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
주기철목사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길 바랍니다. 어떤 이는 나에게 왜 괜한 일로 목숨을 거느냐고 말합니다. 또 다른이는 가족 생각은 않고 자기 의지만을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친구는 이제 적절히 타협하고 먼 훗날을 기약해서 한걸음 물러서자고 합니다.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 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의 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수제자 베르도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모른다고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열백 번 죽음은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죽이신 예수여! 나도 주님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리이다.
둘째,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주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형벌을 면하고 도리어 상을 준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 ?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 십자가! 오직 내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 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게는 팔십을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의무도 귀중하고 가장,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시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의 은혜, 더욱 간절합니다.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 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꼬!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달빛이 철장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한 주님께 나도 내 어머님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도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오나,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께서 지켜 주실 줄을 믿사옵나이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우상 때문에 정절을 잃어버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 피할 수가 있사오리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에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에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 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 주기철 목사 (1897~1944) -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웅천군 읍내면 백일리(現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 백일마을)에서 웅천군의 아전 출신인 아버지 주현성(朱炫聲)과 어머니 조재선(曺在善)[6]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주씨 집안은 머슴을 두고서 농사를 지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주기복(朱基福)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름을 주기철(朱基徹)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호는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의 의미의 '소양(蘇羊)'입니다. 유년기 때 교회에 다니게 된 주기철은 누구보다도 교회를 섬기면서 사랑했습니다. 웅천 개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학교로 유학을 떠난 주기철은 졸업 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5년 조선기독대학 상과에 2기로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안질이 심해져 학업을 그만두고 낙향하였습니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때 만세운동을 벌이다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했으며, 이듬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주님 가신 길’을 뒤따르기로 합니다. 192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주기철은 당시 지역별로 찢겨 있던 학교 분위기를 일신하고, 양산읍교회에서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이들 중에는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 가결을 선포한 홍택기가 있었습니다. 졸업 후,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담임하였습니다. 이후 아내와 사별했고, 오정모와 재혼하고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합니다. 초량교회 시절 그는 말씀에 입각해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정비하여 당회와 제직회를 확장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해 교육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손양원, 한상동 목사 등도 경남성경학교에서 그에게 성경을 배웠습니다. 주기철목사는 강단에서 철저히 복음을 고수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광복’보다 근본적인 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기철 목사가 조국의 광복에 무관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주목사는 3.1 운동에 동참해 옥고를 치렀습니다.
주기철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설교를 했습니다. 모든 조선인이 신사참배에 반대했지만, 교회는 더더욱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심해지는 일본의 탄압에 결국 기독교계도 하나씩 무릎을 꿇었습니다. 1936년에 카톨릭이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아예 교황이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고 허용한다는 교시를 발표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가 차례로 굴복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 9월 10일에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이미 일본의 회유에 굴복했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솔선해서 이행하겠다.'는 결의안을 발표합니다. 강대상 앞에는 경찰 간부들 수십 명이 긴 칼을 차고 앉아 있고, 양편 좌우에는 무장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경찰에 의해 바로 끌려나갔습니다.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이 통과되던 날, 주기철 목사님은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습니다. 일본이 아예 총회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8월말에 미리 손을 썼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에야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주기철 목사님은 여전히 설교때마다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뜨거운 설교와 믿음으로 인해 산정현교회는 나날이 였습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 목사님의 열정적인 설교는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고 회개하게 했으며 결단하게 했습니다. 주목사는 설교때, "우상 숭배자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떠나가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일제는 주 목사님을 다시 구속합니다. 끝까지 목사님과 산정현 교회를 굴복시킬 수 없었던 일제는 최후의 카드를 들고 나옵니다. 바로 '목사직 파면'이었습니다. 목사직 파면은 교회의 상위 기관인 노회(총회보다 한 단계 아래. 당시 산정현 교회는 평양노회 소속)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1939년 12월 19일 일제는 또다시 친일 목사들을 앞세워 임시 노회를 연 뒤, 주기철 목사직 파면건을 심의에 올렸습니다. 단 1명이 반대하고 (역시 바로 경찰에게 끌려나갔지요) 3-4명이 찬성하고 (친일 목사들) 50여명은 침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회장은 주기철 목사님의 파면을 선고합니다. 이 일이 꽤 유명한 사건이어서 일반 신문에까지 실릴 정도였습니다 담임목사가 파면되면 노회에서 교회에 임시 목사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강직한 산정현교회 사람들은 임시로 온 목사를 인정하지 않고,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회는 또다시 경찰의 도움을 받아 교인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그리고 사택에 살던 주기철 목사님의 가족을 내쫓았습니다. "이 사택은 하나님이 주 목사에게 주신 곳이니 주 목사가 와서 같이 나가자고 하기 전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저항하던 주 목사님의 어머니는 경찰에게 들려 대문 밖에 내팽개쳐졌고, 오정모 사모님도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일제는 감옥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 절개를 꺾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매질을 했습니다. 가장 잔인했던 것은 가족을 불러다놓고 그 앞에서 공중에 매달아 놓고 매를 쳐서 그네처럼 왔다갔다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드님의 증언에 따르면 주 목사님은 20회가 되기 전에 기절했고, 주 목사님의 모친은 그 전에 기절했으며, 사모님은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오, 주님'하면서 기도만 하셨다고 합니다.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활로 인해 몹시 쇠약해진 주기철 목사님이 간수의 등에 업혀서 면회실로 와 마지막으로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어습니다. 사모님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절대 살아서는 이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소. 내 오래지 않아 주님 나라에 갈거요. 거기서 교회와 조선을 위해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 교를 구해주기 바랄 뿐이요..." 그리고 주목사님은 다시 간수 등에 업혀서 면회실에서 나갈 때,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것을 예견한 사모님께서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씀이 없으세요?"고 했더니 주목사님께서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싶은데..."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밤 9시 경, 목사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고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신사참배의 강요도 없고 친일하는 무리들도 없는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주목사님의 나이 47세였습니다.
- 주기철목사와 오정모 사모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디모데후서 4장 7~8절 -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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