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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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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토론 ●자유게시판 계엄사 작전일지등 ”조작흔적 역력“ 7.11공수 발포 3시간전 준비 완료“당시 취재 기자 ”실탄분배 목격“ 증언,전남대 앞과 동시 작전...
Dr.OB/GYN 추천 0 조회 194 07.10.13 19:49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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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10.13 20:10

    첫댓글 도청앞,전남대 총기 난사로 50여명 사망과 500명 이상 총기 부상이 10분만에 발생했는데도, 한마디 언급이 없다는것은 은폐.왜곡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 07.10.14 05:21

    54명 사망은 시민군이 교도소를 6차례 습격했을 때 생긴 사망이었습니다. 도청광장 앞에서는 시민군 차량 운전자만 계엄군 총상을 입었고,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시민군 사망자 4명이 있었습니다.

  • 작성자 07.10.14 13:01

    21일 전남대와 도청앞,금남로 집단 발포로 사망한 숫자입니다. 교도소 근처 사망은 제외입니다.교도소 근처에서 사망한 숫자는 전체 5.18 시민축 희생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 07.10.14 13:42

    저는 미 해리티지 재단이 구체적으로 밝힌 대로 당시 사망자 계수에 참여했던 이들의 보고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South Korea's Kwangju Incident Revisited 를 http://cafe220.daum.net/_c21_/bbs_list?grpid=14LzD&fldid=HpFe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Dr.OB/GYN 님이 주장하는 숫자는 유언비어입니까? 아니면 계수한 이가 있습니까? 광주사태 당시에는 오천 명이라고 주장했었지요. 지금은 50 명을 말하지만 역시 유언비어입니다. 50명은 누가 계수한 숫자인가요? 광주 의사들 중 한 명이라도 사망 확인하고 계수한 이가 있었던가요?

  • 작성자 07.10.13 20:18

    21일 오전10시에 실탄분배가 되어 발포 준비를 했었다는것이 11공수 부대원 윤재걸씨 수기나 동아일보 기자에 의해 증언되었습니다. 31사 병력이 12시30분에 철수하면서 실탄을 얻었다는것은 거짓입니다.

  • 07.10.14 05:31

    여전히 11공수와 7공수를 혼동하십니까? 만약 님의 병원 옆 병원에서 의료 사고를 냈는데, 그 책임을 님에게 물으면 황당하지 않으시겠습니까? 11공수와 7공수는 전혀 다른 부대입니다. 7공수는 완전히 정웅 소장 통제 하에 있었고, 전북 금마 병력입니다. 서울에서 비행기와 열차로 이동했던 11공수와는 전혀 별개의 부대였어요. 7공수에는 실탄이 없었습니다. 11공수 실탄이 7공수에 분배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윤재걸씨에게 확인 문의해 보세요. 11공수 실탄이 7공수에 분배된 일이 있었는지.

  • 작성자 07.10.14 13:07

    님은 혹시 7공수는 시민군 편이란 뉘앙스를 풍기고있군요. 웃기는 소리입니다.평민당으로 출마한 정웅씨가 광주 향토방위사단장이고,5.18에대해서 전두환측 신군부에대해서 시민측에 유리한 증언을 햇지만,저는 그분을 신뢰하진 않습니다.어차피 그분도 군인이고 자기에게 유리한 편을 증언햇을거라고 생각할수있으니,객관적이지 못합니다.

  • 작성자 07.10.14 13:11

    실탄은 자기 부대 실탄을 애당초 준비하고 보유한 상태입니다.여러 증언과 정황에서 이미 오전10시이후 부대원에게 이미 소총에 실탄은 장착한 상태입니다.

  • 07.10.14 13:45

    7공수는 시민군 편이라는 뉘앙스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주는 것 아닌가요? 5월 18일에 11공수라는 존재는 광주에 없었습니다. 오직 7공수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7공수라는 존재를 아예 감추어버립니다. 비밀인가요? 왜 감추나요?

  • 07.10.14 05:40

    <최웅 여단장의 증언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당시 도청앞에 있던 11공수 3개 대대는 무려 4시간여동안이나 직속상관과의 연락이 두절된채 작전을 수행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미개인들은 말이 왔다 갔다하는군요. 광주청문회 때는 상급부대가 31사인데, 왜 최웅 여단장에게 보고했느냐면서 픽션 소설을 쓰더니, 여기서는 정반대의 시각에서 주장을 펼치는군요. 원칙적으로 보고는 11공수 3개 대대 상급부대였던 31사(광주향토사단) 사단장에게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날 오후 정웅 소장이 직무 정지되어 연락이 닿지 않으니깐 급한 대로 최웅 여단장에게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 작성자 07.10.14 13:19

    " 오후 정웅 소장이 직무 정지되어 연락이 닿지 않으니깐 급한 대로 최웅 여단장에게 보고되었을 "...또 웃기는 거짓말하시군요..윤흥정이나 정웅 지휘계통서 도청총격 보고받은바가 전혀 없었는데,그럼 누구한테 보고한겁니까? 직속상관인 정호영쪽으로 보고 한거 아닙니까?왜 억지를 쓰시요..31사 지휘를 받은다면 상황일지에 그리 나와있어야 하는데 없지 않습니까?

  • 07.10.14 13:51

    11공수가 윤흥정 장군의 전교사에 보고했다는 것은 31사에 보고했음을 의미합니다. 11공수는 31사의 작전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며, 전교사에 보고하였다는 사실을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중 전남도청 발포 부분>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여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1045264

  • 07.10.14 13:51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戰敎司로 복귀한 61연대장은 戰敎司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 작성자 07.10.14 13:24

    21일 도청앞 오후 한시 이후부터 오후 두시까지 왜 작전 상황이 계엄사나 육본상황일지 ,전교사작전일지,특전사 전투상보등에 사격 상황이 누락했는가요? 이 상황일지는 88년 노태우정권때 청문회를 통해 국방부가 자료들을 최초로 공개한겁니다.

  • 07.10.14 14:02

    <오후 한시 이후부터 오후 두시까지>의 시간은 정확한 시간이 언제이냐의 문제입니다. 제가 읽은 시민군 증언들을 토대로 한다면 도청광장 충돌 사건 발생 시각은 오후 한시가 아니라 오후 두시였습니다. 시민군 이수범의 증언을 아래에 인용해 드립니다.

  • 07.10.14 14:02

    <그러는 도중 시민 쪽에서 가지고 있던 APC 장갑차 한 대가 군인들 쪽으로 달려 갔다. 그때 공수부대원들은 2열 횡대로 해서 YMCA 앞 횡단보도를 중심으로 우리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갑차를 몰고 가니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들이 몇 명 치어버렸다. 그때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을 당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공수부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오후 1시 30분이었다. 내가 왜 그 시간을 기억을 하냐면 우리가 계속 시간 카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보면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

  • 07.10.14 14:06

    제가 시민군 이수범의 증언을 최종적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합니다. 한동석 중위의 증언과 시간이 30분 차이가 나는 것으로 기억하니까요. 혹시 님은 다른 시민군 증언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제시하여 주시렵니까?

  • 07.10.14 14:21

    2000년 김대중 시절에 광주일보가 광주항쟁 20주년 기념 특집으로 발간한 기사가 사실에 근접할 것입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11공수 3개 대대 장교들에게 모두 실탄이 지급되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광주일보에 실린 대로 인용해 드립니다. <당시 11여단의 한 대대장은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렸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 >

  • 작성자 07.10.14 19:20

    2000년광주일보 기사라기보다는 그이전인 1988년 국회 청문회때 와 그후 5.18 검찰조사등에서 11여단 공수부대 대대장의 거짓 진술한 얘기입니다.

  • 07.10.14 19:27

    기사는 2000년 기사입니다. 광주일보가 2000년에 당시 인물과 인터뷰한 것인지는 출처를 밝히지 않아 모르겠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증언들을 추려서 기사화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11공수 3개 대대가 있었는데, Dr.OB/GYN 님은 무엇을 근거로 거짓 진술이라고 주장하시는지요? 3개 대대 중 어느 대대 대대장이 거짓 진술하였다는 것입니까?

  • 07.10.14 14:26

    님도『탄환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군인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부대에 실탄 수송을 요구했을까요? 서울의 특전사? 아닙니다 31사(광주향토사단)에 요청했던 것입니다. 31사는 2시에 경계용 실탄을 가져다 주었기에 상황일지에 2시라고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 작성자 07.10.14 19:28

    실탄을 31사에서 받앗던, 청와대에서 받앗던 중요한것은 역사학도님이 게시판 번호(2335)에 올린,((대대장 안부웅씨의 증언))에서 "부대원들이 사격을 했었고,사격 중지가 안되어 병사들속에 뛰어다니면서.." 이 진술과 장교들에게만 실탄 지급 10발을 했다는 증언은 진술이 오락 가락 합니다..시민군이 먼저 쐈다느니,사병들은 실탄이 없었다느니..전부 허위 진술이죠..

  • 07.10.14 19:37

    특전사는 보병과 병사 개념이 좀 다릅니다. 보병은 이등병부터 병장까지의 사병으로 분대가 구성되지만, 특전사에서는 장교(대위 및 소위 또는 중위) 2명에 부사관(하사,중사,상사)로 구성되어 각 주특기별(정보,작전,폭파,통신,의무,화기) 부사관 체재로 팀웍을 가지고 작전을 전개합니다. 따라서, 장교의 수가 극히 적은 보병 부대와 달리 공수부대에는 장교의 수가 많습니다. 그러니 장교들에게만 10발씩 나누어줄 실탄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작성자 07.10.14 20:23

    님의 의견이 맞습니다.그래서 부대원 대부분이 실탄을 갖게 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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