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세력보다 사회 중시… 에도 내준 가쓰의 ‘질서 있는 퇴각’
가쓰 가이슈(1823∼1899년)의 얼굴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 한국 독자들에게 좀 낯선 이름이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孫正義) 회장이 존경했다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막부의 가신으로 메이지 유신군이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江戶·지금의 도쿄)까지 쳐들어왔을 때 막부 측 총사령관이었다. 말하자면 역사의 패배자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멋있고, 의미를 남긴 패배자를 알지 못한다. 오늘은 ‘멋진 패배자’의 얘기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정치적 후각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막부에 반란을 일으켰던 조슈번(長州藩) 정벌에 실패하자, 권력을 유지할 길은 막부를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스스로 270년간 계속되던 막부를 폐지하고 자신도 쇼군 자리에서 내려왔다. 막부를 지탄하던 여론이 순식간에 바뀌어 그의 용단을 지지했다. 그가 노린 대로였다. 요시노부의 노림수는 지지 여론을 모아 천황 밑에 신정부를 세우고 그 실권자가 되려는 것이었다. 막부의 무력타도를 계획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당황했고, 그 반전을 꾀한 것이 왕정복고 쿠데타다.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역적이다.’ 쿠데타로 천황을 손아귀에 넣은 그들은 하루아침에 ‘관군’이 되어 ‘역적’ 도쿠가와 세력을 치러 에도로 행군했다. 그들을 막아선 사람이 갑자기 막부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가쓰 가이슈다.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 덕에 승진을 거듭했지만, 막부 주류 세력을 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막부의 여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막부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의미 있게 ‘마무리’해야 할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김광진 ‘편지’). 권력에 대한 미련은 연인보다 더 질긴 법이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러나 그걸 통찰하는 사람은 드물거니와, 통찰했다 해도 미련을 끊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진영 뛰어넘은 두 호걸의 만남
막부 주류 세력들은 그의 노선을 경멸하고 한직으로 내쳤다. 좌절하지 않고 해군 건설에 뛰어들었다. 자기를 내쳤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작은 해군조련소 설립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머지않아 막부도 번(藩·봉건국가)도 없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야 할 터인데, 그 일본을 지켜주는 것은 해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함께 일했던 사람이 사카모토 료마다. 젊은 료마는 누나에게 “요즘은 천하에 둘도 없는 군학자(軍學者) 가쓰 린타로(가쓰 가이슈)라는 대선생님의 문인이 되어 굉장히 귀여움을 받고 있어. (중략) 가까운 장래에 오사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해군을 가르칠 곳을 설립하고, 80m, 90m 정도 되는 배를 만들 거야. 제자들도 400∼500명 정도 각지로부터 모여들고 있어”라고 하며 신나했다. 그러나 집권자들은 이를 지원하지 않았다.
가쓰는 반막부세력의 중심인 사쓰마번의 리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도 친교를 맺었다. 1864년 사이고를 만나 막부독재를 허물고 웅번(雄藩·큰 봉건국가들) 연합정권이 세워져야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놀란 것은 사이고였다. 그는 이를 ‘공화정치’라 명명했다. “(가쓰는) 실로 놀라운 인물로, 두들겨 패줄 심산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만큼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문과 견식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 시기 최고의 양학자)이 발군이지만, 실제 일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가쓰 선생이 최고다. 정말 반해 버렸다”고 토로했다. 반하기는 가쓰도 마찬가지. “그(사이고)를 만나 봤더니 식견과 논리 면에서는 내가 오히려 더 나았지만, 이른바 천하대사를 짊어지는 것은 결국 사이고가 아닐까.”
가쓰 가이슈와 관군 총사령관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틀간 협상을 벌였다. 가쓰는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를 관군에 내어준다. 당시 협상을 그린 삽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진영을 뛰어넘은 두 호걸의 만남은 몇 년 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관군’이 에도성 총공격을 앞두고 있을 때, 얄궂게도(다행히도?) 양군을 지휘하고 있던 것은 두 사람이었다. ‘공화정치’에 뜻을 같이했던 사람이 싸울 일은 없었다. 에도성 외곽에서 단둘이 이틀 동안 회담했다. 둘은 외세침입을 목전에 둔 마당에 오직 ‘일본’이라는 국가만을 생각하자고 했다. 사이고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가쓰는 예상치 못한 양보안을 내놓았다. 사이고는 점령군이었지만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사이고는 나에 대해 막부중신의 예우를 잃지 않았다. 담판할 때 시종 자세를 바로 하고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조금도 승리한 위광으로 패장을 경멸하는 듯한 모습은 없었다.” 이 담판 없이 총공격이 이뤄졌다면 100만 명의 에도 시민은 참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군 간에 벌어졌을 처절한 전투는 두고두고 깊은 원한과 분열을 초래했을 것이다.
끝까지 ‘패자의 품격’을 지킨 가쓰
천황을 등에 업은 관군이 에도를 함락하기 위해 진군하는 과정에서 도쿠가와 막부와 벌인 고슈·가쓰누마 전투(1868년)를 그린 삽화. 이 전쟁의 패배로 막부는 더욱 수세에 몰렸고, 당시 막부군 총사령관이었던 가쓰 가이슈는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에도를 점령한 사이고는 잠시 교토로 떠나게 되자 “어떠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의 일은 가쓰 선생께서 어떻게든 해주시겠지요”라며 치안 책임을 가쓰에게 맡겨 버렸다. (이상 직접 인용은 졸저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승자는 승자다운 품격이 있어야 한다. 조그만 승리에 우쭐해서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자들에게 승복할 패자는 없다.
가쓰는 패자의 품격을 지켰다. 회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막부군을 끝까지 설득했고, 막부 가신들을 이끌고 도쿠가와 세력의 본거지 시즈오카로 선선히 물러났다. 막부 가신들은 그를 사쓰마, 조슈와 타협해서 막부를 팔아먹은 자라고 매도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거듭된 입각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남은 생애 동안 그가 한 일은 주군을 잃고 가록(家祿)을 잃어, 명예도 생계도 막막해진 막부 가신들과 그 식솔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한 사회의 변혁 과정에서는 승리한 세력의 행태도 중요하지만, 패자의 ‘패배하는 방식’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때가 많다. 대세를 읽지 못하고 무모한 집착을 부리면, 무고한 인명은 손상되고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게 커진다. 물러나면서 행한 총질로 폐허가 되면 사회 재건은 그만큼 어렵다. 자기 세력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존망을 염두에 두고, 미련을 끊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가쓰 가이슈가 이끈 ‘질서 있는 퇴각’이 일본을 살렸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