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생몽사
며칠 전 어버이 날에 선물로 무엇이 좋겠냐고 딸이 물었다. 음, 글쎄, 딱히 원하는 것이 없다고 했더니,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물은 것이 아니라 엄마 선물로 뭐가 좋겠느냐는 말이었다고 했다. 쩝.
사실 나는 기념일이나 선물에 워낙 무심해서 아내나 가족에게 따로 선물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정 필요한 것은 자기가 진작에 장만 했을 것이어서 굳이 남이 선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게다가 장년이 지난 나이가 되면 필요한 것은 대개 다 있게 마련이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말하길 나처럼 살면 소비가 부진해진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왜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남자에게 필요한 물건이 무엇일까? 집에 들어가서 주위를 살펴보면 남자 물건은 거의 없다. 있어 보았자 세면도구, 자기 옷과 그리고 전자 기구가 다다. 나는 옷 몇벌과 노트북 컴퓨터 하나 들고 나오면 한두 주를 밖에서 지내도 침대 말고는 아쉬울 물건이 별로 없다.
남자들은 대개 단순해서 물건 욕심이 많지 않다. 그런 만큼 도리어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최고를 찾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아버님은 물건에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셨지만 딱 두가지는 아주 좋은 걸 쓰셨다. 손목시계로 오메가 시계를 평생 하나를 갖고 쓰셨고, 만년필은 몽블랑을 쓰셨다. 처음엔 파카 만년필과 파카 잉크를 쓰시더니 나중엔 둘 다 몽블랑으로 바꾸셨다. 어릴 때는 그것이 이상했는데 나중에 내가 나이가 들면서 아버님이 그 펜으로 수천 장이 넘는 원고를 쓰시는 걸 보면서 만년필로 사치 하시는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나 역시 물건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버님 보다는 신경을 쓰는 편이다. 특히 내 신체의 편안함에 큰 영향을 주는 물건에는 까다롭다. 피부에 닿는 옷은 소매 있는 면 속옷만 입고 셔츠 역시 면이나 린넨 셔츠만 입는다. 컴퓨터 키보드 역시 비싼 키보드를 굳이 따로 사서 썼다.
셔츠는 이제 딱 한 브랜드를 정해 놓고 외국에 갈 때 한꺼번에 여러 장을 사놓고 두고두고 입는다. 수입품을 쓰는 이유는 한국에서 내 몸과 마음에 맞는 셔츠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두 역시 까다로운 편인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국산을 신는다. 내 생각에 한국은 경제 수준에 비해 셔츠나 구두에 고급품이 별로 없다. 젊은 세대는 이런 이유로 수입품을 많이 찾는다. 일본이나 한국 모두 패션과 기호품에서 유럽에 대해 무역 수지가 적자다.
이런 것에 비교적 돈을 쓰던 나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소비를 안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고 한국 경제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일본이 장기 소비 침체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인구 노령화 때문이다. 장년층과 노년층은 필요한 것을 이미 다 갖추었으니 식료품 외에는 돈 주고 살 일이 점점 없어진다. 노후준비를 신경 써야 하는데 노인연금제도는 워낙 허술해서 개인이 각자 저축을 늘려 대비해야 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해야 가계에 좀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즉 50세에서 60세 사이에 은퇴를 대비해 저축을 얼마나 하느냐가 노후 준비를 결정한다. 그것마저 없으면 유일한 희망은 갖고 있는 주택 값이 오르는 것이었는데 일본에선 그게 무너졌다. 30년에 걸린 일본의 장기침체는 이렇게 부실한 연금제도, 붕괴된 부동산 시장, 급격한 노령화가 중첩되면서 발생했다.
한국 역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일본 보다 더 빠르게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연금제도는 일본보다 더 부족하다. 고령 인구(65세 이상)는 지금 약 800만 명인데 4년 뒤인 2025년에 1000만 명을 넘게 되고 2036년엔 1500만 명을 넘는다. 고령 인구 구성비는 2025년에 20%를 넘고, 2035년에는 30%를 초과한다. 2025년에는 5명당 1명, 2035년에는 3명당 1명이 노령 인구라는 뜻이다. 일본의 장기침체, 분명히 한국에도 닥칠 것이다.
거기에 은퇴를 앞둔 장년층은 과중한 부채까지 지고 있다. 부동산 값이 유지되는 것이 이들에겐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도 거기에 취하진 말자. 경제학 입장에서 볼 때 부동산에 의한 부(wealth)는 진정한 부가 아니다. 부란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데 땅이나 건물은 그 자체가 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비싸진 땅과 주택은 나중에 누가 돈을 주고 살까? 정확한 시기만 모를 뿐 부동산 가격의 장기적 하락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정리하면, 토지와 주택 가격이 유지가 되든 안되든 한국에서 소비는 노령화 때문에 더욱 더 쪼그라들 것이다. 내가 소비를 하지 않는 데에는 나 개인적인 성벽도 있지만 인구학적 영향도 작용하고 있다. 나 못지 않게 소비를 줄일 사람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 내려오는 도중에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내려 올 것인가다. 여러분은 준비가 되었겠지?
구조적 변환을 대비하지 않고 허송세월로 보낸 지난 20년이 그래서 더욱 아쉽다. 실패한 정권의 대열에 하나 더, 문재인 정부를 얹는 것이 속쓰린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녕 취생몽사 할 수 밖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