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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출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 40:34-38 / [여호와께서 성막에 드시다] 그러자 구름이 만남의 장막을 뒤덮어 여호와의 영광이 이 성막에 가득 찼다. 35) 이렇게 구름이 만남의 장막을 뒤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이 성막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만남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36) [구름이 백성을 인도하다] 만남의 장막을 뒤덮은 구름이 그 성막 위로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쳤던 진을 거두고 행진하였다. 37) 그들은 그 구름이 성막 위로 떠 오를 때까지 길을 떠나지 않았다. 38)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저곳으로 행진해 가는 동안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는 구름이 낮에는 성막 위에 머물러 있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서 빛나 그들의 앞길을 밝혀 주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성막을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과 하나님의 화목을 가장 잘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설계하시고 모세는 건축을 지시하고,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재료를 제공하고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34-35) 모든 일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영광이 너무 충만하여 모세도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성막 위에 멈추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제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은혜는 대단히 큰 것이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 임재는 인치심, 거룩케하심, 기뻐하심, 동행하심, 인도하심, 섬김을 받으심, 보호하심, 승리케 하심을 의미합니다.
여정을 이끄는 구름(36-38)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고 있다가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발해야 합니다. 그 구름이 가는 대로 계속 따라갈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일주일 가면 일주일 가다가 구름이 내려오면 멈추어야 합니다. 한 시간 이동할 때도 있고 몇 개월 동안이나 오래 머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세밀한 인도를 해 주셨습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인도하셔서 낮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대열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과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성막을 만들고 성막을 사용하는 순종을 배웠습니다. 성막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먼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를 주시고 걸어가는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인도하시는 대로 갔을 때 하나님께서 감당할 능력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기억하여 말씀을 잘 감당하여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낌이나 생각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은 성막 건축을 위한 헌신의 결과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려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살고 싶고, 당신의 길을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거하시며 소통하는 임마누엘 상태였으나 인류는 타락하여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이 단절을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임마누엘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하며 삶 속에서 그 은혜와 복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라
출 40:33-38 / 박용래 목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혼자 살면 외롭고, 둘이 살면 괴롭다!"고 했습니다. 결국 외로운 사람은 괴로운 것이 더 좋아 보이고, 괴로운 사람은 외로운 것이 더 좋아 보이지만. 인생은 이러나저러나 결국 광야와 같은 고난의 연속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급의 억압에서 해방을 받은 후에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광야의 길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들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 길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여 가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으로 성숙해져가는 삶을 살아감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급한 백성들에게 항상 낯처럼 밝고 환한 길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까지 광야에서 40년이라는 혹독한 훈련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만 믿었다고 만사형통의 길로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항상 밝고 환한 낮과 같이 형통하고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밤과 같은 어둡고 답답하고 험하고 어려운 길도 만나게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합니다.
►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 길의 낮은 엄청나게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는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셨습니다. 구름이 있으면 기압의 차이로 바람이 불게 되고 그러면 시원하게 됩니다. 열대지방도 습도가 없어서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 길의 밤은 엄청나게 추웠습니다. 서쪽의 지중해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차기 때문에 밤만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낮과 밤을 지날 때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보호하여 주시사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 오늘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낮과 밤은 필연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낯은 활동의 때를 의미합니다.
무엇이든 능력만 있으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때가 낯입니다.
그러나 밤은 어둡고 캄캄하며 춥고 외로운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운 광야의 밤에도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임하셔서 언제나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는 낮도 있었으나 밤도 있었습니다. 즉, 오늘 우리 인생길에도 낮도 있지만 어둠과 고통의 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늘 밝은 낮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라고 해서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밤에도 식물은 자라납니다. 밤에도 성장은 있습니다.
밤을 통하여 더욱 연단되고 성숙해져서 좋은 열매를 맺어 갈 수 있습니다.
▶ 우리 인생의 삶에 있어서 낮을 만난 사람도 있고 밤을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낮을 만난 사람은 늘 기쁘고 즐거우며 삶에 의욕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가정도 낮을 만나면 즐겁습니다. 꿀과 같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밤은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밤을 만나면 틀림없이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준비를 다 했는데 빗나갑니다. 세상이 두려워지고 고통스럽습니다.
가정에 밤을 만나면 쓸쓸하고 외롭고 미워집니다.
이러한 밤을 만난 성도들은 연약한 인생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성령의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 바로, 불기둥은 밤을 만난 인생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성령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사업에. 불기둥으로 임하시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어둔 밤에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
1) 빛이 되어 주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 출애굽기 13장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 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두운 밤이지만, 불기둥 가운데 있는 그 불빛으로 인해서 그들은 환하게 앞을 분간하면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 캄캄한 밤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요즈음은 가는 곳마다 가로등 불빛아래 길을 갈 수 있지만 옛날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캄캄한 밤길을 갈 때는 정말 한발자국도 내어 디딜 수 없는 밤길을 걸어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 언제인가 스리랑카로 여행을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밤에 샤워장에 가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앞서간 사람이 샤워장 입구에 불을 모두 꺼버렸습니다. 그래서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더듬거리고 나오다가 시멘트벽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 처서 눈언저리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더구나 쓰고 있던 안경 렌즈가 깨지면서 유리알이 얼굴에 박히면서 꽤 큰 사고가 났던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밤에 병원도 없고 고통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둠 가운데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빛 가운데 거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어느 것이 벽이고, 어디가 문인지,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 분별력이 생기게 되고, 그 분별력을 통해서 어두운 밤도 위험하지 않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 우리 인생길에서도 밤이 찾아올 때에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분별력이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기 쉽고 실패하고 좌절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기둥의 인도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등불을 삼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분별을 해야 인생의 어두운 밤에도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만일, 인생의 밤을 맞이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래서 갈 길을 알지 못하고 힘들고 답답해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계시다면 우리에게 성령님의 임재를 허락하여 달라고 기도하셔서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음으로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불기둥으로 밝게 비춰주시고 인도하여 주심으로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역경을 이기는 위로와 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 불기둥은 역경을 이기는 위로와 힘을 줍니다. 광야에서 맞이하는 밤의 매서운 추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까지도 얼어붙게 만들었지만, 불기둥은 광야의 차가운 냉기를 녹이는 따뜻한 열기가 그 안에 있습니다. 인생의 척박한 광야에서 우리는 매서운 추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광야 생활인데, 밤을 만난 광야는 더 춥고 힘든 곳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광야의 추위에 있는 때에도 불기둥 아래 있으면, 성령의 위로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매섭도록 추운 문제들을 녹여주시고, 어려움 만난 자를 따뜻함으로 위로해 주심으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즉, 성령님께서 어려움을 이기는 은혜를 주십니다.
▶ 사도 바울은 아시아로 가고자 했지만, 불기둥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유럽으로 인도하셔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광야의 밤과 같은 매서운 추위와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고, 어둡고 추운 지하 감옥에 던져졌고, 억울하게 언제 사형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환난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그 일행은 밤에 기도하고 찬양했을 때에 성령의 위로하심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성령님께서 주셨습니다.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고 간수장과 그 가족까지 구원받는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 우리 인생길에도 어쩔 수 없이 캄캄한 밤이 찾아오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찾아왔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빠지어 절망하지 말아야합니다. 불기둥 같은 성령님의 위로와 힘을 체험하면 광야의 밤도 이겨낼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캄캄한 인생의 밤길에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힘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따뜻한 열기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그 역사를 통해서 광야의 밤도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문제를 해결하여 주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 불기둥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힘이었습니다. 어두운 광야를 불기둥의 인도함 없이 걸어가게 되면,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가야 할 방향을 잘 알 수 없고, 밤의 추위 외에도 광야에 있는 전갈과 뱀과 같은 것들이 문제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기둥이 없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다니엘을 보면, 그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사자굴 속에 들어가게 되는 광야의 밤을 맞이했습니다. 굶주린 사자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문제였지만, 다니엘은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으니까, 사자는 순한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광야의 밤을 맞이했고, 광야에서 어려운 문제를 당하게 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을 때, 그에게 당한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해결되어져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들도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생에서 절대로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에 문제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빨리 세상을 떠나게 해달라는 기도와 같습니다.
문제 있는 세상에 살면서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우리는 문제를 만나게 되고 그 문제로 고민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간구는 문제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문제가 찾아오더라도, 그 문제가 별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리면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불기둥처럼 성령님께서는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성도들에게 함께하시어 문제를 이길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야 문제를 만나도 그 문제가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문제되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항상 체험하시고 승리하심으로 간증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주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 불기둥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기둥을 통해서 그들이 보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 멈춰 서서 장막을 치고, 언제 장막을 걷고 떠나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서 멈춰서면 멈추고 진행하면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에 그들은 결국 그들이 목적했던 가나안 땅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그 지시하심을 따라 준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고 예비해 두신 가나안의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50년을 목회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은퇴식을 하실 때에 은퇴하는 소감을 말씀해 달라고 하니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괜히 걱정했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주시고, 준비해 주셔서 인도해 주셨는데, 괜히 걱정했다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벗어난 사람들은 다 열사병에 죽고 추워서 얼어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이던지 일 년이던지 십년이던지 오직 불기둥의 인도를 받은 자들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잘 마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그런데 성도들이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은 아무나 누구라도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기둥의 인도하심은 누구에게 임했습니까? 애급에서 나온 사람들에게만 임했습니다.
애급에서 나와서 광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그 불기둥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애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름기둥 불기둥의 역사는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애급에서 나온 사람들 그리고 광야에서 가나안땅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에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애급에서 나왔다는 의미는 바로 죄악으로 인한 저주와 심판과 멸망에 빠진 세상에서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죄의 애급에서 출 애급 해야만 합니다.
불신앙과 불순종과 타락의 애급에서 출 애급 해야만 합니다. 죄 가운데 방황하며 회개하지 아니하고 불신앙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불기둥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죄악이 가득하고, 아직 애급에서 거하고 있으면 결단코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애급이 좋다고 애급에서 머물고 있으면 결코 불기둥은 없습니다.
죄악의 애급, 불순종의 애급을 떠나서 회개하고 광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불기둥으로 인도함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설 수 있도록 기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 순종하는 자에게 불기둥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애급에서 출 애급 한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 뛰처 나가는 사람들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구름기둥이 오래 머물러 있다고 뛰쳐나가는 사람은 광야에서 열사병으로 죽과 말았습니다. 불기둥이 너무 오래 동안 움직이지 아니하여 자기 뜻대로 뛰쳐나간 사람은 광야의 밤중에 모두가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할 때 불기둥의 역사는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40: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오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이 불기둥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성령님의 인도를 사모하고 원하는 성도들에게 역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신 것은 성령충만함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가요한 다락방에 모여 성령받기를 사모하고 간구하고 기도할 때 성령 충만함 받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이 전파되고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 오늘 광야 같은 세상을 내 힘으로만 살려고 고집부리고 교만하지 말고 성령님을 사모하고 기도하여 성령의 불기둥으로 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밤은 절대로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불기둥의 인도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불기둥의 인도함이 없으면, 분별하지 못하고 길을 잃게 되고, 전진할 수 없고, 쓰러지고 실패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기둥의 인도함이 있어야 밤을 만나도 갈 길을 알 수 있게 되고, 힘을 얻게 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광야 여정 가운데 불기둥을 보내주시고,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늘 체험하면서 영원한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충만하게 임하시다
출 40:34-38 / 조정재 목사
이제 오늘은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을 연계한 강론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매주 설교할 때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출애굽기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할 처소를 지으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따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회막을 완공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회막이 완공되었으니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거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차 비유로 설명드린 것처럼 신랑 신부가 언약을 맺고 신혼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나라적 관점에서 본다고 하면 한 나라의 도성이 완공되고 그 도읍지를 옮겨서 왕이 그 도성에 거하게 되면 그 왕조가 새롭게 열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출애굽기의 마지막 본문은 이스라엘 나라가 시내산에서 개국을 했다고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시면 레위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예물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에 나가 제사를 드림으로 교제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짧기는 하지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충만하게 임하므로 모세가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행을 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아니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행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낮과 밤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막에 있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연결해서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매 모세가 들어갈 수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기둥을 따라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여호와께서 성막 가운데 함께 계심을 이스라엘 백성은 밤과 낮으로 보았습니다.
이 구름과 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더랬습니다. 또한 구름과 불은 시내산 위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실 때에 빽빽한 구름으로 임하셨고, 불과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임하셨을 때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시내산에 완공된 회막이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의 성전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6-11절입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그룹들이 그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채가 길므로 채 끝이 내소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 곳에 있으며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지성소의 그룹들 아래에 메어 들이고 나왔습니다. 제사장들이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세가 여호와의 충만한 영광 때문에 회막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럼 모세와 제사장들이 이 영광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출애굽기 처음부터 계속 우리가 해왔던 것처럼 마가복음과 병행하는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6:9-2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복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마가복음도 오늘 출애굽기 본문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9-13절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는 것과 14-18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고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과, 그리고 19-20절은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통치하시니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도 믿지 아니했다,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따른다,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고 합니다.
영해를 한다고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믿지 아니했다’는 표현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아니했다고 하는 것은 부활의 영광과 함께 할 수 없었다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한 집에 산다고 하는 것은 항상 믿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부부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결혼의 언약을 따라 사는 것인데, 사실 두 사람 모두 미래를 모두 경험하거나 서로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어도 믿음을 따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대면하며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삶을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주 비유로 말씀드린 것처럼 약혼의 관계는 결혼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온전한 믿음의 관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혼한 두 사람은 24시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만나고 교제하고 생명을 누리는 것이 상대적으로 결혼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혼의 관계는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연합의 관계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구약의 관계는 온전한 관계가 아니어서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할 때에 모세와 제사장들은 들어가지 못하거나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와 어둠이 지배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온전한 관계를 누릴 수가 없어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충만하게 성전에 임하실 때에 그들은 하나된 관계를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온전한 믿음의 관계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의 16:9-20절의 내용과 출애굽기 40:34-38절의 내용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듣고 믿지 아니했다는 것은 모세가 여호와의 충만한 영광이 임했을 때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구름이 떠오르거나 떠오르지 아니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진행하거나 진행하지 아니한 것은 곧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따라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 구원의 삶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살면 표적이 따릅니다. 즉 구름과 불로 인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영광이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성막 가운데 거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두루 나가 전파할 때에 함께 역사하셨는데, 그 역사는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중에 함께 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출애굽기와 마가복음은 서로 병행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혹자는 마가복음 16:9절 앞에 괄호가 있고, 16:20절 끝에 또 괄호가 있어서 마가복음 16:9-20절은 후대 사람이 첨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력한 사본에 이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9-20절을 주석에서 빼버리거나 부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된 성경을 받고 있고, 교회가 합의한 성경본문을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따로 배제시킬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또한 제가 보기에는 만약 이 부분이 빠져 있다고 한다면 마가복음이 결론이 없는 책으로 생각이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부활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마가복음에는 비천한 이방인들이 매우 중요하게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 수로보니게 여인, 두 렙돈을 바친 가난한 과부, 여러 질병이 있는 자들이 바로 약하고 가난하며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들에게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출범했다고 마가는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살아나셨다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시골로 내려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보이신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기 시골로 내려가는 두 사람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부활하신 영광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아니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기 표현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모세가 그 영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면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나타납니까? 17-18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뚜렷하게 눈으로 보이는 표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말하는 것처럼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는 표적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은 당혹스럽지 않습니까?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얻은 표적적인 삶이 이렇게 나타난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저희 교회에 이런 분이 한 분도 없는 것 같은데 여러분은 전부 가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닌가요? 아니면 믿음이 없는 모양입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은 적이 있었습니까? 성경을 말씀대로 믿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조금 위안을 드린다면 저도 이런 표적을 행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한 통속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여러분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취임하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지요. 어떤 통치로 함께 하십니까? 그 통치는 제자들이 두루 나가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름과 불기둥이 성막 가운데 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눈으로 보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함께 역사하셨습니까? 표적을 나타내셔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습니다.
믿고 구원얻는 사람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운 기적이나 신비적인 치유가 나타나야만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들보다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시 부부관계를 예로 들겠습니다. 사랑의 프로포즈를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것이지요. 결혼하였으니 이제 결혼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얻은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생활을 신혼생활이라고 하며 이 생활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신랑, 신부라고 합니다. 결혼을 한 후 신랑과 신부는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새 삶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남자는 총각으로 친구만 좋아하고 친구에만 빠져 살았습니다. 친구라면 간이라고 내어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싹 달라졌습니다. 친구보다 아내를 더 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삶입니다. 옛 시대의 총각으로 살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에 남편으로 사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너 결혼하더니 변했구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표적이 따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 삶은 옛 시대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서로 사랑의 언약을 따라 살면서 확실히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한 집에 동거하며 알콩달콩 살아가면서 사랑의 말씀이 눈에 보이도록 증언하며 살게 됩니다.
이런 삶과 출애굽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막 가운데 낮과 밤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눈으로 보이게 함께 거하셨다는 것이 서로 같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두루 나가 복음을 전파하니까 표적이 따르며 말씀을 확실히 증언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말하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았다고 하는 말씀은 죄와 질병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새 삶이 나타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과 연합하여 그와 함께 세례를 받으니 새 시대의 새 표적으로 함께 하는 삶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주로 어느 순간에 믿어 구원을 얻은 확신 속에 살다가 마지막 임종할 때에라도 반드시 구원을 소멸치 아니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 믿기만 하면 영원한 구원이 보장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교회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주님의 영광을 뵙는 주님의 몸으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천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자들이 주님을 제일 먼저 뵙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모세와 제사장들도 가득히 임한 여호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는데,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부활하신 영광을 친히 뵈올 수 있는 자가 바로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라고 마가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천한 죄인이요, 원수와 같은 이방인들이 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믿고 함께 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영광은 바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아주 큰 선물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신다’는 말은 천막을 치고 함께 거하셨다는 뜻입니다. 시내산에 성막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의 영광과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보았는데 그 영광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요한복음 1:18절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어떻게 왔습니까? 아버지와 방불한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옛 성소를 섬겼던 모세와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영광에 함께 할 수가 없었고 친히 뵈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시대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으로 아버지 품 속에 독생하신 아들이 나타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20장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셨습니다. 일주일 간격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영광을 친히 뵙지 못하였기에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그의 몸에 손가락을 넣어 친히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구름으로 임하신 영광 앞에 모세는 들어가지 못했는데 도마에게는 손으로 만지도록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너는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는 사극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아주 천한 천민들은 왕의 궁궐 앞에 감히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궁궐을 들어가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왕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자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을 본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올 수가 없었고, 주님의 성전에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인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생명의 교제를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아 구원얻었다고 하는 것은 새 시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전에 죄의 종으로, 사망의 종으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부활의 생명 가운데 주님의 몸된 성전으로 사는 삶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마가복음이 말하는 구원을 얻은 자의 표적은 마치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표적이 나타나는 구원의 삶에 대하여 제가 여러분에게 비유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왕조이든지 건국 초기부터 쇠망하는 끝날까지 똑같은 나라의 모습을 가지지 않습니다. 즉 건국할 때의 나라의 모습과 전성기 때의 나라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나라가 건국될 때는 주로 무장들이 힘을 얻습니다. 피를 흘리는 싸움을 통해 나라를 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이 되고 발전이 되는 시기에는 무장들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문인들이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이 16장에서 말하는 표적이 함께 하는 구원의 삶은 성령이 임한 오순절 초대교회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독사에게 손이 물렸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병이 나았습니다. 이런 역사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선교초기에 항상 나타났습니다. 한국 땅에 복음이 들어오고 복음이 전파될 때에도 이런 표적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든든히 서가고 말씀이 왕성해 가면 이런 표적보다도 말씀 가운데, 진리 가운데 굳게 서는 모습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혼여행으로 누리는 신랑 신부의 삶은 단 한 번, 그것도 결혼초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혼여행처럼 결혼생활을 누리겠다고 하면 그 생활은 금방 절단이 나고 말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관광지에 가서 오직 두 사람만의 행복을 누렸던 그런 날은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그런 신혼여행의 삶 보다는 매일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행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혼여행에서 누렸던 삶은 표적과도 같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언약을 따라 서로 지키며 사는 일상적인 부부로써의 삶입니다.
이제 교회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충만하게 임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새 삶이 교회에게 부어졌습니다. 부활의 권세있는 삶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므로 교회가 받은 권능입니다.
구름으로 충만히 임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게 교회에게 임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부활하신 영광을 친히 뵙고 그 얼굴 앞에 능히 서서 섬기게 됩니다. 교회는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성령을 좇아 삽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고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죽음과 질병의 권세 아래 신음하였던 삶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마음으로 확신하는 것으로 그치지 마십시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표적이 따릅니다. 새 시대의 구원의 삶이 보여지도록 나타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긴 새 능력의 삶이 나타나 보이게 됩니다. 땅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속한 새 삶이 밤과 낮으로 나타나 보여지게 됩니다. 부부가 사랑의 언약으로 함께 할 때 그 사랑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가 오늘 사랑하지 않으면 어찌 살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어려울 때나 슬플 때에도 언제나 부부가 사랑함으로 깨어 있어 서로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그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구원파의 경우처럼 결혼식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면서 자신들이 그 날 결혼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는 삶이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결혼을 언제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결혼의 언약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구원은 부활의 주님을 뵈었듯이 부활의 능력과 권세 아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신 날에 한 상에 모여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살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여 새 생명을 나타내도록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12-20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되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임한 주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귀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전에 주님을 알지 못하던 그런 몸으로 사는 것은 음행입니다. 주님과 합한 한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라고 하는 갈라디아서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구름과 불 기둥이 인도하고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성령이 거하는 성전된 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에나 말에나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거룩한 삶이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고, 새 시대와 새 삶에 속한 새 언약으로 함께 하는 삶이 우리 가운데 항상 보여지도록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출석을 잘한다는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즉 모든 일상적인 삶에 하늘에 속한 것을 분별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새 생명에 속한 것들을 확실히 증거하며 사는 삶이 시작된 것이 구원입니다. 죄와 사망을 밟는 승리의 삶을 모든 환난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능히 나타내는 거룩한 삶이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보좌 우편에 살아계셔서 주님이 여러분이 복음을 전파하는 삶 속에 함께 역사하며 나타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럴 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빙거가 나타날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멸망의 빙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천국이 어디 있느냐? UFO는 무엇이냐? 이런 헛된 질문에 답하지 말고, 성령이 거하셔서 하늘에 속한 삶을 말씀을 따라 나타낼 때에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하는 새 삶을 사시는 것이며, 이것이 곧 증거입니다.
이러한 영광된 성령이 거하는 성전으로 여러분이 몸으로 살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이 나라에 들어오기를 원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 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한 몸으로 사랑하며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나타날 때에 여러분을 주님의 제자라고 일컬을 것입니다.
가자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고
출 40:34-38절 / 이준행 목사
서 론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화끈하게 헌신하기는 쉬운데 꾸준히 헌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목숨 걸고 뛰어들 수 있겠는가?” 90%의 남자들이 목숨 걸고 뛰어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10%는 모처럼 다가 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못된 남자들도 있을 것 입니다. 목숨 걸겠다는 90%의 남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사랑으로 아내가 백화점에 쇼핑 갈 때 같이 가주고, 힘들다고 할 때 거들어주고, 반찬 맛있다고 말해주고, 매일 격려의 말 한마디씩 해줄 수 있겠는가?” 대다수 남자들이 “차라리 한 번에 목숨 걸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만큼 어떤 일을 꾸준히 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감정도 동일한 상황에 익숙해지고 적응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설레는 마음은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도 새가족들은 설레임과 뛰는 가슴으로 신앙을 간증하지만 오래된 사람들은 목회자들을 향한 실망, 헌금과 재정의 문제, 프로그램의 문제, 봉사와 헌신의 고단함, 자녀들이 다니기에는 적당해 보이지 않은 교회의 환경, 매주 비슷한 설교에 대한 지루함, 집사님들끼리의 인간관계 등의 문제들로 교회를 향한 열정이 시들시들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흥강사들이 설레임이 없는 오래된 신자들을 묵은 닭, 혹은 묵은 땅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갈 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고 설레는 사람은 새신자 밖에 없음을 기억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를 오래도록 들어주신 여러분들이 귀합니다. 설레임이 없더라도 고민하며 들어준 마음이 주님께서 주신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완성했을 때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막의 한 복판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사막의 한 복판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할지라도 앞으로 살아갈 38년을 꾸준히 ‘어오내영 은총’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며 변함없는 감사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은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세 사람밖에 없습니다. 대제사장 아론도, 눈물로 콧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미리암도,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았던 200만 명의 백성들도 일관되게 신앙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첫사랑의 설레임과 가슴 뜨거운 신앙을 변함없이 지켜나가는 일이 상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들이 38년 동안 살아갈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된 적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매일 아침마다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고, 여전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하며 보호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은 사막처럼 바싹바싹 메말라 갔고, 하나님의 은혜는 고갈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한 발자국도 밟아보지 못하고 사막에서 다 죽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출애굽기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그 이유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를 바로 세우면 구약성경 전체가 보입니다. 그만큼 출애굽기는 구약성경에서 중요한 책입니다. 출애굽기의 핵심(Key point)은 ‘제사장 나라’입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이스라엘을 불러내어서 ‘제사장 나라’로 삼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육하고 훈련하시려는 내용이 ‘십계명과 성막’입니다. 십계명과 성막은 출애굽기를 세우는 두 기둥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기도 합니다.
어르신들은 십계명 중에서도 제5계명을 매우 사랑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내용으로 설교 자주하라고 압력을 넣기도 합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권사님들과 함께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부모를 공경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통통한 장어를 사드리는 것이랍니다.(사드릴 때는 저도 꼭 부르십시오. 저도 장어 좋아합니다.) 이러한 부모님들의 소원을 담아서 말씀을 조금 바꾸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통통한 장어를 사드리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 장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나라를 세우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십계명을 주셨고,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도 배웠고, 성막도 완성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이제 제사장 나라로 살아갈 모든 것들이 완성되었습니다.
성막은 여호와의 명령이 있는 곳입니다. 1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2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2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2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2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2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3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대로 되니라” 성막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만들어진 집입니다.
출애굽기 전에도 여호와의 명령대로 만들어진 집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있으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지어진 집이 에덴동산입니다. 그 아름다운 동산을 사람들이 ‘불순종’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꿈을 성막에 담으셨습니다. “나는 너와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다”는 하나님의 소원을 담은 집입니다. 성막은 비록 조립식으로 지은 작은 집이지만 제사장 나라로서 살아갈 이스라엘의 심장입니다. 세상 나라들과 싸우는 지휘 본부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작전 계획을 듣고, 새 힘도 얻습니다. 성막이 있는 한 그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불순종하면 성막도 파괴될 것입니다.
구름이 회막을 덮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주변은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면 노래가 나오고, 감사가 나옵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이스라엘은 행진을 시작합니다. 구름기둥이 멈추면 이스라엘도 행진을 멈춥니다. 이제부터는 구름기둥이 나침판입니다. 가라면 가고, 멈추면 멈추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것이 사막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사막을 지날 때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을까요? 놀랍게도 사막에서 목말라 죽는 사람보다 물가에서 물놀이 즐기다가 빠져죽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전갈이나 뱀에 물려 죽는 경우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막을 지나는 자는 힘든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 그리고 물과 같은 것을 충분히 준비하기 때문에 힘은 들지만 죽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탈수 증세로 죽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펴보면 물이 아직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답니다. 물이 남아있는데 왜 탈수 증세로 죽을까요? 사막은 건조해서 땀이 생기기도 전에 마릅니다. 땀이 흐르지 않으니까 결국 자신이 얼마나 목마른지 모르고 걷다가 남아 있는 물을 다 마시지도 못하고 죽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 이러한 갈증을 느껴야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마름이 심할수록 마시는 물이 달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마름을 느끼는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배고파 허기질 때 만나가 내리면 감격합니다. “오, 만나!”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만나가 내리면 그 감격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투덜댑니다. “에이, 만나! 고기도 없네” 구름기둥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햇빛으로 온 몸이 타들어가는 뜨거움을 느낄 때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 “오, 구름기둥!” 하면서 감격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시원하면 구름기둥의 감격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투덜댑니다. “에이, 구름기둥! 시원한 계곡 바람 담아오는 삼성 에어컨도 없네.” 그래서 날마다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매우 소중합니다. 날마다 “내 삶이 참으로 힘들구나”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만이 구름기둥을 바라볼 때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 구름기둥! 하나님의 은혜구나”
구름기둥을 따라가는 그들의 생활을 상상해 보십시오. 구름기둥을 따라 며칠을 걸어왔더니 몸이 피곤합니다. 모처럼 오아시스도 발견했습니다. 수영도 하고, 잠도 자고, 며칠을 푹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성막을 바라보니 구름기둥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루 쉬고 싶은데 또 이삿짐을 싸야 합니다. 따라가지 않으면 뜨거워 죽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 ‘어오내영(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은총’으로 걸어온 길이 ‘왕짜증’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바뀌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좋은 환경에서, 더 편하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도무지 머물 곳이 못될 것 같은 환경입니다. 오아시스도 없습니다. 도둑떼도 가끔 출몰합니다. 가끔 뱀과 전갈도 발견됩니다. 보다 더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구름기둥이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습니다. “구름기둥이여! 갑시다.” 그런데 가지 않습니다. 짐 풀어야 됩니다. 어느 순간 ‘어오내영 은총’으로 걸어온 길이 ‘왕짜증’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바뀌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좋은 환경에서, 더 편하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사막에서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구름기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거기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막의 고통 가운데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구름기둥을 바라보면 뜨거운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하나님, 여기 열악한 환경 가운데 머물러 있어도 구름기둥 아래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런 인생을 주님이 책임집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런 사람이 ‘주책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이 있습니다. 머무는 날이 짧으면 이삿짐 바로바로 싸면서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머무는 날이 길면 ‘인내’를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 가운데 나타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
지금이 오아시스 같은데도 떠나야할 환경 가운데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이 열악한 환경이어서 떠나고 싶은데 머물러 있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두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구름기둥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름기둥은 힘든 것을 은혜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힘든 것을 모르면 구름기둥은 은혜가 아닙니다. 목마름이 있어야 물이 달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아가지만 살아가는 세상이 사막이기에 고난도 있고, 슬픔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름기둥이 움직일 때 힘을 내어서 일어서면 거기 주님이 책임지시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이 가자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출 줄 아는 인생이라면 사막의 한 복판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주책인생’으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성막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출 40:34-38 / 이상호 목사
구약 성경의 두 번째 책 출애굽기도 마지막 시간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은 율법, 즉 십계명을 받는 사건과 성막을 건축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이스라엘과 율법의 언약을 맺으심으로 저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삼으셨고, 성막을 만들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완성된 성막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성막은 광야 40년간 하나님께 제사드린 곳입니다. 후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다시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성막과 성전, 그리고 교회, 이 세 가지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 시간 본문에 나타난 성막의 역할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입니다. 34-35절
성막이 완성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습입니다. 본서 40장 이전까지에서 성막의 모든 기구를 마련하고, 이제 40장에 와서는 성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고 봉헌식이 진행됩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모세의 성막 건립 역사가 끝나자 성막 위로 구름이 덮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성막 건축 사역을 온전하게 마친 것에 대하여 매우 기쁘게 여기시며 즉각 응답하사 성막 위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백성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 한 복판에 놓여진 성막, 여기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백성의 삶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을 통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원과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 ‘성막’은 오늘의 교회를 상징하며,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막을 ‘회막’이라 한 것도 이곳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처소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즉,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지만 이제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서 무엇이 가장 소중합니까? 교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할 때 하나님은 성막에 임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신정국가를 이루었을 때에 하나님은 성전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찾아오신 하나님, 이 하나님은 성막과 성전을 통해 자기 백성을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막도 교회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과 성도가 만나는 가장 귀한 곳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귀한 곳입니까?
성막이 성막 되고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것도, 아무리 고귀한 장소라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누구든지 만나 주십니다. 어떤 흉악한 죄인도 교회 나오면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십니다. 어떤 실패자도 교회 나오면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십니다. 어떤 병자도 교회 나오면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아니,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능력을 받게 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예배에 임재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입니다. 구약시대 이방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으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통해 누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구름과 불기둥이 성막과 함께 했습니다. 38절
광야 생활의 무서운 것들로부터 항상 이스라엘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돋보이는 말씀입니다.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가 백성들을 위협했습니다.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하여 온기가 필요했습니다. 광야에는 각종 맹수들이 들끓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 모든 것들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방법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따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해를 가려주셨고, 밤에는 빛과 열을 내뿜는 불을 구름 가운데 두셔서 불기둥으로 삼으시고, 온기를 제공하셨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낮에 달구어진 바위들이 밤에 갑자기 식으면서 그 온도차를 이기지 못해 이곳저곳에서 갈라지는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형편을 일일이 살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성도들의 현재 문제를 해결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안식처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난처입니다. 교회는 가나안 땅의 도피성과도 같습니다. 민수기 35장에 보면 가나안 땅 전역에 6곳의 도피성을 만들고, 불의의 사고로 살인한 자가 이곳으로 도망하면 살려주도록 은혜의 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신약 교회의 모형이 됩니다.
우리의 원수 사탄은 우는 사자같이 성도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을 공격해오고, 성도의 건강과 물질을 노리며, 가정을 파탄시키려고 광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교회를 통해 주어집니다. 교회는 도피성이요 피난처입니다.
예화) 어떤 부자 집 처녀가 애인을 인사시키려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처녀의 부친과 청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장래 계획은 뭔가?"
"예, 저는 성경학자가 되려고 합니다."
"좋지, 존경받고, 하지만 내 딸을 좋은 환경에서 살도록 할 수 있겠나?"
"하나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결혼반지는 어떻게 마련할건가?"
"제 연구에 온 힘을 바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애들은 어떻게 먹여 살릴 건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청년이 돌아간 뒤 처녀의 엄마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 청년 어떤 것 같아요?"
그러자 남편이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업도 없고, 계획도 없어. 한 가지 더 알아낸 거라면....., 저 놈이 나를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키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일시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 권력, 건강, 가문 같은 것들은 헛된 것들입니다. 우리의 건강은 100년씩 살 것 같지만 순간에 무너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누구든지 교회로 들어온 자는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구름 기둥 불기둥이 보이지 않지만, 이곳은 주님이 지켜주시는 복된 처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의 방법으로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성막을 주시고 가나안 땅에서 성전을 주어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 것처럼, 신약시대의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성막은 백성의 진 한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을 때만 구름과 불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자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성막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였고, 성막이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서 한 달이든 1년이든 성막과 함께 거했습니다.
성도는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중심의 삶을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의 손길을 날마다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성막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36-37절
하나님의 Sign은 성막위에 떠오르는 구름으로 나타났습니다. 성막과 함께하던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것은 가나안 땅을 향해 앞으로 떠나라는 신호였습니다.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땐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성막 없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하는 것은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을 예표합니다. 본문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행군 모습은 오늘 교회를 통해 천국을 향하여 행진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미래의 천국 문제를 해결받는 곳입니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교회 세우실 것을 말씀하시고, 교회에 위대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들어가는 열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성막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성막과 함께 가나안으로 행군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교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필수적인 기관입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인도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 무디 선생이 어느 불신자에게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 불신자는 어느 교회 교인과 평소에 악감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교회에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말과 행실이 같지 아니한 위선자가 많기 때문에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 위선자들의 꼴이 보기 싫으니까요”
무디목사가 말했습니다.
“위선자들은 교회에 다녀도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당신도 끝내 교회를 부정하고 다니지 않는다면 당신도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 들어가서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위선자와 함께 마주 대고 살 것입니다. 당신은 그래도 좋습니까? 교회에서 위선자 만나는 것은 잠시 잠간뿐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교회 생활을 잘 해서 천국가게 되면 거기는 위선자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신이 진정으로 위선자를 보기 싫어하거든 그리스찬이 되십시오. 그리하면 위선자를 영원히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감동 받아 그리스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디엘 무디 생애에서)
20세기의 최대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그의 교회관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히틀러가 무서운 독재자로 등장하여 독일 민족을 엄청난 길로 몰고 나갈 때 아인슈타인은 누가 히틀러의 미친 길을 가로막을 것인가? 전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독일 민중의 존경받는 대학 교수들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지성인들은 쉽사리 히틀러의 독재정치에 굴복했습니다. 그 다음 그는 민중의 목탁인 신문기자에게 바른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독일 신문들은 붓을 모아 “히틀러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실망했습니다. 교회는 히틀러의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났고, 수 백 명의 목사들이 교회에서 감옥으로 직송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거인처럼 일어나 지식과, 진리와, 자유를 수호하였다. 나는 처음 교회를 경멸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없는 존경으로 이를 바라본다” 아인슈타인의 결론입니다.
교회관이 흔들리면 모든 신앙의 체계가 흔들립니다. 올바른 교회관을 정립한 성도는 일사분란하게 언약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나안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육적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언약의 대열 속에서 천국까지 인도함을 받습니다.
본문 38절,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이 놀라운 축복이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 위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
출 40:34-38, 엡 5:15-18 / 이성희 목사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을 맞아 성령이 기도하는 예수님의 처음 제자 무리에게 임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가정도 충만한 성령의 역사가 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 지옥을 리모델한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이 불가마와 찜질방에 너무 단련이 되어 있어서 더 뜨겁게 온도를 높이느라고 한답니다. 사실은 천당을 리모델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 성도들이 너무 뜨거워 냉방장치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지옥을 더 뜨겁게 한다니 한국사람 외에 지옥 가는 사람들이 더 고생하게 생겼습니다.
현대 사회는 뜨거움과 감격이 사라진 사회라고 합니다. 어지간한 자극이 아니면 충격도 안 받습니다. 이러다 보니 점점 범죄도 흉악해집니다. 영화나 인터넷 영상물들의 표현도 흔히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점점 충격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이제는 감동의 시대가 아니라 충격의 시대입니다. 더 뜨거워야 하고, 더 차가워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뜨거워야 하는데 차가워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차지도 덥지도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알았습니다. 차지겠습니다” 그럽니까? 뜨거워져야 하는 것이 신앙의 이치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것이 바른 이치입니다.
성령은 또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보혜사이신데 보혜사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보혜사라는 말을 여러 단어로 설명합니다. 상담자, 조언자, 위로자, 중재자, 조력자, 대변자, 지도자, 지지자, 친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용어들은 우리를 위한 다양한 성령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름, 역할, 역사는 다양하지만 한결같이 느끼는 것은 뜨거움입니다. 성령을 생각하면 좋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성령은 아무리 충만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중국 서안지방에 가면 상당히 덥습니다. 중국은 법적으로 남방에서는 기온이 섭씨 39도가 되면 직장이 휴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온도가 올라가도 정부에서는 섭씨 39도라고 발표한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46도까지 올라갔지만 정부의 발표는 39도 이상 올라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조작하는 온도입니다. 온도가 올라갈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받고 뜨거워질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만큼 뜨거워졌으면 만족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더 뜨겁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 강림을 적고 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에 바람 같은 성령이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님은 이미 우리 교회 안에 가득하십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불같은 성령님이 우리 각자 위에 임해야 합니다. 이 둘 다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교회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성령 충만을 체험해도 내가 못하면 헛것입니다. 내가 해야 합니다. 바람과 불이 만나면 불은 더 세게 탑니다. 불이 바람을 만나야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도 성령 강림의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강림하십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충만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성령 충만은 누구에게나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을 높입니다.
충만이란 말은 ‘플레로오’란 말입니다. 이 말은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충분하고 남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성령님은 충분해야 합니다. 넘쳐흘러야 합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합니다. 풍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넘치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겨우 차고, 찰랑찰랑한 상태가 압니다. 성령은 넘쳐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성령 충만한 성경의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인물들은 모두 넘쳐서 남에게 유익을 준 인물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신명기 34:9에는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와 신이 충만하니”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여호수아가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섬겼습니다. 신약성경의 마리아, 세례요한, 엘리사벳, 사가랴, 그리스도, 베드로, 스데반, 바울, 바나바등이 다 성경에는 성령이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우리 교회당 안에 가득하십니다. 이제 우리 각자에게 충만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성령 충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신약성경 본문은 성자 어거스틴이 회개하게 된 결정적 동기를 마련해준 성경구절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따로 떨어진 말씀이 아닌 모두가 하나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 충만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 충만은 악한 시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16절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그 전 절의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를 이은말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세월을 아낍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지혜자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이런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세상이 악해진다는 것은 성경에서 이미 교훈한 바입니다. 마태복음 24:12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합니다. 데모데후서 3:1 이하에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악한 세대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노아시대를 보세요. 창세기 6:5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합니다. 죄가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생각마다 못된 일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악했고, 생각들이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 입었더라”고 합니다. 성경이 그는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말은 성령 충만의 구약적 표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령 충만 없이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 충만 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령 충만한 삶이 악한 시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이 필요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절에서 2절 상반절에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셔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시험을 당하시기 전에 성령을 충만하게 준비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악한 마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우리 시험의 모범입니다. 세상에서 악한 마귀에게 이기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명품병에 들어 삼촌 회사 경리로 일하는 어느 젊은 여성이 회사 돈 6억원을 횡령하여 명품 옷 등을 구입하고 외국에 원정가서 명품을 사고 결국 회사가 거덜났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명품이 무엇이길래 돈을 훔쳐서까지 장만해야 합니까?
학교에서도 한번 왕따는 영원한 왕따입니다. 집단 괴롭힘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여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면 인터넷에 “그 녀석 혼내줘라”고 올려 그 학교에서도 견디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왕따 관련 은어를 보셨어요? 전따, 전교생에게 따돌림입니다. 반따, 반 전체에게 따돌림입니다. 은따, 은근한 따돌림입니다. 집따, 집단 따돌림입니다. 개따, 개인적 따돌림입니다. 공따, 공부 잘해 따돌림입니다. 그리고 따돌림 당하는 아이를 따돌이, 따순이라고 한답니다.
우리 사회의 자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2003년 작년 한 해동안 자살자가 13,005명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자살한 사람도 있고, 지명도가 있는 인사가 자살한 경우도 부쩍 늘었습니다. 이런 자살도미노는 유명인사들의 자살 후 일반인의 자살이 14.3배나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가 악해져 가는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악한 모습들이 사회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모습들은 디모데후서 3장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현상입니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할 악의 극치로 보고 있습니다. 악한 시대를 이기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됩니까? 인간의 지식으로 됩니까? 인간의 체면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까? 이런 악한 시대를 이기는 비결은 성령 충만 밖에 없습니다.
둘째, 성령 충만은 주의 뜻을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17절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상에서 어리석음을 누가 원합니까? 다 어리석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가 많습니다. 누가 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람은 누구나 똑똑해집니다. 성령의 충만은 지혜가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지혜 충만을 가져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주님의 뜻을 이해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분별력을 생기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현장에서 말씀하신 98개의 단어 중 30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 이해하려고 애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보통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알아야지요? 뜻을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는데 우리는 불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는데 우리가 순종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움심이 아니면 주의 뜻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지혜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서울 남산 꼭대기에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아까운 재산과 시간을 다 낭비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옆에 어느 권사님의 땅이 있었는데 그 땅에 교회를 지으라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면서 권사님에게 그 땅을 안 주시면 벌을 받는다고 하였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신축해야 하겠는데 하나님이 연동교회 이목사를 찾아가 보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자기는 주의 뜻이라고 하는데 왜 나는 아닙니까? 성령의 역사는 쌍방적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만 주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심 때문에 성령의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성령님께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 분이 생각할 때는 주의 뜻이지요. 그런데 그 분은 자기 주인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몰리노스는 “주님과 뜻이 일치하는 것 즉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달콤한 멍에라고 결론짓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이면 기쁘게 매도 맞습니다. 달게 비난 받습니다. 심지어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절대 이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 때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이 두루 퍼지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 13:52)고 합니다. 성령을 받으니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 믿으며, 말씀 받으며 기쁘지 않으면 문제입니다. 성령과 기쁨은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성령 받으면 기쁨도 받습니다. 성령 충만히 받고 늘 기쁘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찰스 윌리엄스의 짧고 재미있는 희곡 ‘그랩과 그레이스’가 있습니다. 이 희곡에는 색다른 체험을 위해 ‘이번 주에는 요가, 다음 주에는 불교, 그 다음 주는 심령술’등 각종 종교를 섭렵하는 한 남자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레이스가 성령을 언급하자 그랩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 그 좋지, 기분 내키면 한번 오시라고 그러리다. 그런데 그 기분이라는 것이 말이지 어찌나 빨리 변하는지 이내 시들고 말거든”. 그러자 그레이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목적의식은 오래 갑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이 주님의 뜻을 살피는 이 목적이 뚜렷하면 성령님은 내키면 오시는 것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충만하십니다.
셋째, 성령 충만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했으니 우리는 받아야지요. 그런데 받으라고 한 것도 받지 않고, 줘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눅 24:49). 예수님은 ‘보혜사’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6). 우리에게 임하실 성령(행 1:18)은 선물로 약속된 성령(행 2:28)이십니다. 이 약속된 선물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요엘 2:28-29에는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 “부어준다”는 말은 푹 잠기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충만하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 예언의 성취입니다(행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이라고 하였는데 임하다는 말은 ‘에페르코마이’라는 헬라어로서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몰아넣어 잠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충만하게 베푸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분들은 그래요.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라하면 “옛날에 다 해봤다”라고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과거의 경험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충만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에 보시면 성령 충만은 반복적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이미 성령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2:4)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관원들에게 잡혔을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4:8)라고 합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다메섹에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밝은 빛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다메섹의 선지자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9:17)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1차 선교여행을 할 때에 바보라는 곳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13:9)라고 합니다. 성령의 지속적 역사와 충만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은 한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수시로 계속 충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였습니다(행 2:4, 38). 그리고 나중에 다시 충만을 경험합니다(행 4:31).
니케아 종교회의는 교회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의 니케아라는 곳에서 모였던 이 회의는 주후 325년에 소집되었는데, 당시 로마의 황제로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 된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소집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의 신성을 반대하는 아리우스파라는 이단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모였던 회의였습니다. 이 때 모인 교회의 대표들인 주교들은 모두 318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318명 중 대부분이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쪽 눈을 잃어버린 사람, 한쪽 손이 잘린 사람, 한쪽 다리가 못 쓰게 되어서 절룩거리는 사람들이 306명이나 되었습니다. 두 눈을 다 가지고 있고, 두 손을 다 가지고 있고, 절름발이가 아닌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고작 12명밖에 없었습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 318명 중에서 306명이나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쳐가면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너무나 편하게 믿고 너무나 안이하게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불어넣습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이 일입니다.
결론
중국 속담에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으면 그 외의 것은 저절로 충족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만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신앙과 생활에 성령 충만하면 끝납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성막은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봉헌 기도를 마쳤을 대에 불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가득했던 불이 성전의 힘이었습니다. 이런 불이 가득한 성전이 백성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한 예루살렘 교회는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고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찬양했습니다. 교회가 필요한 모든 목적을 성취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령 충만이 있어야 교회가 목적이 이끌어가게 됩니다. 목적이 이끌어가는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사람의 생각이 이끌어가게 되고, 전통이 이끌어가게 되고, 지식이 이끌어가게 됩니다.
이 놀라운 성령 충만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날마다 성령이 충만하여 악한 시대를 이기고, 주의 뜻을 분별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충만
번제단과 성소의 임재 - 출애굽기 40:34-38 / 석원태 목사
창세기 1장은 ‘충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자존적, 독존적 충만이었습니다. 그는 태초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지음받은 피조세계의 충만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지음받은 사람의 충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형상의 충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축복충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보는 사람은 종신토록 고역하며, 흙으로 돌아가는 사망의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창 3:17~19). 거기에 나타난 자연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습니다(창 3:18).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연만물은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허무한데 굴복하며 종노릇하므로 탄식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8:19~22). 꽉꽉 차있는 충만이 아니라 뚫려버린 충만이요 텅 비어 버린 공허요 허실인 껍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자신의 자존적 충만, 독존적 충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류(아담)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현주소를 물었습니다(창 3:9). 그 후에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다시 회복될 충만의 진리를 알려주었습니다(창 3:15).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여인의 후손은 인생이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대신속죄의 죽음을 감당할 것을, 아담에게 입혀주신 죽은 동물의 가죽옷을 통하여 알려주었습니다(창 3:21). 하나님 자신의 독존적 충만, 자존적 충만은 불변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타락과 함께 인류의 구속을 계시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류구속역사와 함께 교회운동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생이 만나는 방법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내용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번제(단)였고, 성소였고, 성전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구약시대의 교회였습니다.
Ⅰ. 번제단의 임재와 충만입니다.
신약교회운동에 대한 구약의 처음 예표는 번제와 번제단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이었던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창 4:4). 노아가 번제단에 드린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창 8:21). 나중에 아브람의 제단위에, 제물을 태우기 위한 타는 횃불로 나타났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더라고 하였습니다(창 15:17).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확증의 표시였습니다(창 15:6). 여기 타는 횃불은, 하나님 자신이 그 제단과 제물 위에 임재하신다는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언약성취의 표징이었습니다. 실로 영광의 충만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 떨기나무에 나타난 불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이 큰 광경으로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출 3:2). 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다」(출 19:18)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 자신의 충만한 임재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그 아들을 잡으려 할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급히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급한 음성으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경우 아브라함은 그 영음의 충만함 앞에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창 22:11~14). 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hw;;hy] ?a'l]m')는 성육신 이전 구약시대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경우 아브라함의 번제단은 여호와 이레의 충만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여호와의 영광을 본 자였습니다.
Ⅱ. 성소(聖所)의 임재와 충만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운동은 실로 충만한 운동이었습니다. 은혜충만, 구원충만, 능력충만이었습니다. 저들은 애굽 땅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에 이르러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사막여로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 하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바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저들이 애굽을 막 떠나자마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임재였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출 25:40).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회할 때 걷어가지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졌던 이동용 천막(Tent of Meeting)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회막(출 33:7, 39:32), 여호와의 전(출 23:19), 성막(출 26:1, 6, 7, 39:33), 하나님의 집, 장막(대상 6:48), 여호와의 전 곧 성막(대하 24:27) 등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성막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출애굽기 26장과 27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막은 베 10폭(출 26:1~6), 염소털 앙장으로 덮고(출 26:7~13), 붉은 수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고, 또 해달의 가죽으로 웃덮개를 만들어 덮었습니다(출 26:14). 성막은 조각목으로 널판을 만들어 세우고(출 26:15~30)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으로 간을 막았습니다(출 26:31~35). 성막 뜰에 대한 것은 출애굽기 27장 9~21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에 들어서자마자 성막마당이 있고, 그 마당 가운데 번제단이 있고, 제사장을 위한 물두멍이 있고(출 30:17~21), 서쪽에는 휘장으로 가린 지성소가 있고, 그 지성소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휘장 앞부분에 향단이 있고, 옆에는 등대가 있고, 또 한쪽 옆에는 떡상(진설병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동서남북에 출입문이 있었고, 이스라엘 12지파는 성소 밖 동서남북에 3지파씩 장막을 치고 머물었습니다. 성소를 중심하고 거처들을 정하였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 성소계시를 받았을 때(출 25:40) 브살렐, 오홀리압을 위시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성막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저들은 모두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출 31:1~6). 하나님은 이곳에서 저들과 만나기 위하여 임재하였습니다. 모세가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 성막에 들어갈 때 그리고 하나님과 말씀할 때, 모든 백성들은 그 동서남북의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섰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그 엄위로운 광경 앞에 다 일어나 각기 자기 장막에 서서 경배하였다고 하였습니다(출 33:7~10). 특별히 대속죄일은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깨끗게 하는 큰 날이었습니다(레 16장). 제사장이 거룩한 옷을 입고 자기와 자기 가족과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제물로 소를 잡아 그 피를 속죄소에 뿌릴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막위에 가득하였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며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은 이 충만한 하나님의 자기 임재를 보고, 저들의 죄가 사유함을 받은 줄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 역사(役事)가 마쳤을 때 구름이 그 회막 위에 덮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 천막에 충만하였습니다. 그런 경우 모세가 그 성막에 들어갈 수 없으리만큼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출 40:34~35). 그 구름이 성막위에서 떠오를 때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발행하였고, 그 구름이 떠오르지 아니할 때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하였습니다(출 40:36~38). 불기둥과 구름기둥 그리고 성막! 이것은 이스라엘 40년 광야교회 생존의 전부였습니다.
①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기 실존을 나타내는 영광의 계시행위였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표적이었습니다.
② 그것은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구원종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③ 그것은 광야교회를 인도하는 주체가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임을 보여줍니다.
④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보호를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구름은 낮에 더위에서, 불기둥은 밤의 어둠과 추위에서 저들을 지키는 보호였습니다.
⑤ 그것은 이스라엘의 신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저들 광야 교회운동의 동하고 정함이 온전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에 의해서 좌우되었습니다(민 9:15~23). 이스라엘의 밤낮은 전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요일 4:10). 인간이 범죄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 편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며 찾아오셨습니다(창 3:9). 그리고 다시 만나자고 하는 구원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인류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습니다(창 3:15). 하나님이 그분을 보내어 사람들과 만나기까지 오실 그분을 알려주신 계시가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와 만날 장소를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이 족장시대 이전에는 번제단이었습니다. 들판 가운데 따로 높은 장소를 구별시키고, 거기에 제물을 잡아 쪼개어 불을 태워 번제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아벨이, 노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리고 욥이 그런 장면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 자신의 임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와서 만나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모세시대에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생활헌장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기 영광이 온 시내산에 충만하였습니다. 모세가 그 영광에 접하여 변화된 얼굴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이 그의 빛나는 얼굴 때문에 수건으로 가리울 정도였습니다. 충만하신 여호와의 영광의 영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자기백성을 만날 특별한 장소를 계시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성막 혹은 성소, 회막, 여호와의 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장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성막을 짓게 하고, 거기에서 이스라엘과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러 그 집에 임재할 때 그 회막의 안과 밖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나타내신 하나님 자신의 임재였습니다. 영광의 임재, 충만의 임재였습니다. 이것은 세계민족 중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었던 구원은총이었습니다. 그 하나님 자신의 임재의 충만은 바로 이스라엘의 생존이었습니다. 인도였습니다. 보호였습니다. 아니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왔을 때 저들은 멸망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사막에서 살았습니다. 육신이 살았습니다. 영혼이 살았습니다. 온갖 적군의 침략에서 살았습니다. 마침내 약속의 땅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구약시대의 번제단이나 성소는 신약시대 교회의 예표였습니다. 그 번제단과 성소의 충만한 하나님의 자기 임재는 바로 신약시대의 충만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의 충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임재를 예표하신 것입니다. 화육강세의 충만⇒성령강림의 충만⇒말씀(계시)의 충만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충만을 나타내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은혜충만, 구원충만, 예수충만, 영생충만, 진리충만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광충만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경험하라
출 40:34-38 / 조재진 목사
군대에서 장성급 지휘관이 있는 부대에는 지휘관이 부대 안에 있을 때와 없을 때를 기로써 표시합니다. 사단장이 부대 안에 있으면 별 두개를 표시한 사단장 기가 게양됩니다. 그러다가 사단장에 출타하면 기가 내려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장 깃발이 올라가 있으면 모든 부대원들은 정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근무합니다. 사단장이 근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드디어 모세는 성막의 모든 기구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세우고 성막 안에 기구들을 배치했습니다. 그러자 구름이 성막에 덮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해졌습니다. 완성된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놀라웠든지 모세조차 감히 성막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성막에 거하신다는 것을 기로 표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성막 세우는 일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동행하시는 일이 구약성경처럼 분명하게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한 것이 두 눈에 보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는 어떤 표시가 늘 우리를 따라 다닌다면 얼마나 신날까요?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생생한 하나님 체험,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된 삶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모세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막을 세운 일을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성막을 세우는 일을 두번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저렇게 명령했고 모세는 그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라’ 라고 하면 될텐데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에게 성막의 식양을 받았습니다. 그 모양과 치수를 하나님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이제 그 식양대로 성막과 성막의 기구를 만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그대로 만들었다라고 말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다시 반복해서 그 모양과 치수를 말하고 그대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겨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 모양 하나 하나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군대에 갔다 온 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지휘관이 명령을 내리면 사병들은 그 지위관의 명령을 복창합니다. 지휘관의 명령을 똑같이 복창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휘관의 명령이 말단까지 그대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휘관은 ‘5분간 휴식’, 그랬는데 중간 간부가 자기가 좀더 쉬고 싶어서 ‘10분간 휴식’ 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지휘관의 명령은 그대로 전달되어야 좋은 군대입니다. 중간에서 묵살되거나 재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지휘관의 명령을 복창하게 합니다.
성막을 세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성막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순종하여 세워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대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했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있으라고 했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풍랑이 일어나기도 하고 잠잠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다른 피조물에게는 물리적인 강제력이어서 말씀하신 그 즉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지각을 사용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거부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강제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한다고 친구처럼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설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예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홍수가 나는 것을 보고 경이롭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복창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왕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복창하고 시행하듯이 그렇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에는 다른 것이 더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되더라도 군대의 부하는 지휘관의 명령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부하가 자기 생각에 좋다고 지휘관의 명령을 자의로 재해석하기 시작하면 그 군대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맞게 고쳐서는 안됩니다. 재해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믿음의 관건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곧이 곧대로 듣고 순종하는 그런 순진한 믿음의 성도들이 많지 않습니다. 자신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자신들도 성경을 해석할 수 있고, 자신들도 알만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데 이상하지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나름대로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가운데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한국교회가 병들어 가기 시작한 것은 주석성경이 나오면서 부터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하면 성도들은 자리에 앉아서 주석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의 저 말은 주석적으로 틀렸네, 우리 목사님은 주석도 안보는가봐. 아니 저 본문을 왜 저렇게 해석하지...’ 그렇게 설교를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은 높아갔는데 이상하게 교회는 더 많은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안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정도 이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해야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 논하거나 공부해서 지식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순종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을 설천해야 할 생명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명령을 받은 군인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복창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사역을 위한 기름부음
두 번째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성막의 기구를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모든 기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관유를 취하여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여기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거룩하게 사용되어진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기름을 바른 순간부터 언약궤는 더 이상 단순한 상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떡상은 그냥 단순히 상이 아닙니다. 기름을 바른 순간부터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의 사건을 통해 구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성막에는 죄사함의 은혜가 충만해졌습니다. 성막이 질병을 치료하는 곳, 실패한 자들이 다시 회복되는 곳,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성막의 기구에만 기름을 바른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직을 수행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도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반드시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겐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은 열두제자들에게 사역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보십시오 증인되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힘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부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없는 사역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힘, 자기 능력, 자기 생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아니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지 어찌 당신이 내게 와서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놀랍니다. ‘나는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요. 나는 죄인인데 이것은 거꾸로 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례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온 세상의 죄를 당신이 다 짊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경험은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밧모섬의 사도 요한도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경험,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순간부터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런 말을 듣고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이 열리는 경험 그리고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붙잡아 주리라’ 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면 아마 그 때 부터는 어떤 핍박이 와도 넘어지지 않고 천인이 와서 반대해도 끄떡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사역은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그렇기 때문에 성막의 모든 기구에,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붓고 하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기름부음의 사건을 통해 평범한 기구가 거룩한 구원론적 사역에 사용되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잘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세 번째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세우고 그 모든 것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했을 때 그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히 임했습니다. 34-3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음이며”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지금까지의 수고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도록 성막에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임재의 사건은 하나님의 인치심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만든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이요 보증입니다. 성막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을 가시적으로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한 사건도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의 제자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였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치심입니다. 그곳에 모인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바로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라는 확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볼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새로운 분파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에겐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냥 갈릴리 사람들 몇이 모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그 시대에 사용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그들에게 권능이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주의 제자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능력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이 때부터 제자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핍박과 어려움도 다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용기와 힘이 생겼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체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다릅니다. 초대교회 주님의 제자들은 요즘 우리들의 모습하고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신만만한 삶으로 바뀌어집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에겐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형통한 자가 됩니다. 넘어져도 일어납니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해집니다. 궁극적으로 천국이 있기 때문에 ‘죽어도 살겠고’ 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실패와 염려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고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리고 우리와 동행하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앞길을 막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 임재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가 성막에 일어났습니까? 모세가 무슨 특별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말씀에의 철저한 순종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 가운데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언제든지 성령님이 우리와 함게 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임재의 역사가 생생하게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네 번째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은 이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시작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삶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36-37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너무나 간단한 방법입니다. 구름이 움직이면 이스라엘이 움직이고 구름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꼼짝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그 자리에 있고 싶어도 구름이 움직이면 그들은 장막을 걷어야만 했습니다. 반대로 그들이 아무리 더 가고 싶어도 구름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배워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먼저가고 하나님이 뒤에 따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서가고 싶어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없이 어떤 일을 결정하고 우리 스스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다가 잘되면 여전히 기도하지 않고, 잘안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실패하면 그만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계신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앞에 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방법은 틀립니다.
적어도 우리는 두가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름이 먼저 움직여야 됩니다. 그리고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움직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계획하고 우리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왜 성도들이 실패합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친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의 역사와 동행의 비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겐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가 없습니까? 우리의 가슴속에 기쁨이 없고 하나님의 생생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것은 바로 순종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걸어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것에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역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출애굽기 40:38, 사도행전 16:1-5 / 이성희 목사
지난 해 말 캐나다 앨마의 성안드레 장로교를 찾았습니다. 이 교회는 게일 목사님을 한국에 파송한 교회입니다. 우리교회 1대 목사님을 파송한 그 교회는 너무 작아 은혜로웠습니다. 7년 전 영국 웨일즈의 하노버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목사님을 파송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도 작은 교회인데 그 날 30여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은 아주 많이 모인 날이었는데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다가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영어로 설교하는데 사실은 회중석에는 한국인이 더 많았습니다. 이 작은 교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사이즈(규모)가 아닌 내면의 믿음과 열정 때문입니다.
교회의 원형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의 성막입니다.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은 턱없이 작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길이가 100규빗이었으니 50미터 정도밖에 안되었고, 너비가 50규빗이었으니 25미터 정도였습니다. 아주 작은 집이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세우고 정착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성막을 대신하였습니다.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완공하였을 때 하나님은 또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초대교회는 무형적인 교회였고, 가정이 교회였고, 지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이후에 교회는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현재와 같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교회의 변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집이 그 때마다 모습을 달리했지만 하나님은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성막이나 성전이나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공통점은 하나님이 그 집을 완성한 다음에 기뻐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집에 영광이 가득하게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교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은 집입니다. 성경에는 반복해서 성막을 짓는 과정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하였더라”는 말씀이 계속됩니다.
지금도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설 때마다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인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를 보세요. 그 당시의 교회들은 규모로는 엄청났습니다. 외형적인 화려함을 갖추었습니다. 갖출 것은 죄다 갖추고 빠진 것이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눈에는 가난했고, 가련했고, 부족했습니다. 화려한 외형에 비하여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지금의 터키인 옛날 소아시아에 가보면 옛날 화려했던 교회의 폐허가 남아 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의 폐허에 가보면 기둥 하나가 두 사람이 껴안을 정도로 굵고 큽니다. 그 기둥으로 봐서 그 교회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한 말씀은 칭찬밖에 없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 좋던 교회가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을까요?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 사원이 있습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이 세운 화려한 성당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투르크족에 의해 이슬람에게 넘어간 교회입니다. 아름다웠던 성화들이 다 훼손되고 지금은 이슬람의 흔적들이 내부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보실 때마다 하나님이 슬퍼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형편없는 인간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하고 교회 안에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제외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나의 불완전, 나의 부족, 실수로 하나님의 교회가 기쁨이 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합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 우리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가 교회를 잘 지켜나가고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규례를 잘 지키는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4절에는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라고 합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이방인의 할례문제로 총회에서 결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 엄수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서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이 유대주의적 폐쇄성을 버리고 이방인을 한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결정 사항을 의미합니다. 총회가 결정한 것을 자키게 하였습니다.
규례-란 말은 헬라어로 ‘도그마타’로 누가복음에 3회, 바울서신에 2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생각한다’는 의미의 ‘도케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로마 황제의 칙령을 뜻했으나 여기에서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사항을 가리킵니다. ‘교리’를 뜻하는 ‘도그마’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결정사항을 준수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회에서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이 시민의식입니다.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들은 서로의 약속입니다. 초록 불에는 가고, 빨강 불에는 서는 것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안 지키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거리를 우측보행하자고 합니다. 이것도 서로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서로가 불편합니다. 규칙을 뜻하는 ‘rule’의 어원은 회초리(rod)를 뜻하는 라틴어 ‘rugula’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신 것이 규례입니다. 이 규례는 잘 지켜야 합니다. 출애굽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율법조차도 필요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규례가 필요합니다. 규례를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10계명입니다. 이 10계명을 613개의 계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의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의 조례는 39가지나 되었습니다. 200규빗 이상 걷지 말라는 조례도 있고, 안식일에는 우물에 물을 깃지 말라는 조례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셨습니다. 밀밭 사이를 가시가다 밀을 따서 손을 부벼 드셨습니다. 손으로 따는 것이 계명을 어긴 것이고, 부비는 것이 또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6에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보장 없는 명령은 없습니다. “보모님을 공경하라 그리하면 장수하리라”고 하십니다.
시편 89:31-32에는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규례를 어기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하신다고 합니다. 레위기 4장에는 누구든지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면”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 계명을 범하면 수양을 잡아야 합니다. 회중이 계명을 범하면 수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족장이 계명을 범하면 숫염소를 잡아야 합니다. 평민이 계명을 범하면 암염소를 잡아야 합니다. 왜 잡아야 합니까? 잡는 게 뭐지요? 죽인다는 뜻입니다. 왜 짐승을 죽입니까? 나를 죽이는 대신 짐승을 죽이는 것입니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면 이것은 하나님께는 큰 죄입니다.
수도승의 격언에는 “방법이 없이 싸우는 자는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규례가 필요합니다. 라틴어의 규율이라는 뜻의 ‘disciplina’는 가르침, 수업, 훈육, 질서 그리고 무엇에 다가가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규율이란 질서와 방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규례는 지켜야 의미가 있습니다. 규례는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키지 않는 규례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우며 방해꺼리가 될 뿐입니다.
규례 혹은 규율은 훈련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훈련이란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discipline’이란 말은 훈련이라는 말인데 책벌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책벌은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훈련의 의미입니다.
우리교회의 1914년 얘기는 감동적입니다. 그 옛날에는 교적부 제일 뒤쪽에는 책벌부가 있습니다. 그 해에 두 사람이 벌을 받았는데 한 분은 음주하고 부녀자를 희롱하므로 출교를 당했습니다. 또 한 분은 집사인데 주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벌을 받았습니다. “집사로서 주인을 불수하므로 책벌함”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원래 칼뱅이 훈련을 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크고 작은 규례를 지키지 않는 것은 벌을 주었습니다. 벌은 곧 훈련이었습니다. 그 때는 벌을 주었고 벌을 받았습니다.
치리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훈련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벌을 줄만한 권위가 있어야 하고, 벌을 받을만한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벌도 주지 않고 벌을 받고 있을 교인도 없습니다. 우리교회 가까이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는데 벌을 받고 우리교회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규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규례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만든 규례지만 성경에 근거하여 만든 것입니다. 총회나 노회가 당회가 만든 규례도 모두 지켜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만든 법을 지키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말을 잘 들으면 아버지가 기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말을 잘 들으면 기뻐하십니다. 규례를 잘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됩시다.
둘째, 믿음이 굳건해 지고 성장하는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5절에는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합니다. 규례를 잘 지키는 교회의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사항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의 결과는 믿음이 굳건해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총회, 노회, 당회의 결정은 순종하여 지켜야 할 책임이 모든 성도에게 있습니다. 이런 순종하는 자세가 교회가 굳건해지는 비결입니다.
어떤 결정이 있으면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일치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의 몸을 보세요. 다리가 둘이지만 한 방향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눈이 둘이지만 같은 쪽을 봐야 바르게 보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가 되고 일치해야 몸이 건강한 법입니다.
빌립보서 2:2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합니다. 마음도 사랑도 뜻도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면 교회가 재미있고, 일이 잘 되고, 믿음이 굳건해지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에베소서 4:3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기뻐하십니다. 몸인 교회는 몸이 하나 되어야 성장합니다. 우리 몸의 장기가 각각 다르게 움직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건강하지 못합니다.
최근에는 건강한 교회를 많이 말합니다. ‘교회건강’이 화두입니다. 일반적으로 요즘에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부자 되세요”를 제치고 “건강하세요”가 차지했습니다. 요즘에는 웰빙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웰빙이 돈이 많은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화목하고, 평안하고, 질서 있고, 조화를 이루고, 관계가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 상태가 웰빙입니다.
교회성장은 이루었지만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성장에 대한 비전을 가진 목회자가 있어야 하고, 교회성장에 대한 비전을 가진 성도가 있어야 하고, 절대 고칠 수 없는 고질적 병(terminal illness)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어느 왕이 모든 의사들을 모아놓고 건강과 장수에 대한 모든 지식을 책으로 집필하라고 하였습니다. 1만 페이지가 없는 많은 양의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왕은 너무 많으니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두꺼운 책이 되었습니다. 왕은 다시 요약해서 오라고 했습니다. 1천 페이지의 긴 글을 한 페이지로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페이지도 많았습니다. 왕은 다시 간단히 한 줄로 줄여서 오라고 했습니다. 의사들이 모여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한 줄로 만들었습니다. “발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우리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머리는 차갑고, 발은 따습고, 배는 좀 골아야 한다고요. 머리는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발은 부지런하고 뜨거워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믿음이 있지만 믿음이 약하면 금방 변질되고 맙니다. 굳센 믿음을 가져야 변하지 않고 든든합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령이 있다는 것과 성령 충만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수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78.6세입니다. 그런데 건강수명은 68.6세입니다. 한국인들은 10년간은 질병과 사고로 인한 통증, 신체적 불편, 정서적 불안 및 우울감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남성의 기대수명은 평균 75.1세이지만 건강수명은 67.5세로서 7.6세 차이가 납니다. 여성의 기대수명은 81.9세이지만 건강수명은 69.6세로서 12.3세 차이가 납니다. 국민 41%가 만성질환을 경험했고 비만도 23%나 된다고 합니다. 10년 정도는 아프게 살다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한삼서 2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굳세어지고,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거룩한 장소였던 성전이 종교적 과시의 노천 화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대형건물을 보세요. 화려한 장식과 아름다운 건축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나라가 유럽교회처럼 쇠퇴하면 예배당은 박물관이나 관광지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래학자 레너드 수윗은 ‘기성교회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교인수가 제일 적은 교회를 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즘의 기성교회들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주류교단들은 전자기술이나 스크린이나 디지털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변화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교단은 경직성을 가지고 있고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교단을 탈퇴하기도 하고 교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병들고 죽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사람이 찾지 않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그러하고, 지금 유럽의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쇠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건강하고, 믿음이 굳건하고, 성장하는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결 론
어느 목사님이 쓰러지셔서 증환자실에 계신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위로 가느냐, 아래로 가느냐 하는 초절박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 올라가면 일반 병실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영안실입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삶입니다. 우리 사회는 중증사회입니다.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사회가 위로 올라가게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0:38에는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고 합니다. 교회는 삶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희망을 말하고, 교회가 가는 길을 세상이 좇아오고, 교회가 하는 일을 세상이 박수치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삶의 지혜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