 보던 밀감밭의 나뭇잎도
오늘은 윤기가 많이도 난다
바람도 자유를 찾아서
제 뜻대로 불어 가고
오늘 이전의 오늘은 없을 것 같아
하늘이 곱기도 고와
칠십 년 만에 내뱉는 말,
나, 죄 어수다
-「최후 진술」 전문
이 시의 핵심은 “오늘 이전의 오늘은” 오지 말고, “어제도 어제의 이전만 있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을 비하했던 침묵의 사건이다. 4·3사건으로 인해 죄수 아닌 죄수의 삶을 산 주체는 사랑했던 사람을 상실했다는 것도 잊은 채 특이한 심리 상태에 고립되어 있었다. 이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주체 안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온다. 이처럼 우울증에도 선물 같은 순간이 찾아오는데, 우울증을 오랜 기간 겪는다거나, 과다한 대상-카섹시스 후에는 리비도의 이탈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주체가 자기 내면에 부착한 타자를 무가치하게 느끼게 되며, 주체의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쉽게 풀린다. 그 예를 주체의 심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체는 “하늘이 참 곱고”, 보는 순간 “물결치는 파도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우며, “밀감 밭의 나뭇잎까지도 윤기”도는 것을 보면서 무의식의 억압에서 벗어난다. 그러기까지 칠십 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기다림은 기다림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오늘 이전의 오늘은 오지 마라/어제도 어제의 이전만 있어라” 라고 했을 때 아이러니의 실제는 ‘자유’가 아니라 “나, 죄 어수다”에 있다. ‘죄 없다’는 말은 4·3사건과 관련된 암시를 함의하고 있다. 오늘 이전에는 주체가 죄수로 살아온 억울함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상실한 고통이 있었다. 또한 주체는 죽은 자를 자신에게 부착하며 이를 사랑했다는 것도 산자가 자신이라는 것도 잊는다. 이때 주체에게는 자기 비하와 자기를 부정하던 상처가 남아 있다. 오늘 이후부터는 죄인 아닌 사람이 죄인이 되어 살아온 날에 대한 누군가의 보상이 필요하고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투명과 불투명에 대한 ‘잘 보내기’ 시학
라캉의 『욕망이론』이 그랬던 것처럼 권혁재 시인의 『당신에게 이르지 못했다』에서 가장 핵심적인 애도 과정은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게 아닌, 가장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들여다보는 고통에 있다. 자연사에 의한 죽음이었다면 애도로 끝나고 말 것인데, 지배권력에 의해 집단 살해된 사회적인 사건 차원에서 오는 죽음이었기에 주체의 에고는 특이한 심리상태 놓여 있다가 세계와 소통 부재를 일으킨다. 고립감에 젖은 주체의 우울증은 마침내 자기 비하와 죄의식에 빠져 자아를 소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주체의 애도와 우울증은 무의식의 일련의 과정에서 쉽게 극복되는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 안에 부착된 타자가 시들해지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혁재 시인은 사회적 사건 차원에서 입을 꼭 다문 채 자기 일만 하는 (「모래비늘」) 사람들의 병리적 증상이 아직 미해결 단계에 놓여 있다고 보고, 누군가 해결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혜량한 시세계는 나직한 목소리로 아직 닿지 못한 불투명한 사건에 투명한 표제를 제시한다고 할 것이다.
이에 비해 김효선 시인의 이번 시집은 사랑의 상실에 있어서 떠나보냄과 떠나보내지 못하는 불가피성에 대해 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래 집착하다 보면, 사랑이 양가적 감정으로 변하고, 곧 자학에 이르게 된다는 것쯤은 시인도 잘 안다. 하지만 기억에서 이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아서 시인은 내면에다 이들을 반복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란 영원성을 지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많은 것을 잃었다는 (「바다유리심장」) 상실과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2월 29일」) 절박함에 사로잡혀 마침내 자기 인식을 통해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너’와 ‘당신들’을 떠나보낸 자리에 시인은 새살을 돋아 올려 새로운 사랑을 세우게 된다. (「이녁이라는 말」) 이처럼 김효선 시인의 시편은 꿈을 통해 지배 권력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재현해내는 증언의 문학이고, 자기 인식을 통해 기억 속에 사랑하는 자들을 포기하는 ‘잘 보내기’ 시학이다.
-『문학과 사람』 2020 가을호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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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심(下心) 하심(下心) 신의 (오르팔) 오타인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샘 덕분에 많은 걸 얻어갑니다.
오른팔 수정했습니다.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