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바보같은 생각이야.
누군가 도와줄것 같아?
18
예감했듯, 파도가 높이 일렁였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은 입고 있는 옷가지와 넉넉지 않은 현금. 초라해보이는
자신을 다독이며 몸은 풍요로웠으나 마음으론 늘 피로했던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노라 맹세했다. 술을 마신것도
아닌데 비틀거리는 몸, 흔들흔들 춤추는 걸음으로 걸어가다 털썩 주저 앉았다. 눈물이 도저히 멈추지 않았다.
돌아갈곳도 없고, 가진것도 없고, 자신의 편도 없다.
**
"머스마. 어데 가노."
"담배 사러."
"작작좀 피라 안카나."
뽀글머리에 촌스런 외향새. 어딜 가든 흔하게 있는 중년의 여성. 바닷일을 하고 왔는지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있었고,
바구니엔 붉은 빛의 멍게와 조개가 가득히 쌓여 있다. 잠시동안 해산물을 들여다 보던 사내. 돗대를 뻑뻑 피워대는 사내에게
여자는 정감있고 진심어린 걱정을 건네었다. 이 동네는 거기서 거기다. 옆집을 포함해 건너의 건넛집까지 친인척보다 가까운
사이고 먹거리를 주고받는등 메마른 수도권의 영향에서 완전히 빗겨가 아직까지 정이 넘쳤다. 사내는 동네의 자랑거리였다.
촌동네엔 어울리지 않게 홍콩배우처럼 큼직한 이목구비가 첫 번째 이유고 서글서글한 성격이 두 번째 이유였다. 여자는 아들같이
예뻐하는 사내에게 걱정어린 말을 해도 그는 아랑곳 않았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청년을 보고 다시 한번 타박했다. 그러나 사내는
듣는둥 마는둥 귀를 후볐다. 중년의 여자가 사내의 널따란 등짝을 짝소리나게 쳤다. 사내가 엄살을 떨었다.
"이모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데."
"저짝에 사람 앉아 있는거 같아가 보고 있었다 아이가. 저짝 봐봐라. 사람 맞제?"
"그렇네."
"호우 주의보 떨어진거 모르나. 와 방파제에 저러고 있노."
"내가 가볼게."
"조심 하그라잉! 아따 자슥! 담배 좀 작작 피고!"
사내는 하얀 이를 들어내고 웃었다. 남자답게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티없이 맑아 보이는 웃음이 보는 사람마저 따라 웃게
만들었다. 사내는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뒤를 보지 않고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여자는 흐뭇하게 사내의 뒷모습을 보더니
바구니를 고쳐 쥐고 종종 걸음을 쳤다.
사내가 방파제 옆에 세워 높은 고급 외제차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집 한 채는 거뜬히 사고도 남을 최고급 승용차. 수리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깨질것 같은 차다. 직업의 특성상 차부터 눈길이 가는건 누가 뭐라해도 어쩔수 없었다. 직업병. 딱 그말에 해당
된다. 사내는 혀를 차고서 검은색 카디건에 편한 면바지에 운동화차림의 여자를 보았다. 단정하면서도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나
언뜻 봐도 일반 면과는 재질이 틀리다.
인기척도 못느끼고 앉아서 바다를 보기만 하는 그녀. 청승맞고 처량맞은 짓이다. 호우주의보가 떨어진 바다 촌동네에 죽을상을
하고 바다 앞에 앉아 있다면 연상되는것은… 극단적인 결론으로 떨어졌다.
"죽기라도 할겁니까?"
"-?"
"그런거 아니면 떨어지시죠. 이런 날씨에 방파제 주위에 어슬렁거리다간 파도에 휩쓸려 버려요."
사내의 말투는 사투리가 아니었다. 정확한 표준말. 따지고 보면 생긴것도 수려하니 이곳 지방 사람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광
온 분위기도 풍기지 않았다. 나연도 관광객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여행가방은 커녕 작은 짐가방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사진기나 궂은 날씨가 달갑다는 눈치까지 보였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작업복 전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검은색의 기름때. 어디서 미세하게 기름 냄새가 난다 싶더니, 그게 사내의 옷에서 나는 것이었다. 나연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막상 가려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민박집은 직진해서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있…"
"여기에 떨어지면 죽나요?"
옆모습만 보이던 나연이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몸을 돌리자 사내는 정확히 나연의 얼굴을 볼수 있었다.
사내는 돗대를 땅에 떨어뜨렸다.
"…당신…"
"지금 바다에 뛰어들면 해일에 떠밀려가서 시체도 못찾겠죠?"
"자살…할 생각입니까."
나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눈을 주시하더니 풋- 하고 웃었다. 사내는 처음보는 사람의 해괴망측함에도 진지하게 대꾸해
우스꽝스러웠다. 그냥 물어본거였다. 여기서 죽어버리면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화풀이의 상대가 잘못되도 한참잘못되었지만
이렇게 어이없다는듯 반응해주는 사내를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연이 웃었는데도 사내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농담이에요."
"뭣 때문에 죽고 싶은 건데?"
"?!"
갑작스런 반말에 놀랄새도 없이 억센 아귀힘으로 나연의 손목을 낚아채었다. 저릿할정도로 세게 잡아 아! 하고 나연이
소리질렀는데 사내는 더 꽉 쥐었다. 궂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책망하는 눈치였다. 그의 눈은 불이라도 나는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타올랐다. 이 정도면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집어 먹고 플러스, 무례한 정도다.
「죽음」에 대해 언제나 진지했던건지, 「죽음」을 쉽게 여긴듯한 상대에게 화가 난건지. 아무래도 후자쪽인가.
"아파…ㅅ-!"
"나는 너같은게 제일 싫어. 남겨질 사람들은 생각도 안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
"이거 놔요!!"
"놓으면. 저기로 뛰어들게?"
"!!"
"물에 빠져 죽는것만큼 고통스러운것도 없지. 그만큼 제일 확실한것도 없으니까 탁월한 선택이군.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만큼 탱탱 붓고 부패했을때 냄새도 심하고 어류에 뜯겨서 살이 온전할지…"
"그만!"
나연은 고막을 뜯고 싶었다. 남자는 나연을 놀리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나연을 보고 사내는 비웃었다.
고작 이정도에 질색팔색하면서 죽니마니 시덥잖은 소릴 한거야?
사내의 비웃음에도 나연은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할수 없었다. 진심반 농담반이었지만 그를 우롱한건 사실. 그에 대한 댓가.
그렇다면 서로가 똑같은 셈이다. 그리고나서도 사내는 얼마간 나연을 노려보더니 손을 홱 던져 버렸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시뻘겋게 손자국이 나있다. 사내는 성이 나있었다. 시큰한 손목에 나연도 반박할수 있었지만 아직 성을 내는 사내를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준호가 그렇게 많은 돈다발을 쥐어준건 아니다. 그는 당연히 나연을 수도로 올라오게 할 작정으로 행동했기에 아주 조금의 현금.
택시를 타고 기차역까지 갈수 있을만큼의 현금을 쥐어준것 외에 비상금을 합한 금액이었다. 이 돈으로 몇일의 숙박은 가능하겠지만
장기적인 투숙은 불가능했다. 나연은 곤란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저 차를 팔수도 없고.
사내는 아직까지 똥씹은 표정이다. 작업복을 한번 탁탁 털더니 주머니에 손을 깊게 찔러 넣고 왔던 길을 그대로 터벅터벅 걸었다.
나연은 쪼르르 그에게 달려가 옷깃을 쥐었다.
사내가 뭐냐는듯 성난 얼굴로 되돌아 봤다.
"저기…"
"뭐!"
"이름이 뭐에요."
"알아서 뭐하게."
"가르쳐 주세요!"
"김경호."
"저, 저는 김나연이라고 해요."
남자는 그래서? 라는듯 교만하게 쳐다 보는 바람에 움찔했지만 굴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저 좀 데리고 가 주세요!"
너 미쳤어?
나연은 그가 이렇게 말할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의외로 호탕하게 웃었다. 무슨뜻인지 아냐고 묻길래 나연은 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따라 오라 말했다.
경호는 따로 집이 없었다. 그것은 흔히들 사는 전셋집도 월셋집도 아니었다. 일터에 딸린 1.5평의 좁아터진 방에서 살았다.
남자 혼자라 그렇게 많은 짐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방이 좁은터라 최소화한 짐꾸러미만 놓여 있었다. 소형냉장고와 공간박스에
담긴 책 두세권과, 남성용 스킨과 로션등등 변변찮은 살림을 겨우겨우 보태었다. 벽지는 찢기면 다시 부치고를 반복해 덕지덕지
지저분했다. 그것말고는 남자혼자 사는집 살고 괜찮은 편에 속했다. 청소는 말끔히 끝내졌고, 특유의 노리짱한 홀애비냄새도 나
지 않았다.(담배냄새와 기름냄새가 뒤섞여 나긴 했지만) 솔직히 처음이었다. 사내의 방이란 이런거구나… 뭐가 그렇게 재미난지
박물관 온것처럼 구경을 해대는 나연에게 윽박질렀다.
"너 당돌한거야, 어리석은거야."
"?"
"여자 혼자, 그것도 처음보는 남자를 따라온다는거."
"읏!"
정곡을 찔린 나연은 얼굴을 붉그러뜨렸다. 경호는 의외의 반응에 재밌었는지 킥킥하고 웃었다. 남자가 빈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아까 담배가게에서 사온 담배 한 개피를 꺼내물고 불을 부쳤다. 나연은 그게 맘에 들었다. 남자의 배려 없는건 그만큼 가식이 없
다는거니까. 거짓말을 못할것 같은 사내다.
"가출한거냐?"
가출한거라고? 가출이라. 목소리 톤 억양 이상하게 와닿았다. 부모님 속 썩이는꼴 없이 청소년기에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일탈
을 꿈꾸던 그녀에게 이런식으로 가출이란 단어가 써먹힐줄 몰랐다. 왠지 재밌어져서 그렇다고 하자 사내는 말한다.
솔직해서 좋다고.
댁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네요.
"마음 정리되는데로 돌아가. 동네가 좁아서 소문이 금방 퍼지거든."
"싫어요! 거긴 절대로 안돌아갈꺼에요."
"난 너랑 오래 있고 싶은 생각 전혀 없다고."
"부탁드려요!"
"…"
"시키는거라면 뭐든 다할께요.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저 다 잘해요."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경호에겐 귀찮은 덤이 늘어나긴 했지만 잡다한 집안일을 해준다는데 별로 불편할건 없을것 같았다.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세상 가족 전부인 하나뿐인 오누이와 너무 닮았다. 요목조목 따지고 보면 그렇게 닮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이 시작이 얼마만큼의 고통과 얼마만큼의 치욕과 얼마만큼의 굴욕과 얼마만큼의 불행으로 치닫을
지는.
아무도, 그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이번편은 게으름 부린 제가 최대의 한계치로 용량을 넓혔답니다 ;
5시전으로 가상이미지를 올릴거랍니다. 가상이미지방에 가셔서 가상으로라도 승민의 모습 나연의 모습을 확인해주셔요/
여러분의 댓글!
저에게 힘이 되나니! 타자수는 늘어날지어다! (잉?)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개미지옥 18
브로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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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216
08.08.21 13:17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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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기다린보람이잇어요 ㅠㅠ너무재밋어요~
감사감사! 새로운 인물 등장시켰으니까 앞으로도 부탁드려요, 후훗!
와!! 오늘 올라올줄 몰랐는데 올라와서 재밌게 읽고 가요 그나저나 새로운 남자가 등장..ㅋㅋㅋ 경호..왠지 제 맘에 드는데요..특히.. 잘 그을린 피부ㅋㅋㅋㅋ 암튼 19편도 기다릴께요!!
급지었답니다. 이름도 이미지도 ; 가상/표지방에서 확인해주세요 길모어걸스님이 생각하신 이미지랑 맞는지 아닌지. 아니라면...흠흠
저 배고파요....;;;; 잘읽었어요...ㅋㅋ 머 다들 이제 학교다니실텐데..ㅋㅋㅋ
그렇죠 ㅜ 그래도 죄송스러워서 ; 언제나 챙겨주시는 댓글 잘먹고 있습니다 /
오타잇는거같아요- 바구리를 고쳐 쥐고 종종 걸음을 쳤다. 바구니가 오타네요. 가상보러가야겠어요! 승민이가제일기대되는데요?
센스쟁이! 저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퍽)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ㅜ
새로운인물도 맘에드는걸요?ㅋㅋㅋ 그래두 승민만큼은 아니죠뭐..아승민의반응이 젤 기대되요!ㅋㅋㅋ
너, 너무 기대하시면 쿨럭- 머리 쥐어박다 보면 인연님이 원하는글 만들수 있겠죠? 훗훗훗!
승민이 반응 너무 기대되요!!! 빨랑빨랑 승민이 장면으로 넘겨줘요!!!!
너무 재밌어요 ><!!!!!!!!!!!!!!!!!!!!!!!!!!!!!!!!!!!!!!!!!!!!!!!!!!!!!!!!
앙가가가가ㅏ아가ㅏㅏ아가각!잘봤어요 항상기다리고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돌아오세요!!!!!!!!!!!!!!!!!!!!!!!!!!!!!!!!!!
돌아오세요 ㅠㅠ
꺄진짜 재밋당 ㅠㅠ
경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재밋어요
어후, 경호도 승민이한테 쥐어 터질듯.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