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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조선왕조 실록(103편)
무대포 정신.
무대포라는 말을 한번쯤 쓰거나 들어봤던 기억, 다들 있으실 것이다.
그리고 막무가내’‘앞뒤 분간 없이’라는 뜻의 이 무대포라는 말이 실상은 일본말이란 것도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원래 무대포란 말은 없을
무에 철포(일본말로는‘뎃뽀’우리나라에선 조총)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무대포란 말이 실질적으로 쓰이게 된 계기는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전국통일의 마침표가 되어준 나가시노 전투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독자제위들의 기억 속에는 ‘가케무샤’란 영화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천하통일을 위해 최고의 군사력을 조련했던 다케다 신겐은 조총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기마대 앞에서는 힘을 못쓸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조총 봐봐.
그게 쏘면 쏜다고 다 맞나 안 그래 그리고 말야 그게 설사 맞는다 치자고, 그게 사정거리가 얼마나 되겠어.
유효 살상 거리가 길어 봐야 100미터야. 확실히 맞힐려면 50미터는 되야 한단 말야.
그럼 뭐야 한번 쏘고 나면 그 다음은 걍 말에 밟혀 죽는게 다라니까.
이리하여 다케다 신겐은 풍림화산 이란 부대를 조직하게 되는데,풍과 화는 기마대로 전선을 휩쓸고,
림은 보병대로 기병대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남아있는 잔적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산은 다케다 신겐의 본대였던 것인데,
문제는 다케다 신겐이 천하통일의 꿈을 다 이루지도 못하고 죽으면서 일이 묘하게 꼬였던 것이다.
야야.잘 들어, 괜히 나 죽고 나서 깝치지 말고…앞으로 3년간은 내가 죽었단 말…절대 꺼내지 마 알았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란 말야,
이시키들아 이러면서 다케다 신겐은 죽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나서.신겐의 아들인 다케다 가쓰요리와 오다 노부나가가 맞붙게 된게 나가시노 전투였다.
풍림화산을 믿고 돌진하는 신겐의 기마대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대 였으니.
야야, 한발씩 쏘고 재장전 하다가는 택도 없어. 있는 대로 철포를 다 모아서 삼선사격을 하는 거야!
첫줄 놈 쏘고 나면 뒤로 빠져서 재장전 하고, 둘째 줄이 쏙, 둘째 줄 빠질 때 셋째 줄, 셋째 줄 쏘고 나면.다시 첫 번 쏜 놈들이 다시 쏘고.
이렇게 가면 아무리 기마대라도 박살날거야!
오다 노부나가는 이런 생각으로 3천정의 조총을 끌어 모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승을 하게 된다.
이런 오다 노부나가도 혼노사의 변으로 유명을 달리하고.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던 것이다.
요대목에서 혼노사의변 이란?
혼노지의 변(本能寺의 變)은 1582년 6월 21일(음력 6월 2일), 일본 센고쿠 시대를 뒤흔든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정변입니다.
일본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최고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가 심복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아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입니다.
당시 노부나가는 주고쿠 지방의 모리 가문을 정벌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원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교토의 사찰 혼노지 (本能寺) 에 머물렀는데, 군대를 동행하지 않고 불과 수십 명의 시종과 호위 무사만 거느린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출진했던 아케치 미쓰히데는 진군 방향을 돌려 교토로 향했습니다.
이때 미쓰히데가 군사들에게 외쳤다고 전해지는 말인 적은 혼노지에 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만 명이 넘는 아케치 군대에 완전히 포위된 노부나가는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적에게 목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처소에 불을 지른 뒤 자결(할복)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왜 배신했을까? (미스터리)
미쓰히데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정설이 없으며, 일본 역사학계의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원한설 (원망설): 노부나가가 평소 미쓰히데를 심하게 모욕하고 질책했으며, 공들여 얻은 영지를 몰수하고 새로 정벌할 땅을 주겠다는 등 부당하게 대우해 이에 앙심을 품었다는 설입니다.
야심설: 노부나가를 제거하고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 되려 했다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가설입니다.
흑막설 (배후설): 미쓰히데 단독 범행이 아니라, 노부나가의 급진적인 개혁과 권력 독점에 위기감을 느낀
조정(천황가),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혹은 예수회(기독교계) 등이 뒤에서 미쓰히데를 조종했거나 결탁했다는 설입니다.
야사(野史) 속 비극
미쓰히데가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으나, 노부나가가 약속을 깨고 적장을 처형하는 바람에 인질이던 미쓰히데의 어머니가 죽임을 당해 복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삼일천하 (사흘천하)
거사에 성공한 미쓰히데는 새로운 권력자가 되는 듯했으나, 민심과 다른 다이묘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상
모리 가문과 대치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주군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기적적인 속도로 군대를 돌려(주고쿠 대회군) 미쓰히데를 격파(야마자키 전투)했습니다.
이 공로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뒤를 잇는 천하인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전국시대의 판도 변화
노부나가가 다져놓은 천하 통일의 기반을 히데요시가 고스란히 이어받아 마무리지었으며,
이는 훗날 임진왜란으로까지 이어지는 동아시아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되돌아가서리
일본이노 살길은 조선정벌 밖에 없으므니다!
조선놈이노 무대포 이므니다! 나가시노에서 처럼 개박살을 내면 되므니다!
이리하여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전하! 왜놈들이! 왜놈들이!
워~워~ 진정하라니까, 왜 그래? 왜놈들이 또 노략질 이라도 했대.
그.그것이 왜놈들이 동래성과 부산성을 함락하고는.도성으로 쳐들어 오고 있답니다!
뭐.뭐야 이런 젠장찌게 같으니라고.
동래성부사는 뭐하고 앉아있었대
이것들 또 근무 안서고 농땡이 친 거 아냐.
그.그것이 왜놈들이 조총을 쏘면서 덤벼드는 통에. 항전은 했었지만, 신무기에 밀려서리.
이것들을 그냥.어이 사돈! 사돈이 힘 좀 쓰지 그래.
선조의 사돈, 바로 신립장군 이었다.
이 당시 신립은 꽤 빵빵한 가문내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의 장인이 임진왜란 당시 총사령관 이었던 권율 이었고.그의 동서가 바로 이항복 이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 였으니, 병권에 있어서는 끗발 날리는 일가였었던 것이다.
그까이거 뭐 제가 이탕개의 난 때 오랑캐 놈들 밀어낸 것 처럼 확 쓸어버리겠슴다.
요대목에서 이탕개의난이란?
이탕개의 난 은 조선 선조 시기인 1583년(선조 16년), 함경도 종성 지역의 야인(여진족) 추장인 이탕개가 무리를 이끌고 조선의 국경 지대를 대규모로 침략한 사건입니다.
조선 중기 북방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여진족 침입 사건 중 하나로, 당시 조선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국방 정책과 인물 등용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당시 만주 일대의 여진족들은 부족 간의 통합과 갈등을 겪으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번호(藩胡, 조선에 복속하여 살던 여진족)와 야인들의 결속이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함경도 지역을 다스리던 조선 관리들의 가혹한 다스림과 여진족 추장들에 대한 차별,
무리한 공물 요구 등이 누적되면서 여진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종성 부근에 살던 여진족 추장 이탕개는 이러한 불만을 품은 여러 부족(울지내 등)을 규합하여 조선을 향한 대규모 보복 공격을 계획했습니다.
1583년 1월 이탕개는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경원, 아산(阿山) 등의 요새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조선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경원부가 함락되고, 조산보(造山堡) 등이 포위되는 등 북방 6진 일대가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함경북도병사(咸鏡北道兵使) 이제신이 방어에 나섰으나 수적 열세와 준비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선조와 조정은 신립을 우방어사로, 이일을 함경북도병사로 임명하여 정예 대군과 함께 북방으로 급파했습니다.
신립과 이일 등은 뛰어난 기마 전술과 철저한 반격을 통해 이탕개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습니다.
특히 신립은 훈융진(訓戎鎭) 전투 등에서 여진족을 크게 물리치며 북방을 안정시켰고, 여진족의 본거지를 역공격하여 그들의 세력을 위축시켰습니다.
이탕개의 난은 단순한 변방의 소요 사태를 넘어, 9년 뒤에 터질 임진왜란(1592년) 당시 조선의 핵심 무장들이 대거 활약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신립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며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고, 이일 역시 북방의 명장으로 입지를 다졌습니다.
또한, 훗날 임진왜란 때 활약하는 신각(申恪) 등도 이 시기 공을 세웠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북방(동구비보, 녹둔도 등)에서 근무하며 여진족을 격퇴한 경험이 있으나,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를 잡고 훗날 백의종군하게 된 사건은 1587년 녹둔도 사건으로, 이탕개의 난(1583년)과는 시기와 배경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북방 여진족의 위협이라는 큰 흐름 속에 함께 있는 사건들입니다.
조선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북방 방어 체제를 재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안보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승리로 인해 조선 조정이 여진족의 기마 전술에는 익숙해졌으나, 훗날 왜군이 들여온 '조총'이라는 신무기와 보병 전술에는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되돌아가서리 ^^
그래, 그래 역시 사돈 밖에 없다니까.사돈만 믿을게, 내가 삼도도순변사.자리 줄테니까,
가서 저 문어 대가리 놈들 확 밀어버려 알았지.
이리하여 보무도 당당히 군대를 이끌고 왜놈들이 설치고 있는 남쪽땅으로 내려가려 하였으나,
웬걸.군사가 모여야지 먼저 출발한 이일은 데리고 갈 군사 300명이 없어서 쩔쩔매다가 가서 해결한다고 먼저 출발한 걸 보면,
이 당시의 제승방략(원래 조선초기 군사제도는 진관체제라 하여 각고을의 수령이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직접 방어에 나섰으나,
병력수가 줄어들자 유사시 각 고을의 수령은 병력을 모아 놓으면 서울에서 지휘관이 내려와 이 병력을 훈련시켜서 전투를 벌이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것이 제승방략제도였다)
제도가 얼마나 허망한 제도였는지를 보여주게 된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립은 이리저리 군사를 모아 8천명의 기병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
신립장군, 거시기 내려가면 왜놈들의 조총을 조심하시오.
그게 장난 아니라드만.조총이 뭐 쏘면 쏘는 족족 맞는답니까.
류성룡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은 신립…신립의 무대포 정신은 왜놈들을 막아설수 있을까
초특급 대하 울트라 역사사극 ‘무대포 정신?’은 다음회로
엽기 조선왕조 실록(104편)
무대포 정신.
부랴부랴 8천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남하한 신립장군에게 조정에서는
연일 작전명령을 보내오는데,어이 괜히 설치지 말고,
조령에서 둔치고 앉았다고 올라오는 왜놈들 쓸어버려.응 알았지.내가 노파심에서 말하는 건데,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조령만 틀어 막어라 알았지.
이런 조정의 생각을 왜놈들도 알았는지, 연일 정찰대와 수색대를 보내 조령을 수색정찰하게 되는데,
조선놈이노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조령을 버리지 않을것 이므니다!
분명 매복하고 있을 거므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조령에 매복한 조선군 이나 찾아야 하므니다!
그러나, 조선군은 조령에 없었으니
이거 클났는데, 위에다간 큰소리 치고 왔는데…당췌 방법이 없으니.
그랬다. 이 당시 신립장군은 몇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으니,이일 이자식이 상주에서 패해버렸으니.방법이 없잖아.
이때 왜군은 1군과 2군으로 나눠서 서울로 치고 올라오고 있는 상황. 상주에서 이일이 막아주면.이때 신립이 왜군을 박살내고, 이일과 연합해 나머지 왜군도 쓸어버린다.생각 이었으나,이일이 패해버리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자 장군 클났슴다. 탈영병이 점점 늘어나는데요.뭐야 이눔 자식들 나라가 지금 망하기 바로 직전인데.급하게 모아 놓은 병사들이니 훈련은커녕 군복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상황.
책든 선비들까지 차출한 상황이니 사기가 있을 턱이 있을까.
이 상황에서 조령 고개에 들어가 매복했다간.아마 얼씨구나 하고 탈영할 겁니다.
평지에 있어도 탈영병이 속출하는데, 깊숙한 산골짜기라면 병력통제가 안될 겁니다.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신립은 결국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인생 뭐 있겠어 한방이지 뭐. 이렇게 찔끔찔끔 병력 잃고 있다간 나중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겨 날거야.
제대로 맞짱 한번 뜨고,이기면 좋은 거고. 지면 뭐.다같이 사이좋게 해피투게더 하면서 물에 빠져 죽으면 되지 뭐.그랬다. 신립은 로또 전투를 택했던 것이었다.
자 장군, 병력수는 쪽바리 놈들이 훨씬 많은데 평지에서 일대일로 맞붙었다간 쪽수에 밀립니다.그리고, 쪽바리 놈들이 들고 있는 조총 때문에 기병전투는.
인생 한방이잖아. 괜히 쫄거 없어. 기병으로 밀어 붙히면 돼.그리고 기병 전투는 산에서 보다는 평지에서 싸우는게 훨씬 유리해! 너 한니발의 칸네 전투도 못봤냐.
로마인 이야기 안봤어.아니 그래도 장군.가능성 있는 한방으로 가시죠 로또전투는 거의 813만분의 1의 확률인데 일단 셔터 마우스 해줘라.
네 이야기 듣자니 막 짜증이 날라 그런다.이리하여 신립은 다닥다닥 끌어 모은 8천 병력을 탄금대에 집결시키는데,인생 한방이다!
기병으로 밀어 붙히면 쪽바리 놈들도 쫄거야! 자 힘내서 돌격하자!
이 모습을 지켜보는 일본군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조선군을 바라보는데, 조선군이나 개념을 완전 물 말아먹었 스므니다.
조총 앞에서 기병전이라니…
더구나 여기는 습지가 아니므니까.
완전 무데뽀이므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군은 방패라도 들었는데, 조선군이노.아예 개념이 없스므니다.뭐하고 있스므니까! 조총대 준비시켜야 하므니다!
그랬다. 기병의 힘은 스피드에서 나오는 충격력인데.이 당시 탄금대 전장은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였었던 것이다.
논밭과 같이 붙어있는 이 질척거리는 땅에서 기병이 무슨 힘을 발휘할까.
신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격 명령을 내리는데,무조건 돌격! 못먹어도 고!
가서 저 문어대가리 놈들을 쓸어.
신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선 기병대들은 돌격을 하였고, 그대로 조총의 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놈이노 완전 또라이므니다!
계속 장전해서 쏴버리므니다!
완전 나가시노 전투의 재판이지 않스므니까.
조선군이나 진짜 무데뽀 이므니다.
신립의 8천 기병은 그렇게 탄금대 에서 녹아내렸던 것이다.
임진왜란 최초의 제대로 된 데스매치에서 신립은 어이없게도 나가시노 전투를 리메이크 하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무대포 정신으로의 돌격이었던 것이다.훗날,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3백년이 지나고 나서 경술국치의 치욕을 경험해야 했던 조선은 그 이후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이 무데뽀’라는 말을 다시 접하게 된다.
일본인 들이 개념 없고 막무가내로 밀어 붙히는 모습을 말할 때 마다 ‘무데뽀’라 말하는 것을 보고우리 민족도 자연스럽게 ‘무대포’란 말을 쓰게 되었던 사연.
이제 독립을 한지도 어언 60년 한갑자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무대포’란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지배의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가슴아픈 사연이므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