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0. 큐티
마태복음 2:1 ~ 6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관찰 :
1)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왕에게 경배하러 오다
- 1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 헤롯 왕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전설이나 설화에서는 지명, 인명이 언급이 되어 역사적으로 언제, 어디에서 일어나는 사건인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다. 오직 역사적인 사실인 경우에만 지명, 인명, 년대가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소수의 유대인들 중에서 이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정작 주님을 경배한 자들은 극소수였습니다.
- 2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들이 과거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던 헤롯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헤롯이 태어날 때 어떤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오직 말구유에 뉘이시게 되는 어린 아기 예수에게만 동방에서부터 별을 연구하던 학자들, 혹은 왕들이 와서 경배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는 3명만은 아닐 것입니다. 황금, 유향, 몰약 때문에 3명으로 생각을 좁히지만, 사실 동방에서 여기까지 오는 여정은 긴 여행이고, 박사 혹은 귀족 혹은 왕 된 이들의 신분을 생각해 본다면 이들 3명만 꼴랑 여행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수행원들을 포함해서 적지 않은 인원이 동원된 무리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김성일 장로를 위시한 창조사학회 사람들과 고 이관숙 목사님 같은 경우는 이 동방박사를 중국의 한나라 사람으로 보는 관점이 있기도 합니다.
2)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난 소동
- 3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 이 소동은 동방박사들이 왕을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자신이 왕인데, 다른 왕을 찾는 것에 흥분해서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 예루살렘에서 왕인척 하는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하는 미련함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 4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 헤롯 왕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는지 물었습니다. 진작에 물어볼 수도 있었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경배하려는 마음이 없기에, 무지하기에 이러한 질문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 5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의 대답은 유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미가서의 이 예언에 대한 해석은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 태도는 글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경배하지 않고, 소 닭 보듯이 이 사건을 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이방의 왕인 헤롯이 더 혈안이 되어 그리스도를 찾은 것입니다. 패러독스입니다.
- 6절.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 유대 땅 베들레헴이 유대 고을 중에서 적지만 적지 않은 이유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목자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르침 :
1) 패러독스가 엿보입니다. 이방의 동방박사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고 경배하러 찾아왔지만 정작 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관심이 없는 것이 바로 패러독스입니다. 이방의 왕 헤롯 마저 그리스도를 찾기에 혈안이 되지만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 패러독스입니다. 예루살렘이 소동하지만 그 백성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 패러독스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을 해석한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경배하러 가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동방의 박사들은 그곳으로 달려갔다는 것이 패러독스입니다. .
2)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계시되었지만 그 말씀을 자신의 삶과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는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보전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그것으로 현학적인 수단으로 삼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난 체 하라고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치매를 예방하라고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성경책을 베고 자라고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삶의 중심으로 놓고, 실제 성경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성경의 비밀들은 그냥 그렇게 묻혀있고, 나의 삶과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흘러가고 말세가 임하고 예수님의 재림은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흔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
1)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삯꾼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중심을 뒤흔들고, 나에게 맡겨진 심령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사역을 하는 자인가를 반문해 봅니다.
2)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실 것을 알면서도 경배하러 가지 않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모습. 어처구니가 없지만, 오늘날도 말씀을 읽고 알고도 행동하지 않는 신앙인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이 말씀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살아서 그렇게 역사하시도록 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말씀 앞에 복종케 하기를 원합니다.
3)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면 아내의 치료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리라 여겼지만 생각과는 달리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생이 내 생각되로 안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 참으로 소망이고 안심이 되는 일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