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군 칠서면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 무산사(武山祠)
■주세붕 선생의 유적 무산사(武山祠)는 경남유형문화재 제143호로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길 75(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4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생의 영정(影幀)과 유품(遺品)을 모신 곳이다. 원래 1591년(선조 24)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44)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가(生家)자리에 건립한 동림서원(桐林書院) 터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불탄 것을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676년(숙종 2) ‘덕연(德淵)’이란 편액(扁額)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이후 1868년(고종 5) 공포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리자 선생의 영정을 종가사당(宗家祠堂)으로 옮겼다. 그러다 1919년에 사당 옆에 전각을 세워 선생의 영정을 모셨고,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그것이 곧 무산서당(武山書堂)이다. 지금 건물은 서당을 중심으로 그 뒤편에 무산사(武山祠) 역할을 하는 광풍각(光風閣)이 있고 거기에 선생의 영정 걸려 있었는데 영정의 크기는 가로 1m, 세로 1.5m이다. 이 영정은 생존 시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생의 유품을 모아 전시보관하고 있는 유물전시관인 청덕각(淸德閣)이 1998년에 건립되어, 이곳에 선생의 영정을 비롯한 모든 유품(遺品)이 전시되어 있다. 서적과 책판, 각종 시(詩,) 와 가사, 교지(敎旨), 시호(諡號), 남고정사현판, 영주소수서원과 죽계천 변의 백운동석벽경자(白雲洞石壁敬字) 사진 자료, 선생이 사용한 말안장 등이 보관되어 있고, 장판각(藏板閣)에는『무릉잡고(武陵雜稿)』·『수구집(守口集)』·『귀봉집(龜峰集)』책판 352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무산사(武山祠)는 서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제례(祭禮)의 기능만 남아 있는데, 현재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주손(冑孫)은 멀지 않는 장래에 무산서당 대신에 무산서원(武山書院)을 건립하여 격식을 갖춘 무산사(武山祠)로 다시 태어 날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周世鵬)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교육개혁(敎育改革)의 선구자요 목민관(牧民官)으로 본관은 상주(尙州), 시호(諡號)는 문민공(文敏公)이다. 1522년(中宗 1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리(承文院 敎理), 예빈시정(禮賓侍正)을 거쳐 풍기군수 재임시 우리나라 최초인 서원(書院)을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함은 물론 우리나라 사학(私學) 유학(儒學) 교육의 기반을 구축(構築)하게 되었다. 선생은 군민의 산삼공납(山蔘供納) 민폐(民弊)를 덜어주고자 처음으로 가삼(家蔘) 인공 재배를 장려시켜 우리나라의 인삼(人蔘)의 시원(始原)이 되게 한 큰 공로를 세웠다고 한다.
선생이 처음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은 곧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그곳이 국가 공인 사학기관으로 편액(扁額)되던 해인 1550년(明宗 5)에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여 해주에 우리나라 세 번째인 서원을 세워 배우고자하는 모든 학생이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게 하고자 선생이 소장하던 서책을 내어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웠다. 서책의 유출을 금하고 금여(禁女)의 지역임을 알리는 여덟 글자<書不得出色不得入>를 문 위에 게시하였으며 원규(院規)가 세밀하였다. 내직(內職0으로는 주로 홍문관<弘文館-고려(高麗) 때, 임금의 자문(諮問) 기관(機關)의 하나. 성종(成宗) 14(995)년에 숭문관(崇文館)을 고친 이름으로, 학사(學士)를 두어 임금을 시종케 했음)>, 성균관(成均館) 등 학문 기관에서 근무하였고, 지방관(地方官)으로서는 교육진흥(敎育振興)에. 진력(盡力)하였다.
평소 청렴(淸廉)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문장이 뛰어나 고서(古書)에도 박통(博通)했다. 도동곡(道東曲), 오륜가(五倫歌), 육현가(六賢歌), 태평곡(太平曲),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 15수가 전하며 시(詩), 부(賦)가 1300여 수이며 무릉잡고(武陵雜稿), 죽계지(竹溪誌),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 심도설(心圖說), 이훈록(彛訓錄), 순흥읍지(順興邑誌)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무릉잡고에는 경기체가(景幾體歌)의 한글 가사가 여러 편 실려 있어 당시의 가곡(歌曲)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