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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 형성의 근원이 되었으며 모세의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적인 공동체로서 출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썼다. 물론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 A.D. 1세기 예수 당대의 유대인과 유대교(Judaism)의 근원을 이스라엘 민족의 근원과 일치시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A.D. 1세기 유대인들은 대부분 아브라함을 그들의 민족적, 신앙적 아버지로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민족적 번성과 약속의 땅의 성취를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할례를 그들의 신분의 결정적인 표지로 삼았으며, 모세의 출애굽 사건을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모형으로 생각했다. 또한 모세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인 토라를 선택받은 백성의 근거이자 거룩한 삶을 유지하는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대 역사가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예수 당대의 팔레스타인 유대 민족과 유대교의 기원을,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구분해, B.C. 6세기에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은 본래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유래된 열두 지파로 형성되었으나, 솔로몬 왕 사후에 남북으로 나뉘어졌다가,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아수르 제국에 의해, 남 유다는 B.C. 587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각각 멸망함으로써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사실상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종교적 관점에서 유대교의 근원은 출애굽 사건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간주되는 A.D. 6세기 초엽의 바벨론으로부터 유대인들의 귀환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 같다. A.D. 587년에 남쪽의 유대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주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일부는 이집트로 피신했으며, 서민 대중인 ‘그 땅의 사람들’(암 하아렛츠)은 팔레스타인 땅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지도자 없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민족적, 종교적인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곧 주위의 여러 민족들과 혼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색을 점차 잃어버렸고,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회복하겠다는 꿈도 지니지 못했다. 반면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포로기 동안 저들의 포로 생활이 바로 자신들의 선조와 자신들의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새롭게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언젠가는 시온의 고국 땅에 돌아가서 파괴당한 성전을 새로 짓고,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회복하려는 꿈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B.C. 538년 고레스 왕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을 그들의 고국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주었는데 그 귀환은 몇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이 바벨론 귀환과 귀환자들의 정착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예수아, 스룹바벨,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였다. 예수아와 스룹바벨은 첫 번째 귀환자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해 B.C. 515년에 솔로몬 성전 파괴 이후 처음으로 성전을 재건했으며, 에스라와 느혜미야는 두 번째 귀환자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해 귀환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했다.
이 귀환자들은 고국 땅에 돌아왔을 때 자신들만이 참된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들로, 즉 선지자들이 말한 ‘그 남아있는 자들’로 생각했다. 반면에 그들은 ‘그 땅의 사람들’을 불결한 자로, 혼합종교주의자들로 규정하고, 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귀환자들의 종교적, 민족적인 배타성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유대 민족 공동체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대가 멸망한 후 본토에 흩어져 살고 있던 그 땅의 거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일찍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옴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귀환자들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 에스라는 귀환자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이제 오직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귀환자들의 영적, 종교적인 개혁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세계 역사에 있어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전 민족적으로 율법을 배우고 생활화하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사에 야훼 하나님 신앙을 확고하게 뿌리 내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느헤미야는 귀환자들이 그 땅의 사람들이나 외국인들과 결혼해 순수한 유대 민족의 혈통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민족적, 사회적 개혁을 주도해 유대인 단일 민족의 뿌리를 내리게 했으며, 한편으로는 성전 제사제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제도화해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인 민족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게 했다. 바로 이와 같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적, 민족적, 사회적 개혁운동을 통해서, 성전과 율법과 혈통과 땅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이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유대교가 유대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유대 민족과 종교역사에 있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유대 민족과 유대교의 창시자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대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종교나 철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유대교는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에 의해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이요, 신앙과 삶의 길이요, 이방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고 지키는 시금석이요, 자기 표현이요,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의 표지였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후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유대교를 분리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민족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유대교를 떠나는 것이요, 유대교를 떠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유대교에 가입하는 것은 바로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아에 의해 유대교의 뿌리가 내려졌다고 해서 그들 이후의 유대교 역사가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에스라, 느헤미야 이후 예수와 바울 시대까지 약 5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역사는 여러 가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투쟁, 갈등, 타협, 불안, 좌절, 기대 등으로 점철되었다. 사실상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민족의 선구자들은 파괴된 솔로몬의 성전을 새로 짓고(B.C. 515), 잊혔던 모세의 율법을 회복시키고, 그 땅의 백성들과의 혼혈 결혼을 금지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동질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찬란했던 다윗 왕국을 재건하려는 강한 기대를 품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수백 년에 걸쳐서 계속 주위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경제적인 지배와 간섭과 영향을 받아야 했다. 즉 귀환자들이 세운 유대인 공동체는 약 20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했고(B.C. 538-332), B.C. 332년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 군대에 의해 멸망하면서부터는 약 200년 동안 헬라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B.C. 332-167). 이스라엘은 B.C. 301년부터 198년까지는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이집트 제국의 통치자가 된 Ptolemy 왕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B.C. 198-167년까지는 시리아 지역의 통치자인 Seleucids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이 유대인 공동체는 약 100년 동안 헬라 제국 세력과 싸워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운 마카비 형제들과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 부분적인 독립 국가 형태를 유지했으나, B.C. 63년부터 다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와해되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 A.D. 70년까지 또다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은 격변기를 겪어오면서 유대인들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표지인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서, 특별히 헬라 문화(Hellenism)로부터 유대교의 핵심인 성전과 토라(율법)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과 타협과 투쟁 가운데서 A.D. 1세기 유대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상과 종파와 운동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 70년 이후의 유대교는 바리새파 중심의 획일적이고 표준적인 유대교(Rabbinic Judaism)로 재형성되었으나, A.D. 70년 이전의 예수 당대의 팔레스타인 유대교(Palestinian Judaism)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 헤롯파, 열심당 등 여러 가지 종파와 운동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그만큼 대단히 다이내믹하고 다원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유대교의 핵심을 이루는 유일신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후손들이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게 되리라는 것,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 할례가 언약된 백성의 신분상의 표지로 주어졌다는 것,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과 거룩한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제도가 주어졌다는 것, 제사 제도의 유지를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세계의 정치, 문화의 영향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직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야훼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인 회복과 언약의 성취를 위해 메시야가 나타나리라는 것 등에 대해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교는 각 종파와 운동의 성격에 따라 유대교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이런 요소들에 대한 강조점과 적용에 있어서는 서로간에 적지 않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 당대의 바리새파(The Pharisees)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특징과 주된 강조점을 율법에 두고 있다. 주로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이나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서 소외된 저급의 제사장들과 율법을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이 바리새파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바리새파가 B.C. 160년경 마카비 형제들이 헬라 제국으로부터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인 독립 운동을 주도할 때 이 마카비 가문을 열렬히 지지하고 후원했던 ‘하쉬딤’(하쉬딤은 헬라 제국이 유대를 정복해 종교적, 문화적으로 헬라화하려 할 때 헬라 제국에 야합하는 유대인들에 맞서서 유대교의 뿌리인 율법과 성전제사를 고수하는 운동을 일으킨 경건한 무리들을 지칭)의 후예들이었다.
바리새파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이방 문화인 헬레니즘에 대항하여 유대교의 정신과 생활을 지키려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점은 ‘바리새’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분리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파루쉼’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과, 마카비 형제들이 헬라 제국 세력을 축출한 후 헬라 제국의 통치를 모방하여 왕권(정치, 군사권)은 물론 대제사장직까지 계승하려고 할 때, 자신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대제사장 사독 가문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 사독 가문인 마카비 형제들의 대제사장 계승을 지지했던 사두개파와는 대조적으로, 율법의 정신과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비 대제사장 계열인 마카비 형제들의 대제사장직 계승을 단호하게 반대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리새파를 열렬히 지지한 살로메의 집권 기간 중에는(B.C. 76-67) 바리새파가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B.C. 37년 혈통적으로 본래 이두메 족속으로 있다가 유대인으로 귀화한 헤롯이 로마 제국의 힘을 빌어 하스모니안 왕가를 축출하고 새로운 헤롯 왕가를 세워 유대를 통치하면서부터 바리새파는 로마 제국이나 헤롯 왕가를 지지하는 것을 포기하는 등 정치적인 간여를 배제했다. 그 대신 바리새파는, 랍비 힐렐과 샴마이의 영향 아래 율법을 전 유대인들의 모든 의식과 삶의 영역에까지 확대시키려고 힘쓰는 종교, 사회적인 운동으로 변모했다.
바리새파가 율법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랍비들의 전승들을 모든 유대인들에게 확산시키려고 힘썼으며, 사두개파와는 달리 대중적인 신앙인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와 메시야의 도래를 신봉했으며, 하나님의 전능성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으며, A.D. 3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에 서서히 대두하기 시작한 유대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간여했으며, 그리고 A.D. 60년대부터는 열심당과 힘을 합쳐 유대 독립 전쟁에 앞장섰다.
사두개(Sadducee)라는 말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을 계승하고자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대제사장 사독 가문의 후손들은 에스라와 느혜미야시대 이후부터 대대로 대제사장직을 계승하면서 사실상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어 왔다. 그러다가 마카비 형제들이 헬라 제국으로부터 유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여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우자마자 본래 사독 계열만이 계승할 수 있는 대제사장을 계승하려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 사독의 후예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한 부류는 하스모니안 왕가와 타협해 대제사장직을 양보하고 그 대신 성전 유지 및 제사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이었고, 한 부류는 끝까지 하스모니안 왕가와의 타협을 거부하다가 핍박을 피해 지지자들과 함께 쿰란 지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이집트로 이주하여 그 곳에 새로운 성전을 세웠던 사람들이었다.
사두개파는 이들 부류 중 첫 번째에 해당된다. 사두개파는 비록 숫자적으로는 소수였지만 하스모니안 왕가가 왕권과 대제사장직권을 공유하는 것에 찬성함으로써 하스모니안 왕가의 후원 아래 유대 정치, 종교, 경제 등 제반 영역의 지배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대의 조류에 적응하고 타협했다. 즉 유대가 헬라 제국의 영향권에 있을 때는 성전 제사가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유대의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지 않아 변절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하스모니안 왕가가 유대를 지배하자마자 오히려 그들의 강력한 옹호자로 변신했으며, 다시 로마 제국의 후원으로 헤롯 왕가가 하스모니안 왕가를 대신하자 그들은 즉시 로마 제국과 헤롯 왕가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그리하여 A.D. 66년 후반부터 열심당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사두개파는 열심당과 바리새파와 일반 민중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A.D. 70년에 그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파괴되자 사두개파는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완전히 와해되어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요약해서 정리한다면, 바리새파는 주로 율법에서 유대교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 및 유지에서 유대교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는 달리 오직 모세의 기록된 율법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랍비들의 구전을 백성들에게 지키게 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그들은 육체적 부활 사상까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부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센파에 이어 ‘제4의 철학’이라고 불렀던 열심당(The Zealots)은, A.D. 67년에서 70년까지 있었던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무리들이다. 하지만 열심당을 단순히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정치적, 군사적 운동이나 세력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A.D. 1세기의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에서 일어난 종교-사회적인 운동으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열심당은 오직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시며, 그 분만이 성지(聖地)의 참된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교도 국가에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참된 유대인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원리 위에서 출발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A.D. 1세기 유대 팔레스타인 땅은 이교도인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이교문화인 헬레니즘이 유대교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의 근본정신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참된 군주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그분만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수 있으며, 그들이 사는 땅은 하나님께서 영구적으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다. 그러므로 열심당의 무리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들의 땅에서 이교도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을 회복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심당은 유대교의 정체성의 근거를 바리새파처럼 율법으로 보거나, 사두개파처럼 예루살렘 성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이교도의 세력으로부터 약속된 성지를 회복하는 것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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