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집착 벗어났더니 팬·동료·후원사 등 고마움 새삼 깨닫게 돼
내년엔 美 LPGA 多勝 2년 뒤 국내복귀 생각
돌이 갓 지난 듯한 여자 아이가 깡총대다 이모 품으로 뛰어들었다. 경기를 마치고 무표정하게 필드를 떠나던 골퍼의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다. 2년 만에 국내 대회에 모습을 보인 '원조 골프여왕' 박세리(33)다.14일 한국여자프로골프 투어 하이트컵 챔피언십이 개막한 경기도 여주 블루헤런 골프장에서 만난 그는 "동생(박애리)의 딸 나연이인데 절 잘 따라요"라며 자랑했다. 한국 여자골프의 상징인 그에게 2010년은 '부활의 해'다.
올 5월 미 LPGA투어 벨마이크로클래식에서 오랜 부진을 딛고 2년10개월 만에 우승하며 통산 25승째를 거뒀으며 11일 끝난 LPGA투어 나비스타 클래식에서도 나흘 내내 언더파를 치며 공동 5위에 올랐다.
게다가 체육인의 최고 영예인 체육훈장 청룡장까지 받게 됐다. 그래서인지 이날 모처럼 온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라운딩한 그에겐 편안함이 엿보였다. 민감한 질문에도 특유의 씩씩한 웃음을 지으며 마음을 열었다.
- ▲ 거울 앞에 선 박세리는“이제 골프의 즐거움을 깨달았으니, 제 골프 인생도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며 웃었다. 박세리는 하이트컵 챔피언십 2라운드에서 중간합계 5오버파 21위를 달렸다. /KLPGA 골프전문 사진기자 박준석씨 제공
"2~3년 더 생각하고 있어요. 내년엔 미 LPGA투어에서 전성기 때처럼 다승(多勝)을 해보고 싶고 2년 뒤에는 국내 투어로 돌아올 생각도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올해 깨달은 골프의 즐거움을 몇 년 더 느끼고 싶어요."
―LPGA투어에서 25승을 한 베테랑이 새삼 골프의 즐거움을 깨달았다니….
"예전의 전 하루 20시간을 골프에 몰두했어요. 목표는 우승밖에 없었죠.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돌진했어요. 오랜 슬럼프를 거치면서 팬, 동료, 스폰서의 고마움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골프라는 게 나도 즐겁고 남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스포츠라는 걸 배운 거죠. 올해 우승한 것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난 덕분일 거예요."
―LPGA에 젊고 실력 있는 선수들이 많은데 박세리가 버틸 수 있는 경쟁력은 뭡니까.
"정상에도 서봤고 바닥까지 추락도 해본 게 재산이죠. 골프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그 흐름을 알면 엄청난 힘이 되죠. 어렸을 때보다 스윙이 다이내믹하지 않아도 후배들 못지않게 거리를 낼 노하우도 있고요."
―은퇴 후 계획은?
"골프는 제게 운명 같은 존재예요. LPGA투어에서 우리 선수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도 싶고, 국내에서는 선수들이 좀 더 많은 대회와 좋은 조건에서 뛸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골프 아카데미 운영 등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아요."
―예쁜 조카를 보면 '나도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은데.
"영원히 선수만 할 것도 아니고…. 4년째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요. LA에 사는 재미동포인데, 예전에 박찬호 선수 매니지먼트사에서 일하다 요즘엔 무역회사에서 근무하죠. 저보다 한 살 위인데 부모님 허락을 기다리고 있어요."
―둘이 잘 맞나 보죠. 박 프로도 강한 성격인데.
"저도 서른이 한참 넘었는데, 남 배려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프로골퍼이고, 결혼 후에도 사회 활동을 하려 하는데 서로 상대 입장을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10여년 전 사귀었던 홍콩 출신 남자와 잘 됐으면 벌써 가정을 꾸렸을 텐데. 주변에서 반대가 많았죠.
"가슴 아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게 됐어요. 만약 그때 결혼했더라면…. 지금처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박세리는 19일 코스 설계를 맡은 말레이시아 골프장 건설 현장을 찾아 1주일간 머문다. 그 후엔 애니카 소렌스탐(스웨덴), 로레나 오초아(멕시코) 등과 함께 중국에서 열리는 자선 골프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