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밤은 달랐다/박석원
통영 미륵산의 곤돌라는 우리를 정상까지 데려다 주지는 않았다. 수려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을 한 눈에 조망하려면 정상을 향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수행자처럼 한 발짝 한 발짝 나무 계단을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남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연일 계속되는 폭염을 잠재우듯 살랑살랑 얼굴을 스친다. 크고 작은 섬과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나그네를 맞는다. 눈 아래 잡힐 듯이 보이는 한산섬. 그 섬과 앞바다를 바라보며 1592년 7월의 이 바다를 생각해 본다. “한산대첩 자리가 어디여?” 한 여행객이 동료에게 묻는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장水軍將 와키자카에게 일본 수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서해로 가는 바닷길을 열도록 명령했다. 와키자카는 견내량(거제시 사등면)에 73척의 전선을 모아 출정 태세를 갖추었다.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천여 명의 병사로 우리의 5만 병력을 혼비백산하게 한 그는 오만한 마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승전보를 올릴 날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첩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합류하여 한산대첩 사흘 전인 7월 5일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으로 여수 본영 앞바다에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날에는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합세하고 7월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정황을 살폈다.
일본 수군이 주둔하고 있는 견내량은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우리의 판옥전선板屋戰船이 싸우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5척의 전선을 띄워 한산도 앞의 너른 바다로 적선敵船을 유인했다.
용인전투의 싱거운 승리로 조선군을 얕잡아본 와키자카는 싸우는 척하다 도망치는 조선수군을 추격해 왔다. “조선이노 병사 무서울 것 없다.”하면서 파리채로 파리 잡듯 일격에 조선 수군을 깨부술 요량으로 뒤쫓아 왔을 것이다. 이윽고 적선이 한산섬의 너른 앞 바다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이 누구의 지휘 아래 있었던가. 한산섬에 매복해 있던 우리의 수군 전선은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익진鶴翼陣을 펼쳐라.” 이순신의 준엄한 한 마디에 우리의 수군은 오뉴월 염천에 부채를 펼치듯, 갑작스런 소낙비에 우산을 펼쳐들듯 학 날개 모양의 진陣을 일시에 펼쳐 적선을 포위했다. 독안에 든 쥐 꼴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사방에서 쏘아대는 우리 수군의 집중 포화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학익진 속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독전督戰하던 와키자카는 패잔선敗殘船 14척을 이끌고 꼬리 잘린 도마뱀 풀숲으로 도망치듯 내빼기에 바빴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륙병진정책을 포기하고 해전금지 명령까지 내리게 한 저 바다의 승리가 없었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산섬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으니 나라의 운명이 저 한 바다에서 갈라졌다는 생각에 일렁이는 바다의 잔물결조차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저 바다는 아직도 천지를 뒤흔든 그날의 화포 소리와 우리 수군의 승리의 함성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산을 내려와 싱싱한 해산물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다들 길게 눕는다. 미륵산 등반에 힘이 든 것일까. 젊어서는 노래방이 필수 코스이더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밤이다. 여행의 첫째 날 밤은 그렇게 펜션의 에어컨 바람 속에서 저물어갔다.
젊은 시절 만난 우리들의 부부동반 여행 역사는 40년을 넘는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다섯 쌍의 부부는 어린애들을 안고 업고 무거운 텐트와 먹을거리를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계곡을 찾아 다녔었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아이들은 성년이 되었고 우린 이제 경로우대를 받는 나이가 되었다.
둘째 날은 거제도에서 하루를 묵었다. 몸이 늙었다고 마음까지 늙을 수는 없는 법. 저녁을 먹은 후 심기일전하여 부른 배를 이끌고 노래방에 갔다. 곰팡이 냄새가 퀴퀴한 지하노래방. 하지만 여름 불볕에 시든 호박잎이 한 줄기 소나기에 생기를 되찾듯 흥겨운 노랫가락에 젊음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활기가 넘쳤다.
한 사모님이 아직 식지 않은 소녀적 감성으로 이정옥의 ‘숨어 우는 바람 소리’를 부른다. “둘이서 걷던 갈대밭길에/달은 지고 있는데…… 쓸쓸한 갈대숲에/숨어 우는 바람 소리.” 발라드풍의 물 흐르듯 고운 가락과 애절한 가사가 가슴을 적신다. 당시 이 노래를 즐겨 불렀던 여인들도 이제는 손주들을 돌보는 할머니가 되었으리라.
잘 부르면 좋고 못해도 괜찮은 자리다. 그저 흥겹게 부르면 그만. 트로트 가락이 쿵짝쿵짝 흐른다. 최유나의 ‘별난 사람’이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안아보고 싶다고/쉽게 말해주면 될 것을/오늘도 지나쳐가시렵니까/내 마음 변하면 어쩌시려고/당신 정말 별난 사람” 애원인지 협박인지 가사가 재미있다. 웃음소리가 노래방에 가득하다. 화면 상단에는 부를 노래의 예약번호가 줄줄이 뜬다. 바야흐로 노래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하나 되어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시간이 다 되어가자 아쉬움이 남는지 주인에게 서비스 시간까지 받아내어 합창을 한다. “묻지 마세요 물어보지 마세요/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나이가 문제인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던가.
유대교 랍비이자 시인인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고 하였다. ‘세월은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고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둘째 날 밤은 달랐다. 눈가에 잔주름이 늘고, 쳐진 어깨에 느려진 몸짓일지라도 마음만큼은 아직 사위지 않은 불꽃의 열기로 열대야의 더운 밤을 녹이고도 남았다. 가는 세월 붙잡을 수는 없지만 젊음의 의지만 있다면 늙음이 대수인가. 아직도 우리는 청춘인 것을.
주인아주머니의 배웅을 뒤로하고 노래방을 나섰다. 밤바다의 비릿한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숙소에 돌아오니 창 너머로 보이는 ‘바람의 언덕’ 풍차가 살랑거리는 바닷바람과 함께 졸음에 겨운 듯 느린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참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