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와 다소에서의 바울
1. 바울의 초기 행적에 대한 성경의 증거
회심 이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바울은 갈1:17-18에서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라고 설명한다. 더글라스 레드포드의 정리에 따르면, 다메섹에서 일어난 바울의 회심은 AD 34년이고 그가 아라비아로부터 예루살렘에 방문한 때는 AD 37년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가 바울의 아라비아에서의 행적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회심 후 3년만에 이뤄진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행9:26-30은 바울이 그가 핍박하던 복음의 변호자가 되었으나 예루살렘 제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위협을 받았음을 알려준다. 행9:30은 “형제들이…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기록한다. 이 후 AD 46년, 바나바에 의해 사울이 다소로부터 안디옥으로 부름받을 때까지(행11:25) 훗날 바울이라 이름하는 이 사울은 약 10년간 그의 고향 다소(행22:3)에 머물렀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합치된 견해다.
그로부터 약 12년 후인 AD 58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음을 상기한다면, 회심 후 체포까지의 그의 행적은 약 13년(아라비아 3년, 다소 10년)의 준비와, 약 12년의 본격적 사역으로 크게 나눠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아라비아와 다소의 행적들 사이 예루살렘에 방문했던 일은 보다 사려깊은 관찰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바울은 아라비아에서의 3년이 그의 사역에 있어 충분한 준비기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바울의 다소행은 그의 자의라기보다 타의에 의한 도피에 가까운 것으로 행9:29-30이 기록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도 그는 그 특유의 성품대로 담대했다.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변론에 대해 누가는 두 번이나 “담대히(παρρησία)”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행9:27, 29) 이는 3년 전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 직후 “힘을 더 얻어”(행9:22)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명한 것과 확신이나 방식에 있어 유사함을 보인다. 아라비아에서의 3년은, 그리고 예루살렘 방문 이후 다소에서의 10년은 이 후의 사역에서 보이는 바울의 신학적, 사역적 확신과 완성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2. 아라비아의 위치와 바울의 행적
아라비아는 건조한 사막으로 불리던 곳이다. 바울이 당시 ‘아라비아’라고 이름하는 지역에 머물던 시기에 그 곳은 나바테아 왕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바테아 왕국의 중심지는 나바투(훗날의 페트라)였고 아라비아 반도 북동부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아울러 시리아(수리아)의 다메섹까지를 포함하는 영토를 사실상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주후 105년 로마황제 트라야누스가 나바테아 왕국을 로마제국에 편입시키기까지 나바테아는 로마의 인접왕국으로서 건재했다. 한 편, 고후11:32에서 ‘아레다 왕’으로 간단히 언급되듯이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의 나바테아 왕은 사료에서 발견되는 대로 아레타스 4세(9BC~40AD)였을 것이다.
아라비아에서의 3년이라는 숨은 시간(hidden time)에 대해 아직까지 합치된 견해는 없다. 다만 바울의 아라비아 행적에 대해 크게 4가지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첫째, 그가 3년간 아라비아에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며 계시를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Moo) 이 주장에 따르면 바울은 아마도 이 곳에서 ‘갈라디아서’에서 드러나는 ‘이신칭의’ 교리를 정교화했을 것이다. 둘째, 그가 아라비아에 교회를 개척하러 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Hengel and Schwemer) 그렇다면 이 시기는 바울의 진정한 1차 선교가 된다. 셋째, 그가 앞으로의 대대적인 선교활동을 준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Timothy George) 이 견해는 첫째와 둘째 견해를 아우르는 듯 하고 설득력 또한 크다. 어떠한 모양으로든 그의 3년간의 시간은 장래 사역을 위한 준비가 되었을테니 말이다. 넷째, 바울이 3년이라는 시간 대부분을 실제로는 다메섹 전도에 매진했고 아라비아에는 단지 얼마간 내려갔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행9:19-25을 연대기적으로 해석한다. 특히 행9:23의 “여러 날(ἡμέραι ἱκαναί)”을 “많은 날” 혹은 “충분한 날”로 직역하여 이 시간이 바로 3년을 뜻하는 것이며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이 시기동안 바울이 다메섹에서 전도활동에 매진했다고 한다. 요컨대, 이 마지막 견해는 바울의 3년을 다메섹에서의 3년으로 보는 것이다.
바울의 숨은 3년에 대한 성경본문들과 또 이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비교해볼 때 위에서 다룬 셋째 견해, 즉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앞으로의 대대적인 선교활동을 준비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있어 보인다. 우선 아라비아를 다메섹으로 축소하여 해석한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아라비아를 언급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된다. 또한 그가 만일 아라비아에 교회를 개척하러 갔다면 사도행전이나 이 후의 어떤 서신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이 재차 언급되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단순히 중세 수도사들처럼 기도와 묵상에만 매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회심 직후 그가 다메섹에서 즉시 전파했던 모습(행9:20)이나 3년 후 예루살렘에 올라가 전파한 모습(행9:29)은 매우 활발하여 수도원적 모습과는 상이하기 때문이다.
3. 다소의 위치와 바울의 행적
척박한 아라비아와 달리 길리기아 다소(Tarsus)는 헬라철학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길리기아는 시리아에서 북서쪽에 위치했으며 다소는 그 곳의 큰 성이었는데 그 곳은 아덴 다음으로 이름난 학문의 도시였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이 곳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성장했다(행22:3). 그러나 그는 다소 사람이라 불리웠다(행9:11). 바울의 학문은 위정자들에게도 유명했다(행26:24). 훗날 바울의 선교여행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헬라문화(신화나 철학)에 매우 익숙한 유대인이었다. 다소는 큰 성이었으므로 그 곳에도 분명 유대인의 회당이 존재했을 것이다. 바울은 매우 당연한 듯이 거점도시마다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자신만의 규례를 갖고 있었다.
아라비아에서의 행적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과 달리 다소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된 견해가 있다. 사도행전이나 다른 서신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이 곳에서 그가 사역을 감당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바나바가 그를 찾기 위해 다소를 방문하기까지(행11:25) 바울은 무명의 사역자로 활동했다. 다소에서 행한 그의 사역이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이 시기까지 예루살렘 교회가 그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다.(행9:26) 그는 악명높은 핍박자에서 이제 막 기적적으로 회심한 신자였다. 교회는 여전히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둘째, 사도행전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땅끝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끝을 겨냥한 안디옥교회의 선교를 설명함에 있어서 바울의 다소 사역은 주목받을 이유가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4. 바울의 시간표: 아라비아 이후와 다소 이후
바울은 분명히 회심 이후 곧장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노라고 말한다.(갈1:16) 아라비아에서의 3년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갈1:17-8) 그 곳에서 바나바는 “그[바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행9:27)을 말하며 그를 변호했다. 바나바가 이로부터 10년 뒤 또다시 바울을 찾으러 길리기아 다소에 갔던 것(행11:25)은 그가 오랜 세월 바울의 충실한 변호자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바울은 이미 회심 직후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행9:22)시켰었다. 이는 구약에 능통했던 그에게는 직가 거리에서의 며칠이 구약의 예언과 그리스도의 성취를 연관짓기에 충분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성취에 대한 그의 신학적 토대는 아라비아에서의 3년이 아니라 다메섹에서 곧장 이뤄졌던 것이다. 그러면 아라비아 3년은 그를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또 그 다음 다소 10년은 그의 사역에 어떠한 발판이 되었는가?
아라비아 3년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본래 사도들에게 전해듣지 않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마주했던 바울이었다.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게바를 심방하려고”(갈1:18)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게바를 심방하려 한 것인가? 아마도 바울은 게바나 야고보 처럼 자신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갈1:17)을 만나서 함께 사역하기 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갈1:22)했다는 표현에서 짙게 나타난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도성은 고사하고 회심의 진정성조차 의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예루살렘에서 자신과 같은 배경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했고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행9:29)는 바람에 고향인 다소로 보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소 10년은 바울이 계획했던 시간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아라비아 3년 이후 자신의 사역을 본격화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앞서 다룬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의 교회들이 그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회심으로부터 14년이 지난 후 바울은 또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이를 다룬 갈2:8에서 바울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말한다. 이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역적 역할분담을 위한 것이었다. 왜 이러한 사역적 역할분담이 필요했을까? 갈2:2에서 바울은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미 다소에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그리스도의 도를 유대교의 보완이나 개혁 정도로 여겼던 소위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세력은 그 때까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헤롯의 핍박으로 인해 유대교와의 간격이 더욱 벌어지던 이 시기(행12장) 이방인 또는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선교적 열심은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고립되어 가던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인정된 바울은 기독교의 세계화를 짊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바울]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갈2:9) 하게 되었다.
5. 나의 시간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인정받고자 했던 14년간의 바울의 노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룩한 공교회의 인정을 받고 함께하는 것은 사역의 정통성과 안정성, 그리고 장래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참으로 전도와 선교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소중한 사명이라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지상대명령 아래에서 각기 다른 영역과 모양으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교회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생명 살리는 신학으로 정진하는 많은 신학도들과 더불어 여러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을 또 하나의 사명으로 새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