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지요?
* 본 답변자료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정성욱교수님이 쓴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를 인용 편집한 내용임을 밝힌다.
신학교에서 종교철학 수업 중에 소위 '악의 문제'라는 고전적인 종교철학적 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여러 가지 신학적 · 철학적 답변들을 다룰 때가 있다.
신정론의 출발
성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이 고민한 것처럼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인데 왜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말은 분명 악을 미워하고 싫어하신다는 말씀이고, 이 말을 확장하면 하나님은 악을 제거하고 싶어 하실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따라서 악이 제거되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긴 하시지만 선하지 않으시거나 선하시긴 하지만 전능하시지 않으신 분임을 반증하는 것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세상에 악이 존재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을 변호하려는 신학적 이론으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 이란 개념이 있다.
신정론의 의미는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악의 존재가 서로 공존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신학적 개념이다.
신정론은 악의 존재도 신의 섭리로 인식한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불합리한 고난의 경우에 일어난다.
신정론은 '신'(神, 데오스θεος )과 '정의'(正義, 디케δίκη)를 뜻하는 두 헬라어의 합성어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변호하려는 시도로서 일명 '신의론(神義論)'이라고도 한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세상이 이처럼 모순투성이인지, 왜 계속 죄악이 맹위를 떨치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맞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입장이다.
사실 어거스틴 자신이 악의 존재와 하나님의 의로우심 사이에 있는 모순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면서 신정론적인작업을 시도했다.
비록 그가 '신정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신정론이라는 용어는 계몽주의 시대에 활동한 독일의 수학자 겸 철학자 라이프니츠(G.W.Leibniz1646~1716)가 최초 사용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악이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능하시고almighty, 전적으로 선하신all-good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주장을 자기 나름대로 반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론의 문제는 어거스틴이 악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이전에 이미 초대 교부들 중에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0?)가 악의 문제를 고민한 적이 있고, 실은 성경 인물 가운데 이미 예레미야, 욥, 하박국 등 같은 사람들이 악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 바 있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인류 역사 만큼 오래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악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시는가?
이 문제를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신정론에도 여러 입장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어거스틴의 신정론이 있겠고, 어거스틴 이전에는 이레네우스의 신정론이 있다.
몰트만과 같은 신학자가 주창하는 십자가 신학적 신정론도 있고, 유대인 소설가 엘리 위젤 등이 주창하는 저항적 신정론도 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의 입장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러 입장의 장점들을 결합할 때어느 정도의 그림이 그려진다.
어거스틴의 신정론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의 영향으로 신앙적인 가정에서 잘 자랐지만 사춘기 때 크게 방황하면서 이미 십대에 성적 性로 탈선하여 사생아를 낳는 등 아주 방탕한 청춘을 보냈다.
그는 자신 속에 있는 죄의 본성으로 괴로워하다가 선과 악이라는 두 원리가 영원토록 충돌하면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주창하는 마니교에 빠졌다.
이후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한 것으로 보는 영지주의적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다가, 나중에 밀라노의 대주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의 설교를 듣고 극적 회심을 경험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자기의 죄 된 모습을고민하고 죄와 싸워온 삶의 과정을 <참회록>에 상세히 묘사했다.
이와 함께 로마가 야만족의 침입을 받고 몰락하는 시점에서 로마는 멸망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역사철학적으로 서술한 <하나님의 도성>도 어거스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참회록》과 《신론》과 더불어 어거스틴 사역 말기에 있었던 영국의 신학자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와의 은혜에 관한 논쟁도 그가 신정론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원죄론을 확립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창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사람을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 피조물로 만드셨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악의 기원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오용하고 남용한 데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파멸과 그 결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죄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말보다는 사람에게 온전한 자유의지를 주기 위해 죄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계획하셨다는 말이 더 합당하다.
즉 하나님은 죄를 혐오하시지만 다른 선한 목적들을 위해 당분간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들 중의 하나가 사람을 로봇이 아닌 인격자로 만들고 그렇게 대우하시는 것이다.
그 외에도 악의 존재를 허용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로그 악을 정복하게 하시고 장차 최후 심판을 통해 악을 완전히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측면도 있다.
결론적으로 어거스틴의 신정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무능하셔서 악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대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부산물 내지는 필요악으로 친히 감수하겠다고 결정 내리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도 괴리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 진영에서는 여전히 어거스틴의 신정론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 철학의 대가중 한 사람인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교수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더 세련되게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인정받는 C. S. 루이스 역시 넓게 보아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신정론
그렇지만 어거스틴의 입장과 좀 다른 입장들이 있다.
어거스틴의 신정론과 크게 구별되는 입장은 어거스틴보다 조금 더 초기의 교부인 이레네우스의 신정론이다.
이레네우스 역시 초대교회 때 영지주의를 배격하고 성경적인 복음을 탁월하게 변증한 위대한 교부였다.
그는 사람의 자유의지보다는 죄악의 필요성을 더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책임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완전한 성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타락 사건의 경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타락 이후 인간은 계속해서 악과 선을 동시에 경험해 가며 죄악이 나쁘다는 것과 선이 좋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사의 종말이 올 때야 비로소 성숙한 성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죄악은 사람을 교육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필수적 도구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레네우스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에 의하면 선과 악이 합력하여 결국 선을 이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
로마서 8장 28절의전후 맥락을 살펴볼 때, 도덕적인 선과 악을 합하여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하는 어려움이나 고난을 포함하는 모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범하는 죄악도 결국 우리에게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면,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말 것을 명령하는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괴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레네우스 신정론의 최대 약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악을 혐오하고 증오한다는 사실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이레네우스의 경우, 죄악의 필요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즉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죄악을 합리화시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히브리서 12장 4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하는 '선'은 도덕적 선악 개념의 일부로서의 '선'이 아니라 '유익'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거스틴과 이레네우스의 신정론 말고 몰트만Jurgen Moltmann과 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십자가의 신정론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십자가 사건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본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사건은 죄악을제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무능함에 대한 책임 행위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죄악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이라는 신비스러운 문제를 십자가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스스로 죽음으로써 죄의 존재에 대한 당신의 책임을 다 지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성경 전체 맥락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견해일 수 있다.
이런 십자가 신정론은 기독교 신앙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무능하심을 주창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엘리 위젤이라는 유대인 소설가의 저항적 신정론의 입장이 있다.
엘리 위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유대인 학살 현장을 체험하면서 죄악의 강력한 힘을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죄악을 제거하지 못하시는 듯한 무능한 하나님과, 제거하려고도 하지 않는 듯한 선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만이 악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저항과 더불어 모든 형태의 악에 대하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저항이라고 했다.
특별히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악에 대해서는 생명을걸고 저항할 것을 주장하는 매우 급진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다.
악의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변호하기보다는 그것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상당히 거리가 있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복음주의자적 입장에서는 어거스틴의 입장이 성경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입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어거스틴의 입장만큼 성경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신정론에 대해 정리해 보자.
어거스틴은 악의 기원을 피조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오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악을 혐오하면서도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필요악으로서 당분간 허용하시겠다는 결정에 따른 것이다.
그런 결정이 악한 것이 될 수 없음은 그 결정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여전히 선하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악을 완전히 정복하고 장차 악에 대해 영원한 심판을 내릴 것임을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더라도 성령님을 통해 넉넉히 이 과정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게 돕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나 거룩하심은 전혀 손상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야말로 항상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 일에 집중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