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양양 여행 ③ 용인이씨(신사임당 모친) -
조상이 갈고 닦아 반듯이 세운 陽宅
아녀자 홀몸으로 굳건히 지켜내며
딸만큼 外孫들까지 골구로 준 큰 사랑
열여섯에 모친 여의고 마음 잃은 외손주에
慈愛와 사랑주어 학문에 힘쓰게 하여
그 덕에 조선의 經世家 키워내신 여장부
배달9216/개천5916/단기4352/서기2019/03/0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사임당 어머니 “용인이씨”란 인물
사실 남성우위 신분 질서가 엄연하던 시절
아녀자가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참 여려운 환경이었으리라.
그런데 글과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갖춘
신사임당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헌신적인 신사임당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사임당 뿐만이 아니라 신사임당 사후에도 18년을 더 살며
90세까지 장수하며 율곡, 권처균등 외손들이
어머니처럼 여겼던 데에는
당신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글은 잘 몰랐어도 慈愛로 外孫들을 키운
용인이씨의 헌신이 낳은 결과였다.
배달9216/개천5916/단기4352/서기2019/03/09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
李氏分財記(Yi's Property Division Document)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재산의 상속과 분배를 기록한 문서.
① 제작발급경위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는 아버지 생원 이사온(李思溫)과
어머니 최씨(崔氏) 사이에 태어난 무남독녀(無男獨女)로
남편 신명화(申命和) 보다는 네 살 아랫니다.
생전에 다섯 명의 딸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기 위해 분급문기(分給文記)를 작성하였다.
② 구성과 형태
분배내용이 먼저 나오고 재주(財主)인 용인이씨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서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로 240㎝, 세로 28㎝의 긴 한지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③ 내용
첫째 사위인 수양부위(修養副尉) 장인우(張仁友),
둘째 사위인 이원수(李元秀),
셋째 사위인 성균생원(成均生員) 홍호(洪浩),
넷째 사위인 유학(幼學) 권화(權和),
다섯째 사위인 유학 이주남(李冑南)에게
토지와 노비(奴婢)를 분배해 주는 내용이 차례로 실려 있다.
끝부분에는 외손 이이(李珥)에게 봉사조(奉祀條)로,
외손 권처균(權處均)에게는 배묘조(拜墓條)로
전답과 와가 한 동을 별도로 지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④ 의의와 평가
표기방법에서 이두방식(吏讀方式)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재산상의 문서나 법률서에는
이두로 현토(懸吐: 한문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도록 토를 달아주는 것)했던
당시의 관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재산분배에 대한 원칙과
상속대상 등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한지에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으며,
첫부분이 떨어져나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본 재주(財主)인 신명화(申命和) 사후에 그의 처 이씨가 분재하였기 때문에
1522년(중종 17) 이후에 작성한 것이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딸만 다섯을 두었으므로
‘장녀 사위 장인우(張仁友) 처의 몫’,
‘이녀 사위 최난수(崔蘭秀) 처의 몫’ 등과 같이 사위의 이름을 병기 하였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까지는 대체로 균등분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노비·가옥 등을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앞으로 제사를 받들 손자 현룡(見龍:李珥의 어린시절 이름)에게는
서울 수진방에 있는 집과 전답을,
묘소를 돌볼 손자 운홍(雲鴻)에게는 강릉 북평촌에 있는 집과 전답을 분배하였다.
다른 문서에서와 같이 분재 당사자인 사위 다섯 모두 문서 작성에 참여, 수결(手決)하였다.
필집(筆執)은 서출(庶出)인 사촌 최난손(崔蘭孫)이 맡았다.
이는 조선시대 재산상속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권민구(權敏求)가 소장하고 있다.
용인 이씨 부인(龍仁 李氏 夫人, 1480~1569)
조선 중기의 화가인 신사임당의 어머니.
본관은 용인(龍仁)이며,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세조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이유약(李有若)의 손자인 이사온(李思溫)이고,
어머니는 대사헌ㆍ한성부좌윤ㆍ형조참판 등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딸인 강릉 최씨(江陵崔氏)이다.
신명화(申命和)와 결혼해서 다섯 딸을 낳았는데,
둘째가 조선 중기의 화가이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생모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이씨 부인은 1480년(성종 11) 강원도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이사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사온이 결혼한 뒤 처가로부터 오죽헌(烏竹軒)을 물려받아
그곳에 살았으므로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성장했다.
이사온은 1483년(성종 14)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해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관직에는 오르지 않았다.
이씨 부인의 삶에 대해서는 외손자인 이이가 쓴
〈이씨감천기(李氏感天記)〉,
〈외조비이씨묘지명(外祖妣李氏墓誌銘)〉 등을 통해 기록이 전해진다.
이이는 〈이씨감천기〉에서 이씨 부인의 성품에 관해
“말은 서툴러도 행동은 민활했으며, 모든 것에 신중히 하되
선행을 하는 데에는 과단성이 있었다”라고 나타냈다.
이씨 부인은 영월군수(寧越郡守) 등을 지낸 신숙권(申叔權)의 아들 신명화와 결혼했다.
남편인 신명화는 1516년(중종 11)에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관직에 오르지는 않았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 딸을 낳았는데,
첫째는 수양부위(修養副尉) 장인우(張仁友)와,
둘째인 신사임당은 진사 이원수(李元秀)와,
셋째는 생원(生員) 홍호(洪浩)와,
넷째는 권화(權和)와,
다섯째는 이주남(李冑南)과 결혼했다.
이이의 기록에 따르면 이씨 부인은
어머니 최씨 부인을 돌보기 위해 강릉에 머물면서
16년 동안이나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그리고 1521년 남편인 신명화가
장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강릉으로 오던 길에
중병이 들자 조상의 무덤에 가서 가운데손가락을 자르며 기원해
남편의 병을 낫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신명화는 이듬해인 1522년(중종 17) 한양에서 죽었는데
강원도 관찰사이던 황효헌(黃孝獻)이 1526년 이 일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리고 1528년 예조가 다시 표창을 건의하면서
이씨 부인의 절의(節義)를 기리기 위한 정각(旌閣)이 세워졌다.
이씨 부인은 1551년 딸인 신사임당이 죽은 뒤에도
이이를 비롯한 외손들을 보살폈다.
이씨 부인은 1569년에 사망했으며,
오죽헌은 넷째 사위인 권화가 물려받았다.
한편, 이씨 부인이 1522년 남편 신명화가 죽은 뒤에
다섯 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 위해 작성한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한지에 두루마리 형태로 된 이 문서는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과 외조모 이씨부인
용인이씨대동보 부록 P.39~42.
한국에 유학이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2~3세기로 소급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학을 국교로 삼아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를 형성한 것은 조선조이다.
조선조의 유학은 退溪퇴계 李滉이황(1501-1570)과 栗谷율곡 李珥이이(1536-1584)를
배출하는 16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퇴계와 율곡은 일반적으로
중국 성리학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율곡은,퇴계가
인간의 존엄성을 천명하는데 주력한 것에 비하여, 인간의 내적 성실성을 강조하는 한편
성실성의 사회적 실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播溪반계 柳馨遠유형원(1622-1673)이나 星湖성호 李瀷이익(1681-1763)과 같은
후세의 실학자들에게 추앙을 받게 된다.
율곡은 본관이 德水덕수이고 字자는 淑獻숙헌이며 시호는 文成문성으로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元秀원수이며,
어머니는 흔히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간주되는 師任堂사임당 申氏신씨이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사임당에게 주로 수학하였고,따로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7세 무렵에 이미 사서四書 등의 경서經書를 두루 통달하였다고 한다.
즉 율곡에게 있어서 사임당은 한편으로는 어머니이면서, 한편으로는 학문의 기초를
세우도록 지도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율곡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임당은 율곡의 나이 16세 때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에 율곡은 계속되는 슬픔으로 인하여 잠시 세상을 등지고 금강산에 들어가지만,
일 년 뒤에는 다시 하산하여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사임당에 대한 효심을 외조모 이씨부인에게 펼치게 된다.
율곡의 行狀행장에 의하면 율곡은 33세인 무진년(1568) 11월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의조모 이씨의 병보를 듣자 사직의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갔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사)간원(司)諫院은 율곡을 파직할 것을 간하였으나, 선조는
“외조라 하더라도 情理정리가 깊으면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효행의 일로 파직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라고 하고 파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기사년(1569) 6월에 선조는 다시 율곡에게 홍문관 교리를 제수한다.
이에 율곡은 외조모의 봉양을 위하여 교리를 사직하는 “辭校理陳사교리진”를 올린다.
그러나 이 상소는 선조에게 윤허되지 않았다. 율곡은 7월에 다시 선조로부터 소명을 받고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오지만,8월에는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辭校理仍사교리잉 陳情疎진정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상소도
윤허 되지 않았다. 율곡은 10월에 다시 외조모의 봉양을 위해 사직을 간청하였고
결국은 선조로부터 휴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강릉으로 가는 도중에 외조모의
부음을 듣게 된다. 결국 외조모의 병보를 들은 무진년 11월부터 율곡에게는
노쇠한 외조모의 봉양이 어떤 다른 것보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율곡의 외조모에 대한 기록은 위에서 언급한 기사년의 “辭校理疎”사교리소와
“辭校理仍陳情疎”사교리잉진정소 이외에, 이씨부인의 일화를 기록한
“李氏感天記”이씨감천기, 그리고 墓誌銘묘지명인 “外祖妣李氏墓誌銘외조비이씨묘지명”
과 제문인 “祭外祖母李氏文제외조모이씨문” 등이 있다. 이상의 글에서 율곡은
자주 외조모에 대한 정감을 극진히 펼치는데,특히 기사년 6월에 올린
“辭校理疎 사교리소”의 내용이 자세하다. “辭校理疎 사교리소”에서 율곡은
“소신은 갓난 아이 적에 강릉의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외조모 이씨께서 쓰다듬고 안아주며
자상히 돌보아주셨으니 은혜와 사랑을 지극히 받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었으므로 그 분을 어머니처럼 받들었고, 외조모께서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을 자식과 같이 의지하시며 뒷날의 일을 모두 저에게 의탁하셨습니다. 명목은
비록 외조와 외손이지마는 정분은 사실 모자입니다. “名雖祖孫 명리조손
情實母子정실모자”라고 하여 외조모와의 관계가 단순한 祖孫조손의 사이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율곡은 “辭校理仍陳情疎 사교리잉진정소”에서도 외조모를
‘실로 친모와 같다. “實同親母실동친모” 라고 하였으며, “祭外祖母李氏文
제외조모이씨문”에서도 “祖孫조손은 그 명목이요 모자가 그 실정이다
“祖孫其名母子其情 조손기명모자기정”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율곡에게 있어서 이씨부인은 사임당의 역할을 겸비한 외조모였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각별한 정분을 지닌 외조모이기 때문에 율곡은 외조모가 병환에 걸렸다는 소식에
만사를 뒤로 하고 강릉으로 달려가게 된다. “辭校理疎 사교리소” 에서 율곡은
“외조모는 올해 나이가 아흔으로 사실 날이 멀지 않았고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오랫동안 병석에 계셨습니다. 몸은 벼슬에 매어 있어 찾아가 뵈올 길이 없었고,
一朝일조에 갑자기 운명하신다면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될까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병환을 이유로 (무진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급히 강릉으로 돌아와 간병하며
약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외조모님은 거동이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기력을
근근이 부지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타계하시어 다시 회생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서울로 돌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여,
자신이 무진년 11월에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오게 된 연유와 기사년 6월에 제수된
校理교리를 사직해야만 하는 정황을 선조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상소는 윤허되지
않았고, 결국은 앞서 말한 대로 외조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씨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는 율곡이 기록한 “李氏感天記 이씨감천기”나 “外祖批李氏墓
誌銘 외조비이씨묘지명”등 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율곡은 “外祖批李氏
墓誌銘 외조비이씨묘지명” 에서 다음과 같이 이씨의 출생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이씨는 용인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三水郡守 삼수군수인 諱휘 有若유약이 譯휘 益達익달을
낳았고, 전라도 兵馬盧候병마노후인 益達익달이 휘 思溫사온을 낳았다. 사온은 생원으로
벼슬하지 않았고, 참판 崔應賢최응현의 여식에게 장가들었다. 참판은 어질어서 가법이
있었으므로 최씨부인은 규범을 잘 닦아 단정했으며, 成化(**성화) 경자년(1480) 정월 24일
이씨부인을 낳았다. (** 成化: 중국 명나라 헌종 때의 연호(1465~1487))
그리고 “이씨감천기”에서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맑았으며, 행
동거지가 침착하고 조용하셨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행하는데 민첩하였으며,
일에는 신중을 기하였지만 선한 일을 하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다. 약간 학문을 알아
“삼강행실”을 구송하였으며 문장으로써 학문을 삼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순수한 자질을 지니고 실천적 학문을 익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자질과
학문적 경향은 순탄치 못한 부인의 일생을 지탱하는 기본 바탕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씨감천기”에 의하면 부인은 어려서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살았지만,
진사 申命和신명화에게 시집가서는 진사의 어버이가 계시는 한성으로 가서
시부모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모친 최씨가 병환으로 앓게 되자 외동딸인 이씨는
모친을 간호하기 위하여 강릉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효성을 다하는 극진한 간호로
일찍이 향리에 칭송하는 말이 자자했다고 한다. 한번은 진사가 강릉으로 찾아와
서울로 돌아가자고 하였는데, 이씨가 눈물을 흘리면서 “여자는 三從之道삼종지도가
있으니 분부를 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가 모두 노쇠하시고 저는 바로
외동딸이니 제가 없게 되면 부모님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더구나 당신의 모친께서도
오랜 병환으로 탕약을 끊지 못하시니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습니까? 제가 애통하여
눈물 흘리며 우는 것은 오직 이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은 서울로 가시고 저는 시골에
머물면서 각각 노친을 모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진사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부인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또한 1521년에 이씨의 모친 최씨가 돌아가셨을 때에, 진사가 서울을 떠나 강릉으로 가다가
여주에서 計音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한 나머지 냉증이 머리에 발생하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쉬면서 몸조리를 해야 하지만 진사는 급한 마음에 길을 서둘렀고,
강릉에 도착 하였을 때에는 거의 죽음을 피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씨는 막 모친상을 겪은 상태에서 다시 갑작스럽고 괴이한 災厄재액을 만났지만,
정성을 다하여 천지의 신에게 분향하며 七書夜7주야를 눈 한번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小刀소도로 왼쪽 손 중지의 두 마디를 끊고 하늘을 우러러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감히 상할 수 없지만, 제가 하늘로 삼는 바는 남편이오니 하늘이
만약 무너진다면 어떻게 홀로 살겠습니까?" 라고 하고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한다.
다음날 次女차녀(사임당)가 이씨를 모시고 앉았다가 어렴풋이 잠들었는데, 하늘로부터
대추씨만한 크기의 약이 내려오고 이를 神人신인이 받아서 진사에게 먹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사도 꿈속에서 신인이 나타나서 “마땅히 낫게 하리라" 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진사가 홀연히 병환을 떨치고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식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이룬 일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종은 旌門정문을 세우고 戶役호역을 면제하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부모를 섬기고 지아비를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이씨에 대하여
율곡은 “이씨감천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씨는 나의 외조모이시다. 부자의 사이와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 힘써서 仁禮인예로써
행동하였으니,참으로 이른바 婦道부도를 잘 실천한 분이다. 마땅히 부인들이 규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부의 情分정분이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어버이를 모시기
위하여 16여 년을 떨어져 사시었고, 진사께서 질병이 나셨을 적에는 마침내 지성으로
하늘에 빌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켰으니,빼어난 사람의 행실과 古人고인을 뛰어 넘는
節義절의가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士君子사군자에 배열되어
임금과 아비의 사이에 처하게 하였다면 충효를 갖추고서 국가를 바로 잡았을 것임을
여기서 알 수 있도다.
율곡의 견해로서는 남자가 임금과 부모를 대함과 여자가 부모와 남편을 대함은
비록 일은 다르지만 이치는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얼마나 그 상황에 맞추어 최선을 다 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씨부인과 같이 하나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다른 상황에서도 또한 최선을 다해서 또 다른
성취를 이룩했을 것이다. 율곡의 말대로 이씨부인이 만약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부모와 지아비에 대한 정성이 임금과 국가에 대한 정성으로 펼쳐져서
반드시 거대한 사업을 이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현실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씨의 태도는 후손에게
실천적 교훈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사임당이나 율곡과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대종회 감사 李道漢 弟, 李慶漢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