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담론] 득도의 길
- 김용호 비상임 논설위원·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올해에는 유난히도 폭염이 심하다. 폭염을 이겨내지 못한 탓인지 대부분의 레드향 품종이 열과가 돼 농업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레드향만 그러하랴 온주밀감은 물론 만감류에서도 열과가 발생하고 있다. 모든 품종에서 작년부터 열과가 발생하더니 점차적으로 그 면적이 증가추세에 있고 특히 온주밀감에서 증가세가 뚜렷하다.
기후가 변화되고, 품종이 다양하다 보면 그에 알맞은 재배방법이 있기 마련인데도 변변치 못한 온주밀감의 관행농법으로 모든 품종을 거느리고 재배하려고 하면 생리낙과는 물론 열과 등 여러 생리현상이 다양하게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거늘 이를 예상치 못ㅤ했다면 감귤산업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감귤산업만 그러하랴, 다른산업도 마찬가지다. 모두 똑같이 위정척사(衛正斥邪, 구한말에, 주자학을 지키고 가톨릭을 물리치기 위하여 내세운 주장. 본디 정학(正學)과 정도(正道)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것으로, 외국과의 통상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분위기에 갇혀가지고 아무 반성 없이 그렇게 살면 그 사회가 전혀 발전할 수가 없다.
공자는 일전에 필자가 본보에 작성했던 시론담론에서 언급한 타조사냥에서 그 지프차를 인간으로 보고 '인(仁)'으로 돼 있다고 주장한다. 이 지프차가 무엇인가를 알고 난 다음에 이런 저런 행위가 결정된다. 노자도 이것에 대해 어떤 이해에 젖었는가에 따라 이렇게 살자 저렇게 살자는 행위의 결정에 근거가 되고 있다. 이렇게 반성을 하면서 사는 것을 철저한 삶이라고 한다. 아편전쟁 이후에 중국이 서양을 이기기 위해 온갖 궁리를 했다. 그 당시 중국 사회상은 '대충의, 대강의 선생(差不多 先生)'이었다.
감기환자가 병원에 갔는데 의사는 이 정도의 증상으로 보아 거의 다 나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괜찮다. 집에 가도 된다. 맹장 수술하는데 수술칼을 가져 오라고 하는데 소 잡는 칼을 가져 온다거나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얼렁뚱땅 하는 것이다.
과학의 특성은 무엇이냐 하면 감성과 본능을 크게 이겨내는 것이다. 과학의 큰 특징은 매우 철저함이다. 정확한 것이다. 과학적인 사고 훈련이 돼 있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대충한다. 우리나라가 극복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얼렁뚱땅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됐다 든지, 얼렁뚱땅하는 자체가 과학적이지 않다. 얼렁얼렁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우리의 최선을 다하더라도 최선이 되기 어렵거늘 하물며 얼렁뚱땅 으로 대업을 이룰 수 있는가.
과학과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어이냐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철저함으로 다시 무장하는 것이다. 얼렁뚱땅으로는 되는 일이 없다. 자기 생활이 바뀌어야 된다. 이 정도면 됐다는 것은 전혀 철학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다.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을 채워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청결하게 정리 정돈하는 것이다. 자기 주변을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리하는 이것이 함께 따라야 된다. 이게 득도의 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를 익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렇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 세계 우주는 한 사람이 움직인다. 기독교, 신중국 건설 몇 명이 만들었느냐 하면 한 사람이다.
불교, 원불교도 마찬가지다. 이게 인간의 신비다. 혼자가 전체다. 자기 혼자의 힘을 믿어야 된다. 혼자의 이 힘을 믿는 상태를 독립적 주체라고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우주를 여는 일이다. 각자가 우주의 책임자다. 내 일상에서의 각성, 내쫓기는 타조가 한 번 되돌아보는 일이 우주를 바꾸는 일이다. 철학적인 시선을 갖고 일상을 바꾸다 보면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된다. 본질이 키워지고 키워져서 이상적인 기준까지 도달하게 된다. 본질이 없으면 이상적인 기준까지 가지 않는다.
노자는 이 구도 자체가 폭력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없어야 된다. 이것을 없애는 것 보다 이것이 생겨나지 않게 해야 된다. 그렇다면 본질이 없어져야 한댜. 본질을 부정해야 한다. 공자의 지프차는 '인(仁)'이 본질이고 노자의 지프차는 비본질로 이해된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한테 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인 본질이 있기 때문에 성인이 만든 기준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노자는 이 기준이 폭력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기준이 태어나는 본질을 없애야 된다. 이 폭력성이 태어나는 원점인 토대가 본질이 태어나지 않을 토대가 돼야 된다. 이를 비본질이라고 했다. 공자는 이 세계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노자는 비본질적으로 이해한다. 요즘말로 하면 비본질을 관계라고 한다. 불교 용어로 하면 인연이다. 노자는 유와 무의 관계로 본다. 관계를 무엇과 무엇의 관계로 보느냐 하는 것이 그 철학의 특성을 갖고 있다.
출처: 제민일보력 2024.09.23 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