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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병천카페, 동탄 지구촌사랑교회[성령전인치유목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병천목사
마귀의 출입구를 차단하라[09]
261023(금요심야)
제9장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
The fight of faith
(불순종은 누룩처럼 전염성이 강하다)
유 1:1-25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예수님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다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미지근한 모습이 되어가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신앙의 여정에서 한때는 그렇게도 열정적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철저히 무기력한 모습으로 변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들은 전쟁의 희생자들이다. 다만 당사자들은 자신이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유다는 이러한 투쟁에 관한 내용을 가득 담아 편지를 썼다.
(유 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 1:3, NKJV) 『Beloved, while I was very diligent to write to you concerning our common salvation, I found it necessary to write to you exhorting you to contend earnestly for the faith which was once for all delivered to the saints.』
당신은 본문을 읽으면서 메시지에 담긴 절박한 마음이 느껴지는가?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확장번역본 성경(Amplified Bible)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원래 우리의 일반 구원에 관한 저의 전반적인 우려(whole concern)를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그 믿음을 위해 싸우라고 절박하게(urgently) 호소하고 강력히 권고해야(exhort) 할 필요성을 느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Beloved, my whole concern was to write to you in regard to our common salvation. But I found it necessary and was impelled to write you and urgently appeal to and exhort you to contend for the faith]』
'싸우다(contend)'란 '전쟁하다(battle)' 혹은 '전투하다(combat)'를 의미한다. '힘써(earnestly)' 라는 말은 곧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란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 혹자는 우리의 싸움이 하늘에 있는 마귀들에 대한 믿음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싸움 역시 분명히 영적 전쟁이다(엡 6:10-12). 그러나 유다서는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을 말하고 있다. 유다서 4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믿음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 슬며시 숨어들어온 어떤 사람들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치 죄를 은폐하는 도구 혹은 죄를 합리화하는 허가장이라도 되는 양 잘못 전해주는 자들이다. 본문에서 '방탕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셀게이아(aselgeia)'이다. 신약 성구사전에는 이 단어를 '음탕함, 방자한 정욕(lust), 무절제' 라고 정의한다. 교회 안에 숨어든 이들은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았다며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그러나 분수에 지나치고 육체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시키는 자들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은 훨씬 더 분명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리빙 바이블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유 1:4, 리빙 바이블).“크리스천이 된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
(유 1:4, 현대어) 『.... 그들은 이렇게 지껄여 댑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마음대로 해도 되는거야.' ...』
유다서는 이들을 가리켜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 (유 4b)라고도 말씀한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을 하는 자는 누구든 오늘 우리 교회에 들어오지 못해.' 맞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분명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유다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용케 벌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다서는 이런 자들이 아무도 몰래 슬며시 숨어 들어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드러내놓고 부인한다면 금방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일 것이다. 다음 구절은 이런 자들이 어떻게 교회 안에 비집고 들어오는지 보여 준다.
(딛 1:15-16)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들이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행위를 통해서이다. 나아가 이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속이는 자들이라 불렀다.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속이는 자는 인격을 가장하거나 그럴듯하게 꾸며서 남을 속인다. 마치 양의 옷을 입은 이리처럼 말이다. 바울은 그들이 단지 남만 속일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속인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믿는다. 거듭남의 체험을 고백하고, 크리스천으로서의 여러 가지 활동들에 참여하면서, 성경의 언어들을 유창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이들의 정체를 분별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삶의 열매를 통해서이다(마 7:18-20).
(마 7:18-20)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속이는 자들은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유 8)한다. 또한 이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유 16, 19)이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사역과 교회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 아닌지 살펴보라. 악의 없고 순진한 수많은 사람들 중 이들의 행위로 인해 악영향을 받은 자는 이제까지 수도 없이 많다.
(유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서는 이런 자들을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세 인물, 곧 가인, 발람, 고라에 비유한다. 이 세 인물들은 모두 한때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기거나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이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제물을 바친 일과 관련하여 화가나, 결국 하나님의 권고를 거역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발람은 권력, 지위, 돈을 탐한 자였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예언적 기름부으심을 비열한 목적에 사용했다. 이 일로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칼날에 죽임을 당한다(수 13:22).
고라는 레위 자손으로서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여 일어났다.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 16:3). 고라의 관심은 모세가 지나친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는 모세가 가진 권위를 자신도 함께 누리기를 원했다. 고라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리더십에 맞서며 모세가 스스로를 높인다며 비난했다. 모세를 높이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로써 고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적하였다(롬 13:1-2). 거역죄를 저지른 고라는 산 채로 땅 속에 삼켜지는 벌을 받았고,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지옥)에 빠지는 벌을 받았다(민 16:31-33).
가인, 발람, 고라는 자기 스스로를 섬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목적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데 있지 않다. 유다서는 이러한 자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유 1:12)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공동식사를 함께 하는 애찬은 초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크리스천들의 모임들은 애찬을 상징한다. 유다서는 애찬에 참석한 속이는 자들을 가리켜 '암초(헬. (σπιλάς, spots)'라고 부른다. 이는 그들의 행위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티(헬. σπίλος, spot)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 (엡 5:27)를 위해 다시 오신다. 주님의 날에 있을 의로운 자들의 모임에 속이는 자들은 참여할 수 없다. 유다서의 말씀을 계속하여 들어보자.
(유 1: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물 없는 구름이란 그들의 공허한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들은 겉모양으로는 경건한 듯 보이나, 실제로는 예수님의 성품이 결여된 자들이다. 외관상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명 혹은 본질적인 것은 갖지 못한 자들이다. 유다서의 표현을 계속해서 주의 깊게 살펴보자.
(유 1: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본문은 이들을 뿌리 없는 가을 나무에 비유한다. 가을은 무르익은 탐스런 과일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추수의 시기이다. 유다서의 저자는 이 메마르고 뿌리째 뽑힌 나무들을 죽고 또 죽은 것이라고 묘사한다. 죽고 또 죽다니, 이게 웬 표현일까! 두 번 죽기 위해서는 일단 한 번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났다가 또 다시 죽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 없이 죽었다가 구원을 받은 후 마음에서 영원히 주님과 분리됨으로써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묘사한 표현이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
Once saved always saved?
이제까지 교회 안에 만연되어 온 한 가지 기만적인 교리가 있다. 이 교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를 둘러싼 여러 가지 논쟁이 있긴 하지만, 사실은 논쟁할 필요가 없다. 이 교리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유는 성경에 대한 몇 가지 왜곡된 가르침들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진리와 상반된 것이라도 거침없이 말한다. 어느 한 주제에 기울어진 마음을 갖고 있는 자는, 자기가 가진 신념의 안경으로 성경 전체를 본다. 읽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읽으려 한다.
성경에 관해 당신 나름대로의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견해에 관해 실제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라. 어떤 사람이 말하는 교훈을 가지고 성경을 걸러서 해석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만 한 절 한 절 비교해가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마음을 활짝 열고 귀 기울여보라. 성경은 결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진리를 두려워 할 까닭이 없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그분을 두고 먼 데로 떠나버리려 하지 않는다!
우선 구원받은 개인에 관한 성경구절을 찾아 살펴보자. 야고보서에는 아주 좋은 예가 제시되어 있다.
(약 5:19-20) 『[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본문에서 형제들아'와 '너희 중에' 라는 구절에 주목하여 보자.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 여기는 일반인들이 아니었다. 야고보는 지금 진리의 길에서 떠난 신자들의 경우를 다루고 있다. 본문이 진리에서 떠난 형제를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누군가 그들을 회개시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유다서는 이런 자들을 '죽고 또 죽은 자로 부른다. 이들은 예수 안에서 한때는 살아있던 자들이었다. 이 점에 관해 잠언은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잠 21: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진리에서 떠났다는 표현은 한때는 진리 안에 머물러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일단 진리에서 떠난 자가 의의 길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결국 '사망의 회중', 곧 지옥에 거하는 신세가 된다. 베드로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벧후 2: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이쯤에서 한 번 자문해 보시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자가 구원을 받겠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명백히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한 번 구원을 경험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계속해서 말씀을 들어보자.
(벧후 2:20-21)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세상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은 세상의 힘에 압도당하여 다시금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해진다. 방금 전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이, 타락한 자들이 주님께 되돌아올 유일한 방법은 진실한 회개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더러움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의의 길을 한 번도 알지 못한 것이 훨씬 나았을지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영생을 선물로 받은 후 다시 영원히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오히려 한 번도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어떻게 의의 길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유다서는 그들이 "죽고 또 죽어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자들이라고 말한다.
(유 1:12-13) 『[12]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그들에게 예비된 것은 영원히 캄캄한 흑암이다. 예수를 영접하여 주님의 뜻을 아는 자가 주님을 떠나 계속해서 세상에 머물러 있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둘째 사망이라는 무서운 심판뿐이다(계 2:22-20:6, 14, 21:8). 이들이 겪게 될 고통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눅 12:45-48)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I never knew you
8장에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오라는 말씀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는 말을 듣게 될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들은 구원을 통해 누리게 될 유익들만을 취할 목적으로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이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좇더라도 주님께 대한 헌신이 결여된 사실은 언젠가는 결국 밝혀진다(가룟 유다처럼 말이다).
이제는 마태복음 7장 22-23절에 나오는 둘째 부류의 사람들에 관해 살펴보자. 이들은 구원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한 때는 주님을 알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인내하지 못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꾸짖으신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겔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하나님은 그들의 의를 전혀 기억치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말이다. 이제껏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던 양 하나님은 그들의 의를 잊어버리신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우하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끝까지 견디지 못한 자에 대하여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를 전혀 기억하지 않으신다. 이는 하나님이 의인들의 죄를 용서하신 뒤 그 죄를 완전히 잊어버리시는 것만큼 확실하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아니하리라" (히 10:16-17).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고의적으로 잊어버리신다. 마귀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고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그들에 대해 고소하는 죄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마치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자와 같다.
유다서의 핵심 메시지
Jude's main point
유다서의 메시지를 요약해 보자. 유다서는 우리에게 열심히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촉구한다. 또한 어디에 초점을 맞춰 싸움을 해야 하며, 그 싸움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소개해준다. 우리의 싸움은 크리스천으로 자처하면서도 자기본위적인 삶에 유익이 될 때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대부분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유다서의 경우와 같이, 이들은 신자가 된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일 수도 있다. 혹은 믿었다가 다시 은혜에서 떨어져나간 사람일 수도 있다. 양자 중 어느 경우에 해당하든 간에, 이들은 미지근한 사기꾼이요, 거짓 형제이며, 양의 옷을 입은 이리요, 교회의 티(spots)이다.
사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목소리들, 곧 예수님, 바울, 베드로, 유다. 사도 요한은 한결같이 은혜에서 떨어져나갈 자들에 관해 경고한다. 나 역시 이들과 동일한 목소리로 당신에게 경고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목소리야말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싸움의 본질이 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돌봄을 받고 있는 자들이, 타락함으로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과 동일한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야 한다.
유다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변질시킨 자들에 대한 경고 후, 강력하게 보호를 촉구하는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유 1:20-21)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켜야 한다. 기억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요 14:15). 유다서는 불순종의 누룩이 당신의 삶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한다(고전 5:6을 참조하라).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불순종은 전염성이 있다. 전염병 환자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점차 저항력이 약화되다가 마침내 그와 동일한 질병에 감염될 우려가 있다. 불순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훈계의 말씀은 마치 예방주사와도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종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성과 저항력을 높여준다. 당신이 살아가는 마을 전체에 전염성이 매우 강한 질병이 번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당신은 그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녀들에게 면역력을 강화해주고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겠는가? 물어볼 필요도 없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자녀들을 위해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과 질병 확산을 막는 법을 가르쳐주려 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서 기자들이 미지근함과 불순종이라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아시아의 장로들에게 주어진 경고에 귀 기울여보자.
(행 20:28-31)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삼가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본문은 바울이 3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호소한 내용이다. 바울은 그의 영적 자녀들이 불순종이라는 질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이리들이 교회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옷을 입고 교회 안에 들어온 자라고 하셨다(마 7:15). 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정체는 열매를 통해 분별된다(마 7:16). 이리는 목자의 보호를 받지 않는 무리들 속에는 쉽게 들어온다.
우리는 용기를 주는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바울은 온전한 복음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주는 말씀뿐 아니라 경고의 말씀도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럴 때 비로소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흠이 없는 자로 세울 수 있게 된다(골 1:28).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정을 완수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에 순종하는 일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교훈의 소중함을 잘 깨달은 자였다.
(시 19:9-11)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성숙한 신자들에게는 경고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모든 교훈의 말씀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는 자는 놀라운 보상을 받게 된다.
목회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는 일 뿐 아니라,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도 부름 받았다. 목회자는 원수의 책략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경고의 말씀을 부정적인 메시지로 여겨 이를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많다. 경고의 말씀은 부정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예방의 메시지이다. 생명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메시지이다!
예수님은 결코 부정적인 분이 아니셨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주님은 거듭 제자들에게 지시하셨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 8:15). 전염성 있는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위선으로 이끄는 율법주의이다. 전염성 있는 헤롯의 누룩이란 불순종적이고 육체적인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물론 헤롯의 누룩도 위선적인 삶으로 이끈다. 이 두 가지 전염성 있는 질병들은 모든 부주의한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 질병에 의해 공격을 받은 사람은 불순종하며 살아간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베드로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경고를 받지 않는 사람은 이미 타락한 자들의 유혹에 휩쓸려 자기의 확신을 잃게 되기 쉽다.
미지근함의 온상
Lukewarm breeding grounds
사역이 무척 힘든 대상 중에는 기독교 단체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 학교는 가장 까다롭다. 여러 기독교 학교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담을 이야기 하자면 여러 장(章)을 쓰고도 남으리라. 경험담을 나누는 것은 본서의 취지와는 맞지 않으므로 소개를 생략하기로 한다.
기독교 단체들에서의 사역이 어려운 까닭은 그곳이 반역과 불순종이라는 미지근함의 온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성 단체의 경우 반역과 불순종이 처음에는 소수의 몇몇 학생들에게서 출발한다. 이들 젊은이들은 주일학교와 젊은이 그룹에서 성장하여 거듭난 체험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권위를 멸시하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으며, 심지어 아직 어린 나이에 이미 마약과 술에 손을 댄 이들도 있다. 이들의 관심은 온통 프로 스포츠 선수들, 할리우드, 데이트, 세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일에 쏠려 있다. 이들이 교회 지도자의 자녀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타협과 위선을 분별하는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자라났기에 더욱더 냉담하고 위험한 상태로 빠진다.
마음이 완고한 이 학생들은 자기의 삶의 방식이 주변 이웃들에게 하나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말보다 행동이 주는 메시지가 훨씬 더 강력하다). 이들이 방출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구원을 받고나서도 자기 자신을 섬기며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이들이 풍기는 메시지는 새롭게 회심한 학생들을 비롯한 나머지 모든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당혹감에 빠진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크리스천이라면서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죠?" 그러나 처음에는 충격을 받던 이들도 점차 의문이 사그라지면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이라고 말이다. 거역은 해도 된다. 동료 친구들의 음란한 생활방식에 자극을 받아, 왜곡된 은혜의 교리가 전체 학생들의 사고 구조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경건한 삶의 기준을 고수하느니 차라리 불순종하며 살아가라는 압박이 가중되어 온다. 이러한 딜레마에 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어느 한 기독교계 고등학교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주에서 최고의 대학 입시율을 자랑하는 곳으로 유명한 학교로서, 학생들이 지닌 기독교인으로서의 성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체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고, 훌륭한 교회생활을 영위해온 이들이었다.
그 학교에서는 매주 한 번씩 채플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정확히 50분간 드려졌다. 그런데 한 가지 소문이 들려왔다. 그 학교의 교장이 예배 시간 중 할당된 시간을 초과한 목회자들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아갔다는 이야기였다. 후일 내가 그 학교 채플에서 강연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반항적으로 쏘아보며 구부정한 자세로 졸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마음은 극도로 완고해져 있었다. 냉담한 태도와 완고함으로 그들은 나에게 한 가지 또렷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런 얘기는 이전에 다 들었어요. 제발 좀 빨리 마쳐주세요!" 그들의 태도를 대하고 있자니 에스겔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겔 3:7-9)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예언적 기름 부으심이 완고한 마음의 사람들 앞에 더욱 강력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배운 바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면 완고할수록 더 강한 예언적 메시지가 선포된다. 단, 이는 사랑과 회복을 목적으로 함이지 결코 징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완고한 마음을 무너뜨리는 데는 큰 망치로 한 번 잘 내려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내 말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나 (렘 23:29).
설교가 진행됨에 따라 예언적 기름 부으심은 점점 증가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지난 7~8장에서 소개한 바와 같은 수많은 진리를 선포했다. 말씀을 듣는 학생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무관심한 태도로 앉아 있던 학생들의 몸이 앞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표정은 놀란 흔적이 역력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가 불순종을 빛 가운데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그동안 마음이 얼마나 더럽혀져 있는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자신의 실체를 보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비록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 혹은 자신들은 타락한 자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그들은 온통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혔다. 강연을 마칠 즈음 그들의 뺨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강단으로 초청하는 메시지를 간단하게 선포했다.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맞아들이지 않으신 분은 강단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채플에 앉아 있던 230명의 학생 가운데 185명이 앞으로 몰려나왔다! 여학생들은 흘러내린 눈물로 마스카라가 교복에까지 번져 있었다.
채플은 원래 오전 9시 35분까지 마쳐져야 했다. 강단으로 초청하는 메시지를 선포한 시각은 9시 25분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에 압도당한 학생들은 11시 30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들의 완고함은 무너져 내렸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그 학교의 교장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 우리도 이제까지 이런 일을 위해 줄곧 기도해 왔소. 내일 아침 다시 한 번 와주실 수 있겠소? 당신이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다른 모든 수업을 취소하고 특별 예배 시간을 마련해 보려고 하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날 채플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그 채플 예배를 담당하고 있던 목사에게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그는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얼마나 완고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들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려 주셨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제까지 그 학교의 채플에서 설교를 맡았던 목회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기 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의 인정을 얻고자 애써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예배가 정확히 8시 45분에 시작되었다. 나는 교장에게 적어도 9시 35분까지는 예배를 마치겠다고 말해두었다. 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마시고 하시고 싶은 만큼 해주십시오." 그 날 채플에 모인 학생들은 갈급한 표정으로 말씀에 집중했다. 몇몇 학생들은 하루 전의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매우 강한 예언적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번에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불순종으로 타락한 모습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선포했다. 바위를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 번만 내려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예배를 마칠 즈음, 첫 날의 강단 초청 메시지에 응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날에 강단 앞으로 나와 회개했던 학생들도 함께 나왔다. 이번에는 삶의 다른 영역들에 대해 회개하기 위해서였다. 울면서 회개하는 학생들에게 성령께서 임재해주셨다. 그날 예배는 오전 11시 15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우리 가족은 샌디에이고 공항에 있었다. 채플 예배를 인도했던 학교와는 1500마일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회전식 컨베이어 앞에 서서 수하물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1년 전 내가 메시지를 전했던 채플에 두 번 모두 참석했었다고 말했다. 최고로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는 그 날 성령님을 만난 뒤 자신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그 날 채플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비타협적인 메시지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변화된 삶의 증거를 지켜보는 나의 가슴은 터질 듯 벅차올랐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비단 기독교계 학교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와 성경 대학에서도 이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수백 명의 청중이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듣기도 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깨끗케 되는 체험을 했다. 그들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은 더 이상 율법이나 죄의 더러움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와 은혜 안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사업가들이 나를 찾아와 자신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며 흐느끼기도 했다.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말이 있다. "존, 나는 이제까지 미지근한 상태로 살아왔네. 오늘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 역시 예수님의 입에서 내쳐졌을지도 몰라."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나에게 이와 동일한 간증을 들려주었다. 무엇보다 신나고 놀라운 것은 이런 간증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수많은 개인들 혹은 그들의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자신들은 여전히 열심히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예수님의 재림에 합당한 신부는 세상과 간음하는 미지근한 자가 아니다. 주님은 세상에 물들지 않고 거룩해진 신부를 만나기 위해 다시 오신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과 당신은 결혼할 수 있겠는가?
“1년 중 364일은 당신을 위해 신실한 배우자가 되어 드리겠어요. 그러니 1년에 딱 하루만 옛 애인과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런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으리라.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예수님은 마음의 일부를 세상을 위해 남겨놓은 신부를 위해서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다. 속지 마라. 세상에 오염되지 마라. 교묘한 불순종에 물들지 마라. 확고한 위치를 떠나 미지근한 타락의 장소에 휩쓸려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당신에게 한 가지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 8장과 9장을 통해 성령님이 계시해 주신 빛으로 성경을 읽어보기 바란다. 어쩌면 이 메시지를 들으면서 당신은 새로운 차원의 행복을 맛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메시지 안에는 깨달음과 지혜가 듬뿍 담겨 있다. 일시적인 행복을 포기하면 이 메시지를 통해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받을 수 있다. 주님의 은혜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