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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7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지혜서 13,1-9 루카 17,26-37
내가 죽고 있다면 내 안에 생명이 있다
며칠 전에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선종하신 최영훈 루카 형제님과 스테파니아 반장님과의 카톡 대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루카 형제님이 신앙으로 거의 1년간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읽으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저는 세례 받은 지 이제 일 년에서 이틀 모자란 초보신자입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주님의 온전한 사랑을 느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난 3월 29일 요양병원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던 중,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해야만 했던, 주 하느님을 나의 모든 것 위에 놓고,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아버지하느님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버린 날로, 아마 제가 태어난 이후 제일 많이 울었던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저를 꾸짖고 책망하소서.
저의 그 얄팍하고 가벼운 신앙으로 아버지 이름을 욕되게 하였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육체에 찾아온 그깟 고통 앞에서, 너무나 쉽게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싶었으며, 아버지를 저주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으며,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 주신 수많은 은혜들, 그리고 제가 겪었던 그 많은 성령체험들을 원망했습니다.
제게 그러한 은총을 내리신 뜻을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새끼손톱의 1/6보다도 작은 진통제 앞에서 저는 한없이 약하고 미미한 존재임을 뼛속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옳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옳은 일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게 주신 이 고통에는, 저는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옳은 뜻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아버지, 눈물로서 반성하고 회개하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오직 아버지께서만이 저의 생사여탈을 하실 수 있는 주권자이시며 권능자이심을 믿고 고백하오니, 아버지의 부족하고 미천한 아들 루카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언제나 살아계시고 제 안에 계시며 또한 저를 지켜주시는 주 하느님아버지.
모든 감사와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지금 이순간의 삶을 제게 허락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소돔 위에 유황불이 쏟아져 내릴 때처럼 그렇게 세상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리 각자도 그렇게 반드시 주님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소돔 땅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지만 소돔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 땅을 탈출하자 소돔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멸망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하는 롯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게 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죽음까지도 감사할 수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감사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 반드시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몰아내는 것이 진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카 형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2남 2녀의 막내로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어떤 마음의 상처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금년 1월, 주님께서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져 있던 상처를 한순간에 제 눈앞에 펼쳐보이게 하셨습니다.
정말 괴수와도 같은 울음과 눈물이 한동안 흘렀는데,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기도가 왜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제게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이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에 대한 미안함만이 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살아계시며, 항상 제 곁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제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기억이자 은혜였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아멘!”
우리 안에 롯과 같은 분을 반드시 모시고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면 나는 죽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인 내가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십시다.
그러면 미움이 죽고 용서가 살며, 절망이 죽고 희망이 살며, 화가 죽고 겸손과 감사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고 하느님의 기쁨이 샘솟는 것을 보면 절대 나를 그렇게 만드는 롯을 내어 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7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2요한 4-9
루카 17,26-37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뭐니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언젠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께서 과월절 날 밤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밤은 심판이 시작되는 날, 그 밤에 주님께서 첫 단계로 하실 일이 악인들로부터 의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 봉헌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지옥에 버려질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천국과 지옥, 갈림길의 기준에 대해서 루카 복음 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카 복음 17장 34~35절)
무시무시한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묵상해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일종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 영적인 삶, 하느님 중심의 삶은 뒷전인채, 오로지 은행 잔고 늘이는데만 전념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끓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심을 늘 염두에 두고, 현세의 삶도 최선을 다하지만, 또 다른 삶, 영적인 삶, 하느님 안에서의 삶에도 소홀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분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강론>
(2023. 11. 17. 금)(루카 17,26-3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사람의 아들의 날>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은 인간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이고, 그 일들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외면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입니다.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일상생활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의 날’은 표현으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뜻으로는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입니다.
모든 민족 사람들, 모든 종교 사람들이 다 대상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다른 종교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믿는 신의 심판을 우리가 왜 받아야 하는가?” 라고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시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심판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2-6).”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신앙인들은 멸망을 당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평소에 늘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해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고 세속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면, 세속 사람들이 당하는 것처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 때에는 어떤 특권도, 특혜도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루카 12,47-48).>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1-37)”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이 실행해야 할 행동 지침인데, ‘그날’이 되었을 때 실행하면 되는 지침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평소에’ 실행해야 하는 지침입니다.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과 들에 있는 이는 뒤로 돌아서지 말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뒤로 돌아서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 19,26).
<그 이야기에서 ‘소금 기둥’은 ‘허무함’을 상징합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는 “육신의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인데, 넓은 뜻으로는,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못 들어오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의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려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는 모녀, 또는 자매,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고, 식구라도 회개와 신앙생활을 대신 해 줄 수는 없고, 각 개인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종말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는데(루카 17,20),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두 질문 모두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심판은 특정 장소에서 특정인들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모든 곳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날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재림과 심판의 날이 언제 어떻게 오든지 간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면서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