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平短想 -1- 2006. 7/23
『富平』오래전부터 인천시에 속해 있으나 인천시 부평동, 부개동, 십정동, 청천동,
효성동, 작전동 계산동 등으로 부르기 보다는 그냥 부평으로 통 털어 불리는 곳
인천 시민에겐 그것이 전혀 낯설지 않고 편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신문이나
공중파 에서 부평 관련 기사나 음악신청, 무슨 사연 등의 소개가 있을 때 기사를
쓰는 이나 방송 진행자가『경기도 부평』또는『부평市』라고 까지 표현을 하는
것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사실은 틀린 명칭이지만 그만큼 부평이 차지하는
지리적 위치나 역사적 배경, 區 勢 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가좌동 방면에서 천마산 고개를 넘어서면 우측으로 명신여고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쪽으로부터 대략 경남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 까지 미8군 소속 미군부대
(에스캄)가 주둔 하였다. 현재는 新村 (백운역 앞 5거리 ~ 부평 근린공원 간,
지금도 신촌이란 地名을 쓰는지 궁금) 한 구석에 과거의 위세? 와는 달리
조용하게 잔여부대가 옛 주둔지의 극히 일부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미군부대가 철수 후 한국군 第5空輸 특전 여단이 사용하다가 그 부대마저
효성동 서쪽 끝자락 어느 산 아래에 주둔지를 옮겨가게 되니 그 넓디넓은
부대 터는 개발논리라는 시대적 대세에 밀려 대규모 아파트 단지, 주택,
상가, 학교 등이 들어서게 되고 몇 차례의 재개발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나의 부평에 대한 추억 중엔 위에 열거한 부대에 얽힌 逸話도 한 몫 하는데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꿈 많던 학창시절에 겪고 느꼈던
생각을 적어본다.
『이 근수-李 根洙』부평시장 로터리 인근에서 꽤 큰 미곡상을 운영하던
집안의 3남 2녀 중 3남인 그는 80년도 후반 경 큰형 작은형의 뒤를 이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현재는 羅城(L.A)에서 페인트 사업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친구이다. 부유한 집안의 3남답게 쾌할 한 성격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던 그와 대한극장 앞 우체국 뒤 동네에 살던 김 영복 과
이 하용 그리고 부평과는 거리가 먼 송림동의 나 등이 수업이 일찍 끝나고
그 惡夢 과도 같은 夜自에서 해방되는 토요일에 부평에서 자주 어울렸다.
배가 고프면 우리가 단골로 드나들던 文化飯店이란 중국집이 있었는데
華商인 주인이 직접 手打하여 만들어내는 자장면 맛이 좋아(그때는 뭐든지
맛있었지)주로 자장면을 먹었던 기억과 그 중국집에 가면 우린 홀에서
안 먹고 꼭 골방에 들어가 먹곤 했는데 그 房 벽면 한쪽에 우리가 온 횟수를
『正』字 표기를 하며 오늘까지 몇 번 왔네 하며 서로 마주보며 킬킬
거리던 일, 먹는 와중에서도 아 이런 곳에 예쁜 여학생들과 같이
있었으면 하는 다소 발칙한 상상도 하곤 했다. 먹고 난 후에 계산은
주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던 근수가 하였고 가끔은 나머지 친구들이
갹출하여 냈었다.
당시 내 눈에 비친 부평은 인천보다 훨씬 力動的 이고 物資가 풍부한
新天地와 도 같았다.
부평 그리고 근수와의 추억은 그의 맏 兄(제고 출신, 당시 서울대 재학 중)
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으나 後續編 에 밝히도록 하겠다.
첫댓글 미션스쿨에 다니던 여고시절 이천읍내엔 여고1.남고2개가 있었습니다. 바로 집앞에 나갈때도 교복을 입고 나가야 하고 빵집은 물론 분식집.중국집도 학생끼리는 들어갈수 없는 통행금지 구역이였던 그 시절. 친구들과 몰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먹다 목사님께 들켰던 기억.목사님께서 저희들의 행동을 이해해 주시고 음식값까지 내주었던 기억이 오랜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생생하네요.그때 먹었던 짜장면 맛까지도~~
요즘 같으면 자장면 먹는일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때는 왠지 죄책감이..
짱깨 먹고 싶다
분위기 좋고 자장면 맛있는집 소개좀 해 봐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