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지막 일을 행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입니다.
본문을 잘 따라가시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면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몰고 오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천국에 가고,
불신자들은 지옥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우린 그동안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곧 바로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고,
사단은 결박을 당하고 일천 년 동안 무저갱에 인봉이 되어서 가두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한 자들과,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그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천 년이 차면 사단을 잠시 풀어 줘서 성도들과 싸우려 하다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소멸시키고 난 후 영원한 불 못에 집어넣습니다.
즉 재림하신 후 천 년 동안 있다가 그 후에 영원히 갈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천 년을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그동안 배워 왔던 것과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이 있고.
그 후에 백보좌 심판을 거쳐서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영생으로 나라로 나아가고, 다른 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고서 영벌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천 년 후에 사단이 잠시 놓인다는 말은 천년왕국이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천년왕국이 영원한 천국이라고 한다면 천 년 후에 사단이 잠시 놓여서 성도들과 싸움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 왔던 것으로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 천국에 가서 천 년 동안 살다가 천 년 후에 다시 사단과 전쟁을 하고 다시 천국에서 산다는 뜻인데 이건 아무리 보아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동안 예수님이 재림하면 끝이라고 배워왔을까요?
이는 성경을 창세전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편적으로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리고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창세전 언약이 그려내는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 듣고 난 후에 그동안 그려온 그림과 오늘 들은 창세전 언약적 관점에서 그린 그림과 비교해 보세요.
어느 그림이 더 성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명쾌하게 구분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이 그림을 그려 보세요.
오늘 그린 그림이 틀렸다 싶으면 옛날 그림을 그대로 소유하시고,
만약에 오늘 그린 그림이 맞고 옛날 그림이 틀렸다 싶으면,
이제부터 오늘 그려진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의 천년왕국관으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오늘 말씀을 다 듣고 나시면 성경 전체 그림이 새롭게 그려지실 것입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리고자 하신 그림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엄청난 공부를 할 것이니까 좀 길더라도 인내하면서 잘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다양한 천년왕국에 대한 학설들
천년왕국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해하는 폭이 다르므로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크게 네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네 가지 학설 모두가 자기 나름의 성경적 근거를 들고 있어요.
모두가 성경적 근거를 들고 있는데 아전인수식으로 억지 해석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일관성이 없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것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따를 수가 없어요.
저는 어느 학설을 주장하지 않아요.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학설들 속에서도 취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합적인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첫째, 무(無) 천년주의입니다.
무(無)란? 없다는 뜻입니다.
무천년주의이니까, 이는 천년왕국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천년왕국을 영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학설입니다.
무천년주의 학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천국왕국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현재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천년왕국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천년주의는 영적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므로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신약시대 전체가 천년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것만 있지 않고 육적인 것도 있어요.
구원의 궁극은 몸의 구속까지에요.
영이 누리는 영적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과 육이 누리는 실재 천국도 있어요.
성경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으므로 무천년주의처럼 영 따로 육 따로 구원을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만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영과 육 모두 다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는 영적인 구원을 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육적인 구원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몰고 다니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에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실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십니다.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는 영적 천국이지만 재림부터 천년왕국까지는 실재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영육간의 구원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천년설의 오류는 오늘 본문을 보면 그대로 드러납니다.
본문 1-6절을 보세요.
계 20:1-6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본문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림이 아니고 재림이에요.
그러므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을 신약의 전 기간이라는 식으로의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어서 인봉을 해서 미혹하지 못하게 해 놓고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하잖아요.
무천년주의에서는 마귀가 미혹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의 권세를 깨트렸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미혹한다고 합니다.
마치 목줄을 한 개가 말뚝에 매여서 그 주변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마귀의 활동이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초림 시에는 은혜로운 차원에서 그리 해석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가 다 되어가는 이 시대는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어요.
지금은 모든 것이 실재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본문 그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마귀가 제한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활동할 수 없도록 무저갱에 가두어 버려요.
마귀도 하나님의 허락으로 움직이는 놈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무저갱에 가두어 두었는데 나와서 활동을 한단 말입니까?
그럴 순 없어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데 천년왕국에서는 사단의 활동이 없어요.
무저갱에 집어넣어서 인봉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천년왕국에서 실재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영적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 보시면 두 부류의 성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의 영혼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이전까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둘째,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서 영접하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모든 성도들이 살아서 예수님과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변화된 몸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죽은 자는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고,
산 자는 변화된 몸으로 살아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크마 주석을 보면 잘 주석해 놓았어요.
그대로 인용합니다.
'살아서'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제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육체적인 부활을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로서 (1:18; 2:8; 13:14; 마 9:18; 요 11:25; 행 1:3; 9:41; 롬 14:9)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한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납니다.
영적이 아니고 실재로 살아나요.
왜 살아나느냐 하면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봅시다.
살전 4:13-18절.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바울이 주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전하니까,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이 비아냥거리면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은 역사 속에서 확실하게 일어날 사건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는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오세요.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천국에서 안식하고 있는 성도들을 말해요.
이를 히브리서 12장에서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요한계시록 6장에서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원수를 빨리 갚아 달라고 신원하는 영혼들이라고 합니다.
계 6:9-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일찍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큰 소리로 자신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입혀주시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이 때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공중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4-5절과 똑같은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천년왕국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주어진 영적인 것이다 라고 하는 무천년주의 학설은 온전한 해석이 될 수가 없고 틀린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천년왕국은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림에서 재림까지 모두를 영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영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을 하셨는데도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틀린 것이 되어요.
그러므로 무천년주의 학설은 과거적 해석으로 보면 이해는 할 수 있어도, 현재적 해석으로 보면 틀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후(後) 천년주의 입니다.
후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이 지나고 난 후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 시대가 열렸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도를 전하자 하루에 수천 명씩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자와 부자가 차별이 없고,
종이나 상전이 차별이 사라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차별이 사라집니다.
신분의 벽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하나님 말씀이 흥왕하여 믿는 무리들이 많이 일어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면서 세상이 점점 더 좋아져서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땅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 당시의 모습이 그러했으니까요.
그래서 성도들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면서 살다가 천 년이 차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성도들을 영원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학설은 초대교회에는 많은 지지를 받았어요.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이 환상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후천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죽은 학설이 되고 말았어요.
천년왕국이 되려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 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속에는 원수의 심판과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 동시적으로 담겨 있어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방문하실 때는 항상 죄악이 관영 할 때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흑암이 깊음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흑암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종말의 모습과 같아요.
이것이 노아 시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노아 시대를 일컬어 죄악이 관영한 때라고 합니다.
이건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과 같아요.
이때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를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심판을 단행하셨어요.
예수님의 초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약 교회의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구약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 교회를 심판하시고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약 교회 속에서 12 제자를 불러내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교회처럼 타락합니다.
이 시대는 교회마다 교인들마다 세속적 가치로 엄몰이 되어서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어요.
이걸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부와 사치로 연락하는 땅의 음녀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백성아 그들의 죄에 참예치 말고 거기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큰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모든 종교 사상을 다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음녀를 일컬어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WCC를 옹호하는 목사들은 교회에서 모든 종교는 그 근본은 같으니까 타 종교를 배타하지 말고 대승적 차원에서 포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종교 통합을 외치고 있어요.
뱀의 말을 강같이 토하여내고 있어요.
쑥물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 강도의 굴혈이 된 구약 교회를 멸망시키고 12 제자들을 불러내셨듯이,
종말에도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신약의 타락한 교회인 음녀를 멸망시키고 그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후 천년설은 틀린 학설인 것입니다.
심정적으로는 이해를 하지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으므로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전(前)천년주의입니다.
전천년주의는 후천년주의와 반대 학설입니다.
후천년주의는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학설이지만,
전천년주의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학설입니다.
무천년주의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영적으로 보았지만,
전천년주의는 요한계시록을 장차 역사 속에서 일어날 실제적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도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실제로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인 학설이지만 미흡한 부분이 많아서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전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을 실제적으로 보지만 많은 부분을 온전하게 해석하지 못하니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 년 후에 사단이 풀려나 미혹을 한다는 것과,
곡과 마곡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나,
천년왕국에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이나,
백보좌 심판 후에는 어디로 가는지, 등등,, 명쾌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전천년주의에서도 두 가지 학설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기 전천년주의’와,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로 나누어집니다.
둘 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야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에는 동일해요.
역사기 전천년주의의 미흡한 부분을 해소하고자 나온 것이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너무도 큰 모순을 낳고 있어요.
비성경적인 것이 너무 많아요.
그럼 세대주의의 잘못된 부분을 살펴봅시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을 두 번으로 봄
가장 큰 것이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구원입니다.
역사기 전천년주의는 예수님의 재림을 단회적으로 보는데,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예수님의 재림을 두 번으로 보고 있어요.
또한 구원도 역사기 전천년주의는 이방인과 유대인 구원을 구분하지 않는데,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에서는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을 구분함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을 나누어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두 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7년 대 환란 전에 예수님이 공중으로 재림을 하여서 이방인 성도들을 휴거시키고 난 후 이 땅에 유대인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공중으로 재림을 하시면 이방인 교회들은 공중에서 혼인 잔치를 하고,
이 땅에서는 7년 동안 유대인들의 각 지파 중에서 남은 자들인 12000명씩 인을 치는데 도합 144000명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여서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유대인 말씀과 이방인 말씀이 있다고 함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는 요한계시록 2-3장까지는 이방인 교회에 주신 말씀이고,
4장 이후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방인 성도들은 2장 3장 아시아의 일곱 교회 시대를 끝으로 공중으로 올라갔다고 보기 때문에 7장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인치는 것을 육적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이론으로 본다면 요한계시록 4장 이후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4장 이후는 유대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 세대주의 전천년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은 666표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모순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라면 이방인 교회는 4장 이전에 이미 다 휴거하고 없어요.
4장 이후는 이방인은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장에 나오는 666표는 받지 말라고 합니다.
4장 이후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면서 왜 이방인들이 난리입니까?
한국 교회는 이방인 교회에요.
그럼 666에 대하여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도 받으면 큰일 나니까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자기모순이에요.
말이 맞지 않아요.
성경은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을 구분하지 않아요.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도 두 번으로 말하지도 않아요.
세대주의자들이 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하면 성경을 각 세대 별로 나누어서 보기 때문입니다.
넷째. 인류 역사를 일곱 세대로 구분함
세대주의는 인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서 보고 있어요.
1 세대를 에덴동산의 ‘무죄시대’ 라고 하고,
2 세대를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노아 시대까지를 ‘양심시대’ 라고 하고,
3 세대를 노아 홍수 후부터 아브라함까지 ‘인간통치시대’ 라고 하고,
4 세대를 아브라함부터 모세 시대까지 ‘언약시대’ 라고 하고,
5 세대를 모세부터 예수님까지 ‘율법시대’ 라고 하고,
6 세대를 예수님 이후부터 7년 환란 전까지를 ‘교회시대’ 라고 하고,
7 세대를 예수님 재림 후 ‘천년왕국시대’ 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다르게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시대가 다르니까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방법도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 시대는 양심으로 하고,
언약 시대는 언약으로 하고,
율법 시대는 율법으로 하고,
교회 시대는 믿음으로 한다고 합니다.
다섯째. 천년왕국 연기설을 주장하고 있음
세대주의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을 구원해서 천년왕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천년왕국이 연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 연기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갔는데,
이것이 신약의 이방인 교회 시대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방인의 때’라고 합니다.
이방인 구원이 끝이 나면 유대인 구원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7년 환란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는 7년 환란 전에 공중으로 휴거하고 난 후 유대인들은 7년 환란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죄값을 치르게 하고 회개케 하는 큰 환란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이 일어나는데,
이들이 바로 요한계시록 7장에서 말하는 각 지파에서 인 맞은 144000명이라는 것입니다.
7년 환란 후에 예수님이 지상으로 재림을 하면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들이 함께 천년왕국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학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기 학설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예수님도 두 번 재림하여야 하고, 천년왕국도 연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메시야가 왔는데 유대인들이 못 알아보고 실수로 죽여서 천년왕국이 연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보지 않고 문자적으로 보니까 이러한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모르니까 성경은 통으로 보지 않고 세대마다 토막 토막 잘라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안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에요.
둘이 연합해서 언약을 이루어가요.
옛 언약은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되어요.
그럼에도 세대주의에서는 새 언약 속에 옛 언약이 담겨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을 무우 토막 내듯이 각 세대별로 잘라서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이 따로 있다고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각각의 학설의 장단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각각의 학설마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학설에 매이지 마세요.
학설은 버리고 언약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세요.
그러면 성경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가 됩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大河) 드라마
피조물은 창조주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아요.
왜냐하면 창조주는 피조물을 통해서 창조주 자신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이 역사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히스토리라고 하지요.
히스토리(Hi story)란? 그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역사에 오셔서 하신 일이 있어요.
그래서 역사를 그 분(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는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하 드라마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 의하여 연출이 됩니다.
시나리오가 먼저이고 드라마가 나중인 것입니다.
드라마는 철저하게 시나리오에 의하여 그려지게 되어 있어요.
드라마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가 시작이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은 끝이 됩니다.
천년왕국은 역사의 끝에 관한 이야기에요.
결론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서론과 본론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진행이 되어 오다가 끝을 내게 되어 있어요.
끝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들의 저주받는 이야기를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 관한 이야기들이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중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입니다.
난해하다 보니까 다양한 학설들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학설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천년왕국이 실재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영적으로 이해하여야 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인가?
이 세상인가?
아니면, 이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있는가?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한다면 거기는 어디인가?
천 년이라는 기간도 의문인 것입니다.
실재 천 년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것인가?
궁금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재다.
아니다 영적이다.
묵시 문학적 표현이라는 등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냥 덮어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신 실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소설이나 동화처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듯이,
하나님이 존재하심도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노아 홍수도 사실이고,
애굽의 바로 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도 사실이고,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도 사실이고,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사실이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산 것도 사실입니다.
솔로몬이 가나안 땅에 성전을 지은 것도 사실이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도 사실이고,
해방되어 돌아와서 성전을 지은 것도 사실이고,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그리스도를 낳은 것도 사실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사실이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서 승천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도 사실이고,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사단을 잡아서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가두어두는 것도 사실이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도 사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까지는 사실이고,
예수님 재림 후는 영적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영적이면 다 영적이어야 하고,
사실이면 다 사실이어야 합니다.
어느 것은 영적이고,
어느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설령 영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실재 이야기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가 안 되면 다 영적이라는 말로 피해 갔어요.
우리의 지혜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암묵적으로 서로의 주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사실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를 영적이라고만 치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이 둔하여서 그렇게 말은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어린아이가 자라가면서 인생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경륜이 쌓여가면서 하나님의 일하심도 더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은 바가 될 것입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그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모든 성경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으로 깨닫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멸망을 받은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하신 일들은 모두가 사실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고,
바다 위를 걷고 풍랑을 잔잔케 한 것도 사실이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것도 사실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하실 일도 사실이어야 합니다.
초림으로 오셔서 하신 일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재림하신 후에 하시는 일도 사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도 당연히 사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다른 것은 다 실제로 이해하면서도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묵시 문학적 표현이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피해 갔습니다.
우리가 이해 되는 것만 사실로 믿고 이해 되지 않는 것은 전부 영적이라고 했어요.
특히 예수님이 재림 후에 주어지는 천년왕국을 동화속 이야기처럼 이해해 왔어요.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럼 천년왕국을 영적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실재 이야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실재로 믿지 않고 있어요.
이는 사단의 미혹입니다.
이 시대는 마귀가 성경을 인간들의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교훈 집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예수님의 재림 이야기를 동화처럼 만들어 놓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종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재로 자칭 한국에서 가장 큰 장자 교단이라고 하는 진보주의 성향의 교단에서는 이 세상 종말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멸망당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도,
아니야, 그건 영적인 이야기라고 하면서 이 세상은 멸망당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데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여서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편집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것임
먼저 천년왕국의 의미부터 살펴봅시다.
천년왕국이 어떤 성격을 담고 있는지를 보십시다.
본문 6절을 봅시다.
계 20: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을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이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는 성도들만 합니다.
불신자들은 천 년 후 둘째 부활 때 살아나게 되는데 이를 심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심판 후에 둘째 사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는 둘째 사망이 없어요.
신자들은 천년왕국이 끝나면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년왕국은 사망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한다는 것은 왕과 같은 영광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이기는 자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지는 곳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일하는 곳이 아니고 안식하는 곳이에요.
창조 7일 중에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이에요.
천지 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창조로 설명하고 있어요.
창조와 구원은 영적 의미로 같아요.
동의어에요.
창조 6일은 성도가 엿새 동안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창조의 일곱째 안식일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교회에서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는 자들이 천년왕국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누림은 미래의 누림을 미리 맛보기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재 누림이 없는 사람은 미래의 누림도 없어요.
성도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순서로 일하심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 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는 순서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미리 아심은 과거인 창세전이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은 현재인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영화롭게 되는 것은 장차인 천년왕국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화로움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천년왕국은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식의 세계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환란을 당한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심의 유업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엿새를 일한 자에게 일곱째 날의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들이 미래의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고난 속에서 이루어가지만 미래에는 영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봅니다.
살후 1:5-10절.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은 바울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어요.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전한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거짓말이라고 조롱을 했어요.
이에 바울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오시니까 너희가 예수를 믿다가 조롱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라고 합니다.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환란 당한 너희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아 주시고,
너희로 하여금 환란을 당하게 한 자들에게는 환란으로 갚아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으로 주어지는 천년왕국은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다가 고난당한 자들에게 위로와 보상으로 주어지는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유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을 봅시다.
사 57:1-2절.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이사야는 의인의 죽음을 평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를 침상에서 편히 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침상에서 잠 자는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잠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을 잔다고 하면 깨어남이 있겠지요.
언제 깨어납니까?
예수님의 재림 때 깨어납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여서 그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수고한 종들에게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이 뭔가요?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고 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하나님의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천년왕국 이야기는 소망과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왜 사실로 나타나야 하는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9장을 봅시다.
눅 19:11-27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므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일어날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유가 아니라 실재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를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들이 열심히 장사를 합니다.
어떤 종은 열 므나를 남기고,
어떤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은 주인의 말을 경시하고 장사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놀았어요.
귀인이 왕위를 받고서 돌아옵니다.
그러자 종들이 그동안 장사하여서 이문을 남긴 것을 내어놓습니다.
어떤 종은 열 므나를 남겼고,
어떤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러자 왕위를 받아온 주인이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라고 하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은 주인의 명을 어기고 한 므나로 장사하지 않고 수건에 싸 두었다가 주인 앞에 하나를 내어놓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이 놈은 내 원수로서 내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자라고 하면서 죽이라고 합니다.
왜 므나를 수건에 싸둔 것을 주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 원수라고 합니까?
이는 주인이 왕 위를 받아온다는 것을 농담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주인 아래서 종노릇하면서 주인을 보아 왔는데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우리의 왕은 가이사라고 하면서 우리는 저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치워달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종은 주인이 왕위를 받아온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 진보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 하셨다가 장차 재림 하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위를 받으러 가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만왕의 왕이라는 작위를 받고 오실 때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오시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실재적인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자기 종들이 행한대로 갚아주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열 고을 권세를 주고,
어떤 이에게는 다섯 고을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게으르고 악한 종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건 실재로 일어날 사건이에요.
영적인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눅 22:28-30절.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시험 중에 함께 한 자들이므로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나라를 맡기신 것과 같이 예수님이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겨서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고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실재로 일어날 이야기에요.
장차 주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적이라고 하지 말고 실재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은 실재적인 사건으로 보면서도,
종들이 열 고을을 다스리고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실재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보고 있어요.
같은 비유에서 어떤 부분은 실재적인 사건으로 보고,
어떤 부분은 영적으로 보는 것은 온당한 해석법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입맛에 맞도록 같은 비유를 가지고도 어떤 부분은 실재로 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짜집기식 해석을 해 왔어요.
왜 그러느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가 불가한 것은 모두 상징이나 영적으로 해석해 왔어요.
영적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면피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해요.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므나 비유가 예수님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영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하여 하신 말씀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은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여서 상징적으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요?
미래에 일어날 일은 우리가 믿지 못하니까 비유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언약은 때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계시를 열어주심
성경은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란 열어서 보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마치 논문의 서론과 본론과 결론처럼 점진적이고 심층적으로 진행이 되어 왔어요.
어제 보다 오늘이 더 열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열립니다.
그러므로 어제 모르던 것이 오늘은 알 수가 있어지고 오늘 모르는 것이 내일은 알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그동안 알고 있던 편견을 깨는 것이므로 엄청난 혼란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들을 뛰어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고 또한 생소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 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없이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내어놓습니다.
그만큼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영적으로만 해석해 오던 것을 실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라 생소하여서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서 이건 뭐냐? 라고 고개를 갸우뚱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저는 천년왕국이 실재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제가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인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천년왕국이 왜 역사 속에서 반드시 실재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듣고 나시면 아마 아멘으로 화답을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난해하여서 이해하지 못하고 궁금해 오던 것들을 모든 성경을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다가 보니까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 견해이니까 동의가 되면 받아들이시고,
동의가 되지 않으면 성경을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구나? 라고 가볍게 흘려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누가 나와 다른 학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 자체를 의심하여서는 안 됩니다.
서로 받은 은혜가 다를 수가 있으므로 견해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의 신앙을 비판하거나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건 우리가 할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주께 맡기시고 내가 안다는 것이 과연 성경이 그러한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판단을 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다 판단을 받을 자들이지 내가 누구를 정죄하고 심판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칼을 휘두르진 마시고 칼은 칼집에 잠시 넣어 두시고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통일된 것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모든 성경이 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의 백성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하나의 소리로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칼빈이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은 것은 천년왕국을 해석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해석하기가 어렵고 난해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여러 가지 학설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에 따라서 배운 신학적인 교리가 다르고 서로가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목사님들마다 다양한 학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법
요한계시록 해석이 어려운 것은 장차 될 일을 상징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요한계시록의 성격을 봅시다.
요한계시록의 성격을 알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과 22장을 봅시다.
계 1:1-3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9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 22:6-7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자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은 예수그리스의 계시다!
그리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고 들었어요.
즉 예수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하실 일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사실이라고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못을 박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일하시러 오신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장차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천국을 이루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장차 될 일이고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결론을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모두가 사실인 ‘결코 속히 될 일’이라고 마감을 하십니다.
예언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도 있지만 장차 일어날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읽고 듣고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각 장 마다 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세전에 하신 언약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완성이 되는지를 사도 요한에게 다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은 이 사실을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주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들을 편지로 세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고 귀를 열어서 듣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보여 지게 하시고 들려지게 하실 것입니다.
장차 될 일에 관한 이야기이니까
그 때에 맞추어서 점점 더 계시를 명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보지 못한 것을 지금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장차’ 라고 하는 ‘그 때가 맞다’ 라고 한다면 과거에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제는 장차 될 일이라고 하였으니 실재적인 시간으로 해석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될 일을 상징과 비유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면서부터 장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2000년을 지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장차 될 일’로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장차’ 라는 그 날들이 도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차 될 일’이니까요.
‘장차 될 일’이란? 실재적으로 나타날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장차가 되면 사건화 되어서 공개가 될 것입니다.
그 장차가 언제이냐?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워지면 비유와 상징이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먼 시절이었을 때에는 상징을 그 시대에 맞도록 이해하여야 했어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장차인 그 때가 되었음에도 상징이나 영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점진적 계시와 심층적 계시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언약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으로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는 때와 기한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희미하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심층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만큼 이루어졌고,
현재는 현재만큼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차는 장차만큼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과거만큼 계시가 열렸고,
현재는 현재만큼 열리고 있으며,
장차는 장차에 맞도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장차라는 그 때와 가까우니까 과거보다는 더 많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봄에 맺은 과실의 형체와 가을에 다 익은 과실의 형체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봄에는 작은 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탐스러운 모습으로 열려 있게 됩니다.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는 씨앗처럼 주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본 창세전 언약
창세기 15장입니다.
창 15:13-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언약의 내용은 후손과 땅에 관한 것입니다.
언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성경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그 후손들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언약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이방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돌아오기까지 언약을 하신 후 약 5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언약은 한 순간에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4대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언약을 맺고 완성되기까지 매 순간 순간 언약은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에 맞추어서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漸進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진행하면서 더 실체적이고 구체적으로 심층적(深層的)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언약을 펼쳐가는 모습입니다.
이걸 시편 기자가 잘 말해주었어요.
시편 105 편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 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26.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29.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30.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31. 여호와께서 말씀 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32.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3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35.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36.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37.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42.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43.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44.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
아브라함 언약은 먼저 그 후손들이 정한 때까지 이방의 객이 되는 것입니다.
정한 때가 되어서 구원자를 통해서 빼내심을 입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를 버려짐과 되찾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시고 이삭을 주십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 아들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는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한 사람을 먼저 이방나라로 보냅니다.
그가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차꼬에 채워져 언약을 이루기 위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은 바로 왕의 꿈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몽하고 온 세상을 기근으로부터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고 애굽의 실질적인 주권자인 총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야곱의 식솔들이 사는 가나안에 기근을 보냅니다.
그리고 양식이 있는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야곱의 12 아들들은 요셉의 후광으로 이방나라인 애굽에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한 때가 되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의 종으로 사로잡히게 만드십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애굽에 보내서 이스라엘을 찾아오게 하십니다.
이 기간을 430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광야 40년을 거쳐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서 아브라함 언약이 1차적으로 완성이 됩니다.
약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후 약 400년의 사사시대를 거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하는 왕정 시대가 열리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완성되어 완전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집니다.
약 1000년에 걸쳐서 아브라함 언약이 온전하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잘 보시면 아브라함 언약이 두 차례를 걸쳐서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차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입니다.
2차는 가나안 입성에서 솔로몬 성전이 완성되기까지입니다.
창세전 언약도 마찬가지에요.
창세전 언약도 두 차례를 거쳐서 완성이 됩니다.
1차는 세상에서 교회로 빼내심을 입고 천년왕국까지입니다.
2차는 천년왕국 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은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이 역사 속에서 조금씩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심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각 시대마다 창세전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 어느 사건이든지 창세전 언약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인류의 조상인 아담부터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큰 그림으로 보여주셨어요.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빼냅니다.
그런데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하여 범죄하고 맙니다.
이에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함께 살 수가 없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아담은 뱀과 함께 에덴동산에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쉬운 말로 다른 행성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하늘이라 하고 지구를 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십니다.
죄인이 살아가는 저주 받은 땅이 바로 이 세상인 지구인 것입니다.
지구를 일컬어 장망성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자(죄인)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에덴동산은 지구 밖에 있겠지요.
지구 밖에 있는 에덴동산이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여기가 천년왕국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지 못한 일들을 예수님과 그의 신부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너희를 온전하게 구원해 줄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아담에게 있어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 데려다주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내고 난 후 에덴동산을 감추어 버립니다.
아담이 살아가는 동네에서는 에덴동산은 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보여주셔야지만 해요.
이걸 계시라고 합니다.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아담에게 소망은 여자의 후손이 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이를 믿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아담이 살아가는 동네에서 표상적으로 이루십니다.
에덴동산에서 해야 하는 일이 에덴동산 바깥으로 나와서는 예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저주의 땅인 애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구원하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반드시 종말을 통하여서 일어나게 됩니다.
최초로 일어난 종말은 노아 홍수입니다.
온 세상이 타락할 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은혜를 주어서 심판 때 살아날 방주를 짓게 하십니다.
그 방주가 심판 속에서 거룩한 산인 아라랏 산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아라랏 산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에덴동산과 같은 곳입니다.
노아의 종말은 장차 일어날 종말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비유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말의 비유를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종말의 모습이 영적으로는 노아의 때와 예수님의 재림 때와 같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노아 시대 일어난 홍수 심판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일어날 이 세상의 심판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고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노아의 가족으로 인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약 1000년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함으로서 이 세상에는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냄으로써 두 민족으로 나누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이스라엘과 이방으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저희로 나누었습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너희와 저희가 마치 청군 백군처럼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도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에요.
창세전 언약의 실상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구약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창세전 언약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때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 언약이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은 역사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흘러가면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완성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룬 것도 있고,
현재 이루어가는 것도 있고,
장차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를 점진적이고 심층적 계시라고 합니다.
점진적이라는 말은 진행된다는 뜻이고,
심층적이라는 말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이 구원되는 창세전 언약이 시간의 흐름과 같이 그 실체가 희미하던 것에서 점점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드라마로 비유해서 이해하여 보세요.
예를 들어서 창세전 언약이 30부작 드라마 라고 합시다.
그럼 1회에서 30회까지 각각의 회차마다 말하고자 하는 스토리가 전개되겠지요.
회차를 거듭할수록 드라마의 내용이 희미하던 것에서 점차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론은 30회에서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결론은 마지막에 나타나지만 1회부터 그 내용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전개가 됩니다.
처음에는 씨눈과 같은 것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사건이라는 싹을 내고 잎을 피우고 줄기를 내고 완성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도 역사 속에서 드라마처럼 점진적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조금 보여주고,
신약에서 조금 보여주고,
종말에 가서 온전하게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세워진 초대 교회에서는 장차 될 일을 말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을 온전하게 다 알 수가 없었어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상징으로 알려 주었으니 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미래에 일어날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들은 상징으로 해석을 하였지만 이제는 그 미래가 되었으니 상징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실재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상징적인 이야기들은 현재진행형으로서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온전하게 알 수 있도록 사건화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00년 전에 살았던 칼빈이 천년왕국을 이해하지 못하여서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것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때는 아직 요한계시록의 계시가 온전히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것이 지혜로움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온전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영적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어요.
그땐 그렇게 해석하여야 해요.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여서 창세전 언약이 완성되는 시기에는 상징이나 영적으로 해석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실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내용들도 실재로 역사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므나 비유가 비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시대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이 담고 있는 상징을 상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실재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때를 따라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읽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라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도 실재적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 때는 성경을 이해하는 폭도 좁았고 시대를 보는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성경을 보는 안목이 조금씩 깊어지는 것입니다.
시대를 보는 눈도 열려지니까 예전에 상징적으로 보았던 것들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실체로 드러나고 있음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에 맞추어서 조금씩 눈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속의 상징이 실상으로 나타남
초대교회 때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 세력인 음녀 바벨론은 교회를 핍박하던 로마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 시대를 거쳐 오면서 각종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이해하고 해석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로마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음녀가 로마의 성격을 가진 커다란 종교 집단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바로 로마 카톨릭입니다.
이 시대 로마 카톨릭은 큰 음녀 노릇을 하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말하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에요.
로마 카톨릭은 WCC를 앞세워서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여서 이 땅에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예표적으로 나타나던 것이 이제는 실재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러한 때에 큰 음녀를 예수님 초림 당시의 로마라고 과거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 된 집단이에요.
적그리스도 국가가 되려면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어야 해요.
그런데 이 시대 로마 카톨릭이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된 나라로 나타난 것입니다.
종교로는 이미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요.
이제 정치적으로 온 세상을 하나로 묶어서 거대한 국가가 되는 것만 남았어요.
지금의 국제 정세는 세계 단일정부를 향하여 가고 있어요.
모든 것들이 하나의 국가 되어야지만 살 수가 있어지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정한 종말 프로그램의 때가 다 되어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언약한 정한 때가 다 되어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던 때와 같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에 출애굽을 하였듯이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악이 점점 더 관영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도 극심하게 타락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이나 WCC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적그리스도적인 종교 통합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영적 간음이에요.
그래서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카톨릭이 벌리는 종교 통합 운동에 동참하고 있어요.
이건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일들이에요.
그런데 이 시대에는 드러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교회가 버젓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교단들이 종교 통합을 외치는 WCC에 동참하고 있어요.
심지어 WCC를 반대하면 이단으로 매도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방송에서도 WCC가 정통적인 기독교 단체라고 선동하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 방송을 후원하는 물주들이 대부분 대형교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2013년 부산에서 WCC 총회가 이루어졌을 때 반대하시는 분들의 주장이 한국의 대형교회 대부분이 WCC를 찬성한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들이 왜 WCC를 동조하는가 하면 WCC가 인본주의 신앙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운영하자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면 인간의 가치를 부추겨 주어야 해요.
그래야 돈을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은 인본주의를 가르치는 WCC가 매력적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세상 사람들이 동의하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해요.
예수 이외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기독교의 편협성을 버리고,
모든 종교는 동등하다고 하여야 전도의 확장성이 생겨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어서 신을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자면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종교보다 인간의 가치를 긍정해 주고 종교가 좋은 것입니다.
이걸 카톨릭이나 WCC 사상을 주장하는 인본주의로 세워진 교회들이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본주의로 세워지는 교회에는 세상에 덕망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들은 이들의 이름을 팔아서 호객행위를 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어요.
이게 종말의 교회상이에요.
그래서 종말의 교회를 음녀라고 하고 세상의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은 편협성을 담고 있어요.
복음은 모두에게 들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들에게만 들려져요.
그러므로 편협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지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다수의 사람이 기뻐하는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종교 통합의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히 다수를 따르는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수를 원하는 대형 교회들에게는 편협성을 가진 복음보다는 세상에 확장성을 가진 인본주의가 좋은 것입니다.
물질적 가치로 세워지는 조직화 된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시대는 교회 안에는 뱀의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으며 기독교가 세상의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사도 요한에게 종말의 교회가 음녀가 되었다고 알려주고 있어요.
음녀가 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이 기이히 여기는 것입니다.
천사의 증거대로 이 시대 교회는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므로 지금은 요한계시록을 초대교회 식으로 음녀는 로마라는 상징적 해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 시대는 천년왕국을 영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땐 상징하는 것들이 역사 속에서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의 예언들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요.
모든 계시가 완성되어가고 있어요.
그러므로 천년왕국도 영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실재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큰 교회에 다니는 권사님이 자기 교회 목사님께서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요한계시록을 강해한다고 하니까 이단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소경 인도자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소경이니까 칼빈이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 안 되는 금서(禁書)로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의 말을 듣는 그 사람도 소경이긴 마찬가지에요.
주석은 성경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에요.
자기가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라고 자기 생각을 풀어 놓은 것이 주석이에요.
그러므로 주석은 참고는 하시되 절대성은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어요.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성경은 비밀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이므로 성령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있어요.
성령이 깨닫게 해주심이 있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신앙 수준에 맞게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어린아이 신앙 때에는 어린아이 신앙만큼 깨닫게 해 주시고,
신앙의 경륜이 어른의 신앙이 되면 어른의 신앙만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어려서는 어린아이 생각을 하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생각을 버리듯이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아 가는 것도 신앙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성경을 이해하는 폭이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봅시다.
고전 13:9-12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온전하게 아는 것이 있다고 하지요.
어렸을 때는 부분적으로 알았어요.
그러나 장성한 자가 되면 온전하게 알게 되어요.
예언적인 의미로 보면 초대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알았어요.
그러나 종말의 교회는 장성한 자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서 점진적으로 계시가 열리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두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온전한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희미하던 것이 1000년 전에는 조금 더 밝혀지고 지금은 더 많이 밝혀졌어요.
그러므로 500년 전에 성경을 해석하던 것과 지금 성경 해석의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칼빈도 부분적으로 보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칼빈보다 더 깊고 온전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에요.
계시의 흐름의 문제에요.
그 시대는 그게 옳았고 지금은 이게 옳아요.
그러므로 과거적 해석에 매이지 말고 현재적 해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더더욱 그러해요.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긍정적인 사람의 얼굴에서는 항상 미소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