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는 진화중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로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시집 『태아의 잠』, 1991)
[작품해설]
이 시는 도시 문명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바퀴벌레’를 통한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 문제에 대해 문학적인 경고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바퀴벌레’를 등장시켜 인간 문명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발상의 특이성이 발견된다. 또한 ‘바퀴벌레’는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대상인데다 일반적으로 시에는 등장하지 않는 소재라는 점에서도 이 시는 매우 특이하 발상을 보여 주고 있다.
시인은 현실의 작은 대상에서도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것을 거대한 문명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은 시인의 상상력을 적확(的確)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시인의 눈에 비친 ‘바퀴벌레’는 대단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살충제’와 ‘시멘트’로 뒤덮인 생존 조건에서도 비대한 몸뚱이와 엄청난 소화력, 그리고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경이로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빙하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퀴벌레’가 생명력을 이어 오기 시작한 그 때를 상상한다. 그리고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환경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시선을 확장한다. 따라서 ‘철판을 온몸에 두르’고 ‘철판을 소화시키고’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는 ‘신형 바퀴벌레’는 환경을 파괴라는 현대 문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현재의 환경 파괴에 대한 심각한 경종의 메시지를 ‘바퀴벌레’를 통해 던져 주고 있는 작품이라고하겠다.
시인은 ‘바퀴벌레’의 생존을 통해 인간 문명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그리고 각종 환경오염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로운 벌레’의 탄생 예고로써 독자들에게 경계시키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 문명의 황폐함과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을 이 시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시인은 주된 시적 대상인 ‘바퀴벌레’의 삶을 구체적이고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직접 부딪치는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환경 문제는 현대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인간 문명의 황폐함에 대한 고발과 비판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작품에 형상화된 세계는 ‘시멘트’와 ‘살충제’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은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 문제로 인하여 오염된 세상의 모습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3연에서 ‘수억톤의 중금속 폐기물’ · ‘암회색 스모그’ · ‘폐수’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이렇듯 시인은 반어적 수법을 이용하여 현재의 환경이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음을 고발한다.
[작가소개]
김기택(金基澤)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문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 「가뭄」이 당선되어 등단
1995년 제1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2000년 제45회 현재문학상 수상
시집 : 『태아의 잠』(1991), 『바늘구멍 속의 태풍』(1994), 『사무원』(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