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전쟁 정전협정(7월27일)과 한-미 상호방위조약(10월1일)이 맺어진 지 70주년이 됐다. ‘정전’은 전쟁이 잠깐 멈춘 상태로,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온 나라 곳곳의 언덕과 고지에는 10만구가 넘는 전사자 유해가 눈비를 맞으며 묻혀 있다. 이 유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지난달 28일 오후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으로 가는 입구에는 국방부와 육군 11기동사단이 내건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펼침막에서 20분가량 흙먼지 피어나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유해 발굴 현장이 나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11기동사단 돌격대대 장병들이 비탈진 산자락에서 삽으로 조심스럽게 땅을 파고 있었다.
72년 전 이곳에서는 중공군의 봄철 공세에 맞서 ‘홍천 북방전투’(1951년 5월16~18일)가 벌어졌다. 당시 국군과 미군은 홍천 북서쪽 가리산 부근에서 약 10㎞ 떨어진 유해 발굴 현장인 주음치리까지 후퇴했다. 한정희 유해발굴감식단 발굴팀장은 “이곳에서 유해 12구를 수습했고 온몸의 뼈가 온전한 완전 유해는 1구”라며 “완전 유해가 적은 이유는 당시 포격전이 치열해 사망 당시 포탄에 신체가 찢겨나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는 한국전쟁 전사자가 대부분인 10만3천여위가 유해 없이 위패로만 모셔져 있다.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은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이런 인식은 국민을 통치 대상이 아닌 국가의 주인으로 볼 때 가능한 것이다. 국가가 체계적으로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에 나선 것은 국내 정치에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후 2000년 4월이었다.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다른 군복을 입고 치른 전쟁이다. 한정희 발굴팀장은 “발굴된 유해만 놓고 피아 구분이 쉽지 않다. 영화 <고지전>에서 춥다고 북한군 군복을 덧입는 국군 병사가 나오듯이, 국군으로 추정되는 유해에서 적군 유품이 발견되고 적군 추정 유해에서 국군 유품도 나온다. 현장에서도 피아 구분을 하지만 피아판정위원회를 3~4차례 열어 신중하게 심의한다”고 설명했다.
유해가 국군인지 북한군인지는 제복이나 모자, 단추, 무기 등 유해와 함께 발굴된 유품을 보고 판단한다. 유해와 함께 미제 무기가 발견되면 국군으로 판정한다. 이와 달리 ‘평양’ 같은 마크가 찍힌 통일화, TT권총탄 같은 옛 소련제 무기, 모자에 붙이는 별표 표지가 발견되면 북한군으로 분류한다. 당시 남북은 군복 단추 모양이 달라서 단추도 피아 식별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북한군으로 분류된 유해는 경기도 파주 북한군 묘지에 매장한다.
정부는 제네바 협정을 존중하는 취지에서 1996년 적군 묘지(북한군 묘지 이전 이름)를 조성했다. 제네바 협정 추가의정서 34조는 교전 중 사망한 적군 유해를 존중하고 묘지도 관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아직도 ‘빨갱이 색깔론’에 집착하는 쪽은 적군 묘지를 종북주의자의 성지라고 주장하고, 문재인 정부 때 간첩 58명이 묻힌 북한군 묘지의 평화공원 조성을 시도했다고 문제 삼는다. “뼈에도 색깔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
고 김철호 선생의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기업인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김철호(1922~1995) 선생이 1990년 지리산 일대를 찾았을 때, 한국전쟁 전후에 지리산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골을 누구도 수습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유골에 좌익·우익이 있을 수 없고, 뼈에는 색깔이 없다”고 말했다. 김철호 선생은 지리산에 움막을 짓고 분단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한 공원을 가꾸어 나갔다.
대다수 사람들은 한국전쟁은 1950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벌어진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등을 기억하고 이때 인명 피해가 많이 난 것으로 여긴다. 이와 달리 한국전쟁 당시 양쪽 군인 사상자 중 다수는 1951년 여름부터 1953년 여름까지 벌어진 고지전에서 발생했다.
1951년 7월10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2년여간 휴전회담을 하는 동안 전선은 현재 군사분계선 근처에 교착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평가를 보면, 이 기간 벌어진 고지쟁탈전은 휴전협상 난국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이용됐고, 양쪽은 군사적 승리보다는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는 수단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공방전을 감행했다. 고지 하나를 탈취하기 위해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는 기형적인 고지쟁탈전이 전장을 지배했다고 연구소는 평가했다.
칠성전망대 서쪽에 있는 저격능선은 오성산에서 강원도 김화 지역을 향해 뻗어 내린 돌출 능선이다.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24일까지 저격능선을 차지하기 위해 최소 2만명의 군인들이 죽고 다쳤다. 중국 쪽 기록은 국군·유엔군 사상자는 2만5천명, 중공군은 1만1천여명이고, 한국 쪽 자료에는 중공군 사상자 1만1천명, 국군·유엔군 사상자 7800명이었다.
1㎢란 좁은 저격능선 지역에서 한 달여 만에 밀집대형으로 2만여 군인이 희생된 것은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 왜 참혹한 고지전을 멈출 수 없었을까?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기지 못한 고지전에서 수많은 병사들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인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는 전쟁과 관련된 기억을 독점하려고 한다. 지난 3월 국가보훈처는 정전·동맹 70주년을 맞아 ‘위대한 헌신으로 이룬 놀라운 70년’(Amazing 70)이란 주제 아래 △참전용사의 ‘위대한 헌신’에 감사 △‘자유의 가치’를 국제사회와 공유 같은 사업 계획을 수립했다. 70년째 해온 ‘감사’도 하되 70년간 끝나지 않는 이 슬픈 전쟁을 끝내는 ‘평화의 시작’을 상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