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이라는 경계
정훈교
비행기가 착륙하는 하늘의 궤적 마지막 끝에 제주국제공항이 있고요
그 끝에, 푸른 페인트가 벗겨지고 낡아 가는 용담포구가 있어요
이른 아침, 그 포구에 나와 당신을 봅니다
문득 당신의 푸른 청춘이 떠오릅니다
오월 말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는 서류 한 장 차이였고
사월 중순에는 검은 그림자를 마주했습니다. 아버지의 경계는 숨 한 번의 시간이었어요
또 침은 어떻고요. 칠월 초에는 마른 몸을 이끌고 늘푸른경희한의원에 다녔습니다. 세상 바깥의 바늘이 안쪽으로 파고드는 침을 온몸으로 맞으며,
이월 말, 붉은 동백이 소리도 없이 지는 길을 떠올렸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몸을 온전히 허공에 내던졌을 때, 당신의 생은 어디로 가는 건지요.
새벽 한 시, 깊은 우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당신을 봅니다
눈꺼풀의 무게를 마지막까지 견디다가 결국, 무너져 버리는 낡은 당신을 봅니다
당신이 아는 경계는 또렷이 기억나는 과 모오든 것을 빨아들이는 로 나눠집니다 양수에서 마악 자궁을 뛰쳐나오며 터지는 울음처럼요,
백지 위에 써지는 글씨는요, 또 어떻고요
포구에 짙은 물비늘을 남기며 떠나는 저 배船의 발자국은요,
오늘처럼 비가 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여기 없었겠지요 이 시도 태어나지 않았겠습니다
궤적의 끝이 어떤 여행자의 시작이었다는 것도 몰랐겠지요
당신 이름은 팔월의 벚꽃이겠지
팔월에 지는 벚꽃이 있다고 들었다 통영 공립중학교 인근 어느 섬에서 간혹,
난온대 해양성 기후를 놓치고
사람의 계절을 놓치고
하염없이
지는 벚꽃이 있다고 들었다
아침저녁으로 오체투지 하는 늙은,
벚꽃이 있다고 들었다
(죽음을 사이에 두고)
섬의 서쪽 를 녹슨 그림자로 지우는
여러 번의 계절과
여러 번의 낙화,
생달나무·후박나무·마삭나무·광나무·곰솔·동백나무
이런 늙은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 하루도 바삐 가는
별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포구에 정박한 낡은 배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한여름 밤, 오래된 이름들
(봄을 사이에 두고)
겨울이 온다
문득이라는 경계
오늘은 날이 흐렸다. 육지와 제주를 오가느라 몸과 마음은 더 흐렸다. 최근 들어 한의원을 찾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봄에 덜컥, 뜻하지 않은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또한 덜컥 붙어 버렸다.
도청 산하 공공기관인데 4급 프로그램 기획자였다. 태어나서 처음 입사는 아니었지만, 나라의 녹祿을 먹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러한 무모한(?) 도전은 작년 말에 제주청년센터장에 지원하고 똑, 떨어진 후유증이 분명하다. 지역에서 청년센터를 직접 운영한 경험이 있고 문화기획자로 10년 이상 활동을 하고 있으니,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탓이었다. 그래서 이왕 나선 김에 공기관 채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즈음에 공공기관 공고를 보게 되었고, 제주 입도하고 나서 두 번째 도전에 덜컥, 합격을 하고 만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관공서는 칠 할이 문서라고. 단순 비교하자면, 같은 기간 내에 민간에서 10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고 하면, 관공서는 3개의 프로젝트 밖에 추진할 수 없었다. 7개를 더 할 수 있는 나머지 기간에는 서류를 작성하고, 보고하고, 다시 보고하고, 결재를 맡고 또 결재를 맡고 그제야 뭐든 시작할 수 있었던 것. 답답할 노릇이었다. 거북이도 이 정도로 느리지 않을 것 같은데, 매사에 모든 돌다리를 두드려야 했다. 그리고 한번 건넜던 돌다리도 매번 여러 번 두드려 보고서야 건널 수 있었다. 하, 그래도 두세 달이 금방 지나갔다. 이제 점점 적응되는 것이 아니라, 적응과는 더 멀어지는 듯했다. 그 무렵 대한민국 도서관 주간이 있었고, 프로그램 기획자로 첫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또한 그 무렵에 깊은 우울을 마주했다. 2024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출구조사 결과 방송을 막 보려던 참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구급차로 급히 병원으로 옮겨 20분째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다는 수화기 너머 캄캄한 소식. 그 와중에도 나는 냉정했다. 쉽지 않겠구나. 집에서 구급차를 부르고 도착하는 데 최소 30분 이상, 그리고 병원에 가는 데 최소 15분 이상, 그리고 20분째. 정신이 아득해지고, 모든 시간이 일순간 숨을 멈췄다. 결국 심전도검사기의 그래프가 더는 곡선을 타지 못하고 일자로 축 늘어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가족 친지가 모여, 함께 칠순 생신상을 하셨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죽음이 올 수 있다니. 당장 제주에서 비행기표를 구하는 것도 일이었고, 그것보다 더 캄캄한 것은 집안의 그 누구도 유언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들은 바가 없었다. 이는 정말, 여름 하늘에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잔인하다던 그 사월이 내게는 이렇게 다가왔다.
점점 적응되어 가던 직장 생활도 다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라는 종이 한 장으로 오늘의 내 삶은 곧 과거가 되었다. 종이 한 장이 곧 다른 삶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아버지 또한 숨 한 번 놓은 일로 그 전까지의 삶이 과거가 되었다. 그 경계가 너무나도 또렷이 다가왔다. 몸과 마음에 있는 모든 경계의 담벼락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생체리듬도 완전히 깨지고, 뭘 먹어도 속이 더부룩했다. 명치에 검은 돌 하나 앉아 있는 것처럼, 조금만 먹어도 몸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더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각오 같았다. 배수의 진이었다. 이러다 쓰러질 수 있겠다 싶어 한의원을 찾았다. 상담하고 침을 몸 안으로 들였다. 침은 맞을 만했다. 뜨거운 돌 같은 것을 배 위에 올리고 십여 분 있을 때도 있었다. 수건을 한 장을 깔고 잘 달궈진 돌을 놓으면 그런대로 참을 만했는데, 하루는 수건 없이 바로 옷 위에 돌을 얹었다. 5분 정도 지나자 너무 뜨거웠다. 내가 좀 예민한가 싶어 말하지 않고 버텼다. 몇 번이고 간호사를 부르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되니 벌겋게 달아오르고, 화상을 입었다. 수건 한 장 차이가 이렇게 뜨겁게 다가오다니, 가벼운 수건 한 장만큼의 경계도 일을 낼 수 있구나. 새삼 뼈저리게 느끼는 밤이었다.
그날 밤은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려 하지 않고 바로 순응하며, 깊이 잠들었다. 아니, 자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떤 찰나를 두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나뉘는 것. 숨 한 번 쉬지 않았다고 생사가 갈리는 것. 수건 한 장 차이로 상처가 돋을 수 있다는 것. 모두가 폭우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는 울음인 듯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