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작가와 신선수 -9-

오늘은 이상하게 일찍 눈이 떠졌다. 일찍이래봤자 오전 열시 반이긴 하지만서도 아점은 먹을 수 있는 시간에 일어났다는게 대견하다 이거지.  밥에 물을 말아서 김치에 대충 한 그릇 뚝딱하고는 후다닥 외출 준비를 마쳤다. 단막극을 준비하는 동안은 정말 죽기 살기로 나를 몰아가며 작업했었지만, 끝난 후에는 그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로 나 자신을 놓아버린 것 같아 요 며칠  고민 아닌 고민을 했었다. 작가라는 직업이 쓰라 해서 글이 써지는 것도 아니고 해서 우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밖으로 나가니 가을 바람도 선선하니 불어오고, 가을 햇살도 바스락거리는 것이 기분이 좋아진다. 발길이 멈춘 곳은 서점. 요즘은 신선수와 밤마다 술만 마셔대느라 머릿 속에 글자가 들어갈 시간이 통 없었다. 그간 밀린 책이 나 읽어볼까 하고 서점 안을 둘러보니, 신간 서적들이 한 가득 진열되어서는 날 읽어줍쇼하고 번쩍거린다. 이 책을 고르고 나면 저 것도 눈에 들어오고, 그러고 나니 또 다른 것도 읽고 싶고. 워낙 책욕심이 많은 터라 어느 새 내 품에는 열권이 넘는 책들이 안겨있다. 들고 가기 무거워 몇 권 뺄까도 했지만, 심혈을 기울여 고른 책들이기에 한 권도 뺄 수가 없다. 결국은 내 양팔에 쥐어진 열권의 책들. 몸은 힘들지만, 책의 첫장을 넘길 때의 설레이는 기분을 상상만 해도 행복해져서는 무거 운 줄도 모르고 근처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바닐라 라떼 톨 사이즈로 한 잔 주시겠어요. " 오늘 같은 날씨. 오늘 같은 기분에는 부드러운 생크림 얹어진 따뜻한 바닐라 라떼가 딱이지. 커피숍의 편안한 소파에 자리잡고 앉아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홀짝이며 읽고 싶었던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이 소소한 행복. 그러고 보니 이런 시간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반절이나 읽었을까. 벨렐렐레- 울리는 전화. 누가 이렇게 중요한 시간에 전화를 하는거야. 에잇. 핸드폰 챙겨오지 말 걸 귀찮게 괜히 챙겨왔다 싶어하며 보니 발신자는 서준수. "여보세요. " "야! 이 거짓말 쟁이야!! " "뭐야. 너 갑자기 전화해서는 " "암튼. 너 거기 딱 기다려. 나가지 말고. " "야. 무슨 말이야. 앞 뒤 다 잘라먹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뚜 뚜-- 갑자기 전화해서는 거짓말쟁이라는 둥 기다리라는 둥 알지 못할 소리만 하더니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끊어버린다. 몇 초간 이 상황에 대한 고민을 하다 결론이 나지 않아 다시 책에 집중하는데. 쾅- "아! 깜짝이야. 누구...? 어? 서준수. 너 뭐야. "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테이블을 쾅 치는 준수. 숨을 무척이나 헐떡이는 게 뛰어온 듯 하다. 내 앞자리에 털푸덕 앉더니 겨우 숨을 고르고는 말한다.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니가 먼저 연락한다며! 응? 약속을 지켜야지! 안 할거면 한다고 말을 하지 말던가. 그래야 사람이 기다리지나 않지. 안그래? " "아... 그때 내가 먼저 연락하기로 했던거. 그거 말하는 거야? " "그거? 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다니. 유은호. 너 아주 못되게 자랐구나. " 연락 한 번 안 했다고 못되게 자랐다고 비약해버리는 녀석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쿡. 알았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됐지? 근데 너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깜짝 놀랬잖아. " "아! 그게 말이야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봐. 내가 맞은 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커피숍에 너랑 닮은 여자가 보이는 거야.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는데 너랑 닮은 여자도 전화를 받는 거야. 너였던 거지. 쿠하하. 신기하지 않냐? 아니지. 너 말 돌 리지 말고. 분명 연락한다 그래놓고 왜 안했어! " 그 놈의 인연 타령은 멈추질 않는 구나. "미안 미안. 뭐가 바빴는 지 그렇게 됐어. 양복 입은거 보니까 회사에서 나온 거 같은데. 아냐? " "응.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되. 책 쌓아 둔거 보니까 여기 오래 있을 거 같은데 언제 갈거야? " "모르겠는데. 지칠 때 까지 읽어보려고. 왜? " "나 일찍 퇴근해서 나올테니까 그 때까지 가지 말고 있어. 니가 먼저 연락 안 한 벌이다. 알았지? " "회사원이 일찍 퇴근이 어딨어. 너 그러다 잘리지 말고 일 다 하고 나와. 회사 끝나고 전화해. 알았지? " "오케이. 그럼 이따 보자. "     오늘만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나 싶었더니 그것도 힘들 듯 싶다. 하지만 저녁에 만나지 않으면 준수의 변해버린 성격상 오래 갈 것 같아서 그냥 오늘 만나버려야 겠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책 읽기에 집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두 권을 책을 다 읽고 세 권 째 읽고 있는데 울리는 핸드폰. "여보세요....응....벌써 끝났어? 어.....나 아직 커피숍.....그래. 앞으로 나갈게.....응 " 일찍 끝내고 나온다더니 벌써 끝났나 하고 시계를 봤더니 시간은 벌써 6시가 넘었고, 날은 어느 새 어두워져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미동도 않고 책만 읽었더니, 온 몸이 뻑적지근한 것 같아 기지개를 쭉 펴며 하품을 하는데. "무슨 여자가 길거리에서 기지개를 켜지 않나, 하품을 하지 않나. 정말 못되게 자랐네. 유은호. " 아직도 앙금이 남았는지 날 보자마자 빈정대기 시작한다. 아직도 초등학생 시절의 정신연령을 못 벗어났나 보다 하려고 해도 오히려 초등학생 시절의 똑 부러지고 의젓한 모습이 기억이 나서 지금의 준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돈남말 하시네. 너야말로 이상하게 자랐다. 서준수. 아주 능글맞아 가지고는. 저녁 겸 반주를 하기 위해 근처의 삼겹살 집으로 갔다. 준수의 회사근처라 준수가 안내하는 곳으로 갔는데 가게가 곧 허물어질 것처럼 허름하다. "야. 여기가 겉은 이래도 삼겹살이 예술이야. 진짜야! 편견을 갖지 말고 일단 드셔보시라니까. 가게에 손님 꽉 찬 거 보면 모르 겠어? " "나 아무말도 안했는데 왜 혼자 열변을 토하고 있냐? 맛있는 지 어떤 지 빨리 시켜봐. 배 고프다. " "응? 너 아무말도 안했어? 이상하네. 분명히 가게가 허름하다고 한 것 같았는데. 아닌가?..이모! 여기 삼겹살하고 소주 주세요!" 이 자식. 독심술도 배웠나. 무서운 놈일세.     밑반찬들이 차례로 나오고 불판위에는 삼겹살들이 지글 지글 익어가고 있다. 정말 준수말대로 삼겹살이 제대로 였다. 살코기와 비계의 비율이 적당한데다, 육질도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것이 근래 먹어 본 삼겹살 중 최고였다. "야! 진짜 맛있어. 우와. 삼겹살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이거 감동이다. " "그지? 맛있지? 내가 여기서 삼겹살 먹은 후로는 다른 집에서 삼겹살을 못 먹는다니까. " 삼겹살 맛에 감동해서는 같이 흥분한 준수와 나. 맛있는 삼겹살 덕에 소주가 절로 넘어간다. 캬아- 혼자만의 시간 어쩌고 하던 나는 어디로 갔나 몰라. 부워라 마셔라 구워라 먹어라 해대며 삼겹살 5인분과 소주 6병을 해치운 준수와 나. 다음을 기약하며 준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집앞에 보이는 검정 외제차. 어? 신선수인가? 맨날 연락도 없이 찾아오고 그런다니까. 흐흐. 하지만 그 때, 검정 외제차에서 내리는 건 훤칠하고 멋드러진 신선수가 아니라, 키도 작고 배로 불룩한 아저씨가 아닌가. 어라? 뭐야. 신선수 차가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연락도 없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무거운 책들은 두 품에 꼭 안고서는 집으로 향한다. 윽. 무거워.     어제의 숙취로 인해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아아. 누가 나 좀 살려줘. 해장국이 필요하다구. 벨렐렐레- 누워서 구원의 손길을 기도하고 있는데 울리는 전화벨. 저번의 만취사건 이후 오랜만에 전화하는 김정미양이다. "여보세요. " "친구. 뭐하시나. " "누구신지..." "친구. 왜 그래. 설마 저번 일로 아직도 그러는거야? 충분히 성찰의 시간을 갖고 난 후에 전화 한 거니 이만 용서해주시게. " "으이구. 잘 나셨습니다. " "오호호. 그 동안 연락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는데. 연락할려구 해도 우리 순철씨가 너 진짜 화 많이 났다고 그래서. 참! 참! 내가 전화한게 이거 때문이 아닌데. 너 TV봤어? " "아니. 갑자기 무슨 TV? 나 잘 안 보는 거 알잖아. " "하긴. 그럼 아직 모르겠네. " "뭐야. 뭐 땜에 그러는데. " 안 그래도 어제 소주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픈데, 정미양의 목소리에 머리가 더 왕왕거린다. "도훈씨 스캔들 났어. 지금 신문이랑 TV에 난리났잖아. 정지순가 하는 걔랑 났드라. " "쇼 프로에서 같이 데이트한 거 가지고 그러는 거 아냐? " "아냐. 어제 심야 데이트 현장이 찍혔드라구. 진짠가봐. 너 몰랐어? 우리 순철씨말로는 너 요즘 다시 도훈씨랑 친하게 지낸다 던데." "....그래? 난 몰랐는데. " 둘이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심야데이트에 스캔들까지. 참 대단하네.     정미양과의 통화를 끝내고, 지친 몸뚱이를 이끌어 방 한 구석에 놓여있는 컴퓨터를 켰다. 너무 오랫동안 켜지 않은 탓인지 부팅 을 하면서도 지징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켜지기 시작한다. 인터넷을 클릭하자 마자 포털사이트의 정중앙에 [정지수, 신도 훈 심야데이트 목격 ] 이라는 기사가 개제되어 있는 게 보인다. 기사의 내용은 청담동의 와인바에서 두사람의 심야데이트를 목격했으며 다정해 보이더라. 정지수는 흰 원피스 차림의 청초한 모습이었고, 신도훈은 청바지에 티셔츠의 간편한 차림이더라. 와인은 무슨 와인을 마셨고, 와인바에서의 데이트가 끝난 후에는 각자 헤어지더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마냥 아주 세세한 기사 내용이 올라와있었다. 흐음. 어제라. 어제라면 내가 준수와 다 허물어져가는 가게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갈 때 쯤, 신선수는 청초한 모습의 정지수와 우아하게 청담동 와인바에서 데이트하고 있었다 이거구만. 그런거였군. 그래서 어제는 연락도 없으셨구만.     신선수에게 연락을 해 볼까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마침 그 때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엄마가 왠 일이야? " "이 놈의 가시나. 엄마가 전화하니까 왠 일은 무슨. 딸내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도 없으니까 한 거 아니야. 응? 이 배은망 덕한 것. 힘들게 키워놨더니 이젠 제 밥벌이한다고 이 애미는 거들떠도 안보고. "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흐흐. 사설이 긴거 보니까 할 말이 있나본데.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 "호호. 우리 딸 눈치도 빨라요. 별 건 아니고 지금 당장 오라고. " "뭐? 지금 당장? 이걸 어떻게 별 걸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어 엄마는? " "그럼 엄마 아빠 있는 집에 오가고 하는 게 별거란 말이냐. 딸? " "아..아니. 그런게 아니라. 에휴. 알았어요. 오늘 갈게. 근데 무슨 일 있는 거야? "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단풍철이라 우리 팬션이 좀 바빠서 와서 몇 일 도우라고. 여름 성수기 지나서 도우미 휴가 보냈더니 영 바빠서 말이야. 그럼 오늘 우리 딸내미 얼굴 보는 거야? 이 엄마는 벌써부터 설레이는 구나 .호호." "연기하기는. 알았어요. 끊어요. "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대뜸 오늘 오라는 우리 여사님. 혹여 내가 안 간다고 할까봐 배은망덕하니 보고싶느니 연기를 하신다. 결론은 일손이 부족하니 당장 튀어오라 이거면서. 쿡. 강원도 횡성에서 팬션을 운영하고 있는 우리 집. 꽤 수완이 좋으신지 잘 운영해 나가고 있는 부모님이시지만 가끔 일손이 부족 하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오라고 하신다. 전화까지 한 걸 보니 많이 바쁘긴 한가보다 싶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대충 짐을 싸서 강원도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