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국 일변도의 국제 금융․통화 체제를 채권─채무국 쌍방향 시스템으로 바꾸자는 기치 하에 발족한 대구라운드 2차 대회가 지난 12월 초 열렸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IMF 사태 이후 구조조정과 시민운동의 세계화 노선을 도마에 올렸으나 적지 않은 입장 차이를 나타내는 등 한국 반세계화 운동의 현 단계를 반영했다. (이종태 기자 jtlee@digitalm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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ꡒ내 옆자리의 시사평론가 정태인씨가 돈 1만원을 제게 빌려갔는데 안 갚는다고 쳐요. 그럼 누가 나쁜 놈이죠?ꡓ >> 송기도 전북대 교수
ꡒ정태인씨죠.ꡓ >> 청중들
ꡒ이번엔 제가 정씨에게 1억원을 빌려줬는데 못 받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누가 나쁜 놈입니까?ꡓ >> 송기도
ꡒ그야, 송 선생님이죠.ꡓ >> 정태인, 웃으며…
ꡒ그렇죠. 제가 나쁜 놈이죠. 정씨는 경제학자로서 큰돈을 벌기는 틀렸고 방송국 나가서 시사 프로그램 진행하는 것이 고작인데, 그리고 그런 사정을 제가 뻔히 아는데, 뭘 믿고 거금을 빌려줍니까. 당연히 제가 나쁜 놈입니다.ꡓ >> 송기도
원칙 없는 구조조정이 위기 심화시켜
12월 1일 오전 대구 경북대 본관 중앙회의실에서 열린 2000 대구라운드 대회-라운드Ⅱ ꡐIMF 위기 이후 한국 구조개혁조치 제대로 하고 있는가ꡑ 포럼. 송기도 교수와 시사평론가 정태인씨의 실랑이(?)는 인신공격이나 질 나쁜 농담이 아니라 채권국의 ꡐ도덕적 해이(moral hazard)ꡑ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었다.
중남미 전문가인 송 교수는 이 자리에서 80년대 초 중남미 외환위기와 관련, 채권국들이 ꡐ부실ꡑ 대출을 해놓고도 모든 책임을 채무국에 지운 끝에 중남미 민중들을 만성 불황, 외환위기의 반복, 끝없는 구조조정이라는 3중고에 몰아넣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ꡒIMF 구조조정의 중남미 성공사례로 불리는 멕시코, 칠레를 볼 때 동아시아판 성공사례라는 한국이 같은 전철을 밟을까 우려된다ꡓ고 말했다.
재경부 조동원 재정정책심의관은 ꡒ3년 전 IMF 사태 시기엔 국내에서는 한국경제를 낙관적으로 본 반면 해외에서는 비관적이었는데, 현재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ꡓ며 ꡐ구조조정 계속 추진론ꡑ을 피력했다가 참석자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았다.
공교롭게도(?) 조 심의관 옆 좌석엔 이용득 금융노련 위원장이 앉아 있었다.
ꡒ방향도 목표도 없는 구조조정 아니었습니까? 지난해 9월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을 만났더니 더 이상 ꡐ구조조정은 없다ꡑ 그래요. 금년 2월에도 ꡐ안 한다ꡑ더니 3월엔 다시 ꡐ한다ꡑ고 그랬거든요. 반발하니까 다시 안 한대. 그러더니 김대중 대통령이 총선 이후 현충일 식사에서 ꡐ금융 구조조정 내 손으로 한다ꡑ고 하시더군요. 글쎄, ꡐ한다ꡑ ꡐ안 한다ꡑ 말바꾸기를 몇 번이나 했어요? 지난해 대우사태 기미를 정부도 알고, 금융권도 알았던 것 아닙니까. 정부는 그러면서도 총선을 의식했던지 ꡐ구조조정을 잘 해서 경제가 살아났다ꡑ며 자화자찬에 바빴죠.ꡓ
이 위원장은 계속해서 정부를 공격했다.
ꡒ정부가 원칙이 없어요. 은행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 기업에 퍼주고 부실하다고 욕만 얻어먹지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맞춰볼까요? 올해 말까지 13조원 정도의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는데 정부는 금융권에 10조 정도를 출자하라며, 또 펀드를 만들라고 할 겁니다. 은행은 공적자금 받아 다시 펀드에 부을 거구요. 결국 은행부실은 해결이 안 되는 거죠. 이게 관치금융 아닙니까. 정부는 우리 금융시스템을 BIS니 FLC니 유럽에서는 잘 통용되지도 않는 미국식 금융 기준에 끼워맞추는 데만 여념이 없어요.ꡓ
제2 경제위기 때도 DJ만 욕먹을 것
재경부 조 심의관은 이 위원장의 독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못 상기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ꡒ관치라고 하는데, 정부는 목표를 제시하고 경영개선계획을 요구했을 뿐입니다.ꡓ
객석에 앉아 있던 금융노조원들이 폭소와 함께 야유를 보내자 이 위원장이 말을 받았다.
ꡒ금감원이 다르고 재경부가 달라요. 그리고 각 기관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은 것 같아요. 언론에서는 그 이야기들을 받아 은행들을 멋대로 짝지워 기사화하고…. 그래서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론보도에 따라 예금 이동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없어요. 국민들도 헷갈리나봐요.ꡓ
김형기 경북대 교수도 ꡒ높은 부채에 근거해 높은 성장률을 성취해온 한국형 경제체제를 뚜렷한 수익성 모델과 생산성 혁신 모델, 즉 대안 없이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바람에 구조적 위기가 재발할 수밖에 없었다ꡓ고 정부를 성토했다.
좌파 경제학자인 김성구 한신대 교수는 구조조정 3년을, 종속적 경제발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규모의 부실자본 청산비용을 민중에게 전가시키면서 독점재벌 및 초국적자본의 축적조건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정식화했다. 민중이 아니라 재벌과 ꡐ전주ꡑ 등에게 ꡐ잘못 투자한ꡑ 책임을 물어 해당 기업이나 금융기관을 공기업화해야 했다는 것이다.
다음 발언으로 미루어보면 그의 ꡐ부실기업 공기업화론ꡑ은 자본주의체제 내적인 변혁이지만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잇는 신자유주의적 개혁론과는 엄청난 차별성을 가진다.
ꡒ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김영삼 정부 시절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김영삼 노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현 경제정책이 다시 위기로 귀결된다면 IMF 사태 때와 비슷한 상황이 재현될 겁니다. 김영삼을 때리며 면죄부를 받은 경제정책 집행자들이 이번엔 김대중을 비난하면서 면죄부를 발급받는 거죠. 이런 상황에선 위기의 원인인 경제정책의 오류가 다음 정권으로 고스란히 계승될 수밖에 없습니다.ꡓ
김 교수는 또 위기와 개혁을 둘러싼 3개의 전선론이 등장하고 있다며
▲재벌에 대항하는 DJ 신자유주의와 진보진영의 연대전선
▲DJ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재벌과 진보진영의 연대전선
▲재벌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진보진영의 대항전선
을 열거했다. 그는 물론 세 번째 전선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제기한 ꡐ전선 문제ꡑ는 이날 오후에 열린 대구라운드 대회-`라운드Ⅲ ꡐ신자유주의와 시민사회단체의 대응ꡑ에서 좀더 강화된 형태로 되풀이된다.
시민단체는 초국적자본의 파트너인가?
초청 연설자 크리스토퍼 옹 UNI 아태지역 사무총장의 다음 순서인 이종회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이 발언에 나서면서 대회장 분위기는 바짝 달아올랐다. 이 사무처장은 단단히 마음을 굳히고 온 듯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참여연대), 이삼열 숭실대 교수(주빌리 2000 한국협의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옆에 앉아 있는 가운데 ꡐ시민운동이 신자유주의의 하위 파트너 노릇을 하고 있다ꡑ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따르면 초국적 자본은 제3세계에서 극단적인 민중배제적 경제시스템 개편을 추진하는 한편 이를 해당 사회 내부에서 ꡐ정당화ꡑ시켜줄 세력으로 시민운동을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 그의 주장이다.
ꡒ시민운동은 문민정부 시절부터 자본의 합리성을 강조하며 김영삼 정권의 경제개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액주주운동 등 기업지배구조 개편 움직임도 김대중 정권의 ꡐ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ꡑ과 조응하면서 주식시장 활성화 및 자본시장에 기업을 종속시키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체제로의 재편을 중심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ꡓ
이에 맞선 김동춘 교수는 참여연대의 경제개혁운동이 시장경제 원칙을 강조, 부분적으로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자본주의의 인간화 및 기업활동을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ꡒ한국경제 개혁의 과제가 ꡐ신자유주의 반대ꡑ라는 측면뿐 아니라 개발독재 시절 형성된 재벌 및 경제시스템 개혁의 과제를 모두 안고 있다고 볼 때, 시민단체의 경제개혁운동은 분명히 한국사회 변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시민운동이 신자유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주장입니다.ꡓ
이와 관련,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지구화라는 ꡐ거대 담론ꡑ에 매달리기보다 국제협약, 해외매각을 추진하는 자국 대표에게 모든 영역의 정보공유를 요구하는 한편 감시기구를 발족하는 등 ꡐ미시적ꡑ 대안이 더 요긴하다고 주장했다.
ꡒ구체적 문제엔 구체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노동운동이 힘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다국적 자본과 투기자본에 대한 대응은 소비자운동, 여성운동 등 풀뿌리 운동에 의해 추진되어야 합니다.ꡓ
이 교수의 발언은 이종회 사무처장의 입장인 ꡐ시민운동 비판론ꡑ을 역설적으로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국내외 시민운동 비판론자들은 초국적자본이 정보공개, 감시기구 발족 등 미시적인 영역에서 기꺼이 협조하는 이유가 ꡐ거시적이지만 핵심적ꡑ인 ꡐ자유시장ꡑ 문제를 돌출시키지 않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의견 대립들은 사실 지구화라는 현상을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루 전인 11월 30일 열린 대구라운드 대회-`라운드Ⅰ ꡐ세계화, 축복인가 재앙인가ꡑ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졌었다.
영원한 구조조정의 굴레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세계화를 ꡐ국민국가들이 국내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무장해제 당하고 국제자본의 활동에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앞다퉈 경쟁하는 시대ꡑ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한국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나?
ꡒ국민경제의 기본적 자율성을 잃고 미국과 국제 금융자본의 일거수일투족에 울고 웃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대내적으로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노동기본권이 심각하게 위축된 20 대 80의 사회, 사회적 통합성을 잃은 ꡐ두 국민의 사회ꡑ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기준과 한국경제 시스템의 부조응은 반영구적으로 국제금융자본에 트집거리를 제공해 한국은 영원한 구조조정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릅니다.ꡓ
그러나 박세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세계화에 관한 한 이 교수와 완전히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ꡒ세계화엔 인류의 보편적 발전이라는 측면이 있으며, 무엇보다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계화를 받아들이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어떤 세계화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세계화에서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부정적 측면을 구별할 수도 있지 않나요?ꡓ
이병천 교수는 매섭게 반박했다.
ꡒ노예가 비극적인 이유는 물론 노예이기 때문이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특징은 ꡐ자본이 국민경제를 해체하며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시기ꡑ라는 것입니다. 박 선생님처럼 ꡐ문제가 있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다ꡑ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찾는 태도가 필요합니다.ꡓ
지난해 말 발족한 대구라운드 대회는 당시까지 국내에서 열렸던 반세계화 관련 행사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대구라운드가 한반도 역사상 외채문제에 대한 최초 대응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을 전범으로 삼고 있으며,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국제적 금융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로 나섰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대구라운드가 이번 대회처럼 세계화 관련 노선들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장소로만 활용된다면 지난 1년여 간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국 반세계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ꡐ정체성의 위기ꡑ를 맞지 않을 수 있을까.
대구라운드 대회가 진행된 경북대 본관 2층에서는 이 학교 직원들이 ꡐ구조조정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반대한다ꡑ며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 노동자들은 이미 신자유주의를 구조조정, 즉 정리해고와 직관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노동자들 속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실체를 구체적 언어로 폭로하고 과감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국채보상운동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대구라운드의 정당한 임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