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대선 관련 논의는 선거 논의 게시판으로 해주세요 ^^
정치인의 말에서 논리성이 결여 된다면 그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다음의 말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KBS라디오 인터뷰라며 연합뉴스가 보도한 내용이다.
‘박근혜 측근인 이정현 전의원은 5.16은 51년 전 이야기로 이미 역사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비판할 수 있지만, 시대적 상황 이라는 게 있다. 이어 무장공비가 청와대 앞까지 쳐 들어오던 시절과 똑같이 역사를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고 지적 했습니다.’
뉴스의 잘못된 보도이거나 이정현 전의원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내용이다. 두 개의 단락을 별개로 보든 이어보든, 도대체 이정현 전의원 입장을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앞서 보도의 요지는 ‘이에 대해 박 전위원장측은 과거는 역사에 맡기자며 논란을 일단락 지으려는 분위기입니다.’라 하고 있다.
이 말이 이정현 전의원의 소신이라면, 박근혜 경선후보는 다소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이정현 전의원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가 이전에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 했고, 이어‘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 했으니,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누가 그 시대에 안주하여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타국에 인권을 요구하고, 국민의 민주화 욕구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이 시기에, 공화국을 향에 총을 겨누고 군부독재를 연 5.16쿠데타가 그 시대상황이 어떠했더라도,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구국의 혁명‘’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시기 우리의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을 이끄는 執政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시기까지 우리의 대외 영어공식 명칭은 ’Republic of Korea'다.
Republic의 어원을 찾는다면 라틴어 ‘res publica(레스 퍼블리카)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로마의 키케로가 정치공동체 이념으로 확립했다고 전해지지만 ,당시만 해도 귀족 중심의 정치공동체였다. 시대의 변화를 생각하면 지금의 민주(Democracy)와는 거리가 있는 체제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크나큰 시대적상황과 내용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두 밀레니엄을 사이에 두고 키케로가 꿈꾸던 공화정을 무너뜨린 카이사르와 쿠데타로 대한민국 공화정을 유린했던 박정희는 여러모로 닮아있다. 닮았다 보기에는 그렇고 닮으려고 흉내 내려다 말로가 유사 했던 것 갔지만, 아무튼 재미있는 사실들을 엿볼 수 있어 한편으론 아이러니하다.
‘aleu iacta est'(알레아 약타 에스트)는 카이사르가 수도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널 때, 병사들을 향해 던진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 졌다‘란 라틴어 말이다. 일설에는 그리스어로 말했다고도 한다. 당시 로마에는 그리스어 사용이 배움의 척도였다. 우리의 박 장군은 수도 서울을 공략하기 위해 한강 다리 위에서- 조갑제 옹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읽어보면- ’한웅진 준장의 증언에 따르면, 박 장군은 총격전이 오가는 상황에서 다리 난간을 잡고 물끄러미 강물을 내려 보더니, 일본말로 “주사위는 던져 졌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어 구사정도는 친일의 척도가 될 수 있었다.
조갑제 옹의 讚朴正熙歌중 ‘독서습관’편을 보면, 박정희는‘나폴레옹 전기’ ‘풀루타크 영웅전’등은 되풀이해서 읽었다고 하니, 아마 카이사르의 ‘내 전기’도 접했을 것이다. 더구나 조갑제 옹은 박정희의 우상이 나폴레옹이며, 많은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며 그 대표적인 것이 두 번의 쿠데타라 적고 있다- 조갑제 옹은 분명 유신도 쿠데타라 명시하고 있다- 어떻든 박정희가 소년시절부터 황소를 몰며 나폴레옹을 읽었다 하니, 유명 카피라이터 이기도한 카이사르의 명언들(주사위는 이미 던져 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져도!)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누구보다도 카이사르를 많이 공부하고 닮으려 했으니까? 그러나 공화정을 겨누어 독재자가 된 것도 그렇고, 이를 염려한 측근에게 살해됨으로써, 박정희는 오히려 카이사르와 더 닮아있다. 하지만 박정희가 눈을 감으며 속으로 ‘김재규 너마져도!’라고 외쳤는지는 모를 일이다.
본인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이르고 전두환 군부독재가 막을 내릴 무렵 군에서 제대했다. 전방 일반하사로 제대하던 그때, 연대장의 면담이 있었다. 연대장이니 계급은 대령 급이다. 지금 기억으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육사출신으로 알고 있다. 면담의 주제는 제대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함에 올바른 국가관에 관한 내용 이었다. 하지만 훈시 내용은 올바른 국가관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작금의 어지러운 사회상에서 군이 분연히 일어 난 다면, 여러분은 군에게 아낌없이 지지를 해 주어야한다’는 내용 이었다. 전두환의 친위 쿠데타 의도가 갑자기 머리를 스쳤다. - 12.12처럼 대령 급 정도면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 시대는 오지 않았지만 만약 그러한 의도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는 요원 했을 것이다. 하기야 작금의 정부는 모를 일이지만?
역사란 무엇인가?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멀게는 2000년을, 가깝게는 5년 전 일을 두고, 여러 채널을 통해 대화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역사가 아닌가? 그래서 카이사르에게서 박정희를 보고, 박정희에게서 전두환을 보고, 전두환에게서 또 누구를 느낄지 모를 일이다. 때문에 역사적 평가는 냉정해야 하며, 미래는 역사에서 배운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이며, 역사를 소홀이 할 수 없는 이유다. 적어도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또 역사 이야깁니까?’가 아니라, ‘제 아버지의 5.16은 당시 상황에서라도 엄연한 공화정에 대한 쿠데타이며, 저의 아쉬움은 혁명공약중 제6항을 지켰으면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도 아니라면 유신이야말로 있어서는 안 되었던 일로 그 전에 물러나야 했었고, 또 그도 아니라면 총탄에 쓰러지시기 전에, 인권을 유린당한 많은 이들에게 사과를 드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대선에 나서는 진보적 사유입니다’라고 했어야 한다. 이는 참으로 많은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개발독재가 전적으로 우리에게 경제성장을 가져다주었다’는 명제는 여러 면에서 불편부당한 논리다. 경제개발계획의 모태가 이미 제2공화국의 일이였다거나, 미국의 전략적 목적과 부합 되었다는 내용은 차치 하고라도, 지금의 경제성장은 당시 노동자들의 부당하고 고된 희생과 눈물겨운 우리 어버이들의 철저한 교육열이 없었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퇴보하고 ‘인혁당사건’이 보여 주듯 인권은 철저히 유린당했다. 때문에 개발독재의 경제성과에 그 공을 일부 돌리더라도-하긴 박정희의 핵을 담보로 한 미국과의 협상은 지금 북한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한류가 되었으니- 그들의 희생 앞에서는 5.16이나 유신을 ‘구국의 혁명’이라거나 ‘불가피한 선택’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닮고 싶지만 닮기 어려운 것이 역사에 빛나는 영웅들의 사유와 신념이다. 박정희가 일본어로 한강다리 위에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말했다 지만, 당시 카이사르의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카이사르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원로원 최종권고’가 있었고, 그마져도 조국 로마를 공격해야하는 아포리아적 사유를 이겨내며 병사들에게 외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이어 ‘나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 주사위는 던져졌다!
조갑제 옹의 영웅 박장군은 어떠했을까? 그의 말을 빌리더라도 박정희가 데모유치 계획을 세우는 등 일관된 쿠데타 계획은 이미 많은 이들이 공공연한 사실로 알고 있었으며, 이를 인지한 윤보선이나 장도영등은 묵인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혁명공약 6항을 박정희가 지킬 줄로 생각 했을 것이다. 순진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었다는 표현이 정답일 것이다. 치졸한 계획, 公約이 아닌 空約남발, 이것이 적까지 품을 줄 알았던 카이사르의 사유와 신념에 미치지 못함이다. 또한 한강다리위의 중얼거림도 2차 꼼수를(제2안: 일정한 지역을 점거하고 정부와 담판한다) 위한 발언이며, 미화하면 大事에 나선 장수가 가족안위를 염려한 회한이었다. ‘나중에 한웅진은 박정희에게 물었다 “형님, 그때 강물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 했습니까?” “가족 얼굴이 강물위에 떠 오르더군”, 박정희의 대답이었다.’ 좀 우스운 상상을 해보면 ‘그래 조금만 참아, 이 나라는 너희 것이 될 수 있어, 주사위는 이미 던져 진 게야!’란 생각은 아니 했을까?
고금을 통한 군부독재자의 말로는 불행 한 것이 다반사라 말할 수 있다. 작금의 중동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고려의 무신정권, 일본의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쿠데타로 정권을 취한 체제는 종종 측근에 의해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권력자에게 중용되고 있던 사람이, 어느 시기부터 소외 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카이사르에 심취했던 시오노 나나미는 말하고 있다. 카이사르가 칼에 맞으며 외쳤던 외마디 ’브루투스 너마져도!‘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칭한 것인지, 데키우스 브루투스를 칭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둘 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카이사르에게 보살핌을 받은 측근 이었다. 또한 카이사르는 수도개발 사업 추진을 위해 원로원 회의를 개최한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카이사르측근 5명을 포함한 공화정 복귀 주의자 총 14명에게, 무려 스물세 군데를 난도질 당 했다. 어떻든 공무 중 당한 일이었다. 영화 ’친구‘에서의 외마디 ’너무 많이 묵었다 아이가‘가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이날은 'The ides of March' (3.15 ),우리에겐 부정선거로 기억 되지만, 서양에선 카이사르가 죽은 날로 기억 하고 있다.
그럼 조갑제 옹이 그리는 각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 했을까? 김재규 또한 각하의 측근임에 틀림없었고, 역시 차지철과의 갈등 구조를 볼 때 소외감을 느끼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분위기와 장소로 볼 때, 낮에는 막걸리를 마시는 생쇼를 하고, 저녁에는 당시 서민들 에게는 불법 이었던 시바스리갈에, 딸보다도 어린 여인들과 돌림노래나 부르던 자리였다. 그의 마지막 임종도 20살내기 여자가,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에 대한 대답에 -어느 유행가에서 들었을 법한-“응, 나는 괜찮아...”였다. 차라리 ’김재규 너마져도!‘를 있는 힘을 다해 외쳐야 했었다. 때는 정확히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총살된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이다. 이때 일본 전범들에게는 특별한 날 이었으니 이는 나중에 이어 가겠다.
불가지론이라 하면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학자들이 사유한 Agnosticism(不可知論)이 우선 떠오르지만, 한자어 知자를 之로 바꾸면 간단히 '不可論', 좀 강한 어조의 반대하는 논점이 된다. 오랜 외국생활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난 박근혜 경선후보의 정치적 사유와 신념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적 행보가 그와 80%이상 동시대를 살아온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또한 그가 유력 대선주자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에도 대해서도,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나는 유년시절 그의 아버지 시대이기도한 그때에, 그릇된 역사와 신념을 배웠고, 그의 아버지 영향 이기도한 군부독재 밑에서, 사유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바쳐진 인식을 제외하고는, 되도록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박근혜 대통령 不可之論에 대한 나의 시각을 시간 나는 대로 이곳에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