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22]
유소기와 등소평 등 주자파에 의해 주도된 새로운 정책은 모택동노선에 반하는 것으로서 또 다른 정치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결국 1966년 들어 모택동과 그 지지세력은 주자파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일련의 정책들을 못마땅해 하며 홍위병을 내세워 사회주의 건설을 명분으로 계급투쟁을 선동했다.
10여년 동안 중국을 암흑세계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의 사망으로 끝났다.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종결이 선포됐다.
중국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정치투쟁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8년 등소평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막을 내렸다. 중국공산당은 일련의 사건에 대한 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오류였다며 당시 탄압받은 사람들을 복권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결정은 1981년 6월에 나왔다.
중국에서의 일련의 정치투쟁은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중앙의 권력상층부의 결정과 갈등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등에서 보듯 성격상 이념갈등에 따른 권력투쟁임에도 불구하고 농촌을 포함한 중국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소수민족지역에서는 민족문제와 결부하여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조선족동포들이 밀집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그 파장이 더 컸다. 민족 정풍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조선족동포 지식인들은 간첩으로 내몰려 처형되는 등 극단적인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는 또한 조선족사회에 민족간부의 고갈현상을 낳기도 했다.
195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까지는 중국이 가장 비참했고 황폐한 시기였으며 중국사회가 가장 잊고 싶어하는 시기다.
그 상황은 조선족동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체제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중국공산당은 중국사회 전반에서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한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다.
정치부문에서는 사회주의 제도의 정착과 함께 주민들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조선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는 중국 중심의 단일 조국관을 고양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것은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과 민족 정풍운동 형태로 표출됐다.
조선족동포들도 중국사회의 분위기에 편승해 반우파투쟁의 빌미가 된 쌍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반우파투쟁에 이어 조선족사회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뿌리 뽑기 위한 민족 정풍운동이 시작됐다.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본주의적 요소가 지배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싸움으로 판단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우파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들을 반사회주의적인 대상으로 지목해 산간오지로 내몰아 노동교화를 시키는 등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소수민족에 의한 지방 민족주의적 경향도 우파적인 것으로 평가함에 따라 민족 정풍운동으로 발전했다.
민족 정풍운동은 민족관 및 조국관 문제와 더불어 조선족동포들의 조선어 사용에 대한 문제도 함께 제기했다. 조선어 사용이 한족과의 분리를 획책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족사회에서의 반우파투쟁은 1958년 4월에 시작됐다.
조선족동포사회에서는 반우파투쟁과 민족 정풍운동이 거의 동시에 진행됐고 주로 대학교수, 과학자, 기관간부, 교원, 작가 등 지식인들을 겨냥했다.
이들은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강제노동을 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우파분자로 낙인이 찍혔던 사람들은 1962년에 이르러 대부분 사면됐지만 사회적으로는 ‘감투벗은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계속해서 멸시와 불신을 받았다.
더욱이 이들은 문화대혁명 때에도 우파분자로 낙인찍혔던 전력을 이유로 박해의 일차적 대상이 됐다. 반우파투쟁과 민족 정풍운동을 주로 민족간부와 지식인을 대상으로 지역 민족주의를 반대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민족지역의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민족문화와 전통을 보존 발전시키는 모든 행동이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비판받았다.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언사도 민족분리주의적인 것으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참고서적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