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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방원 제27편: 난세의 외교술
(처형에 대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와 황제 생일날이면 천자가 있는 서쪽에 머리를 조아리며 하례를 드리던 자신이 황제가 있는 금릉에 와있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동방의 변방국 고려의 정5품 관리 전리정랑 이방원이 천자를 알현하기 위하여 금릉에 와있다니 꿈만 같았다. 이것도 잠시. 꿈 아닌 꿈에서 깨어났다.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가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변방의 소국에서 말썽부리는 장군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거나 처형될 수도 있는 길이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착잡했다. 걸어서 통과하는 중화문을 '자신의 발로 걸어 나올 수 없는 길이 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니 숨이 막혀 왔다.
명나라 예부의 안내를 받은 사신 일행은 황제 주원장 앞에 엎드려 부복하고 절을 올렸다. 조공국이 대국 천자(天子)에게 드리는 신년 하례다. 이렇게 엎드려 절을 하기위하여 4천리 길을 달려왔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머나먼 길을 달려온 고려 사신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주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한림(翰林)이 되었었으니 응당 중국말(漢語)을 알 것이다."
이색이 원나라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원나라에서 치른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 관리로 봉직했던 일을 상기하는 말이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이색이 입을 열어 중국말로 말했다. "고려의 국왕이 친히 뵙기를(親朝) 청합니다."
서장관으로 정사 이색을 수행한 이방원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나이 어린 창왕이 여기까지 달려와 명나라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면 고려의 운명은 어디로 흘러간단 말인가? 머나먼 길 찾아와 황제에게 한다는 말이 민족의 자존을 상납한다는 자청이란 말인가?
눈앞이 캄캄하며 가슴이 떨려왔다. "문하시중 각하. 이것은 아닙니다."
목울대를 통과한 외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개경을 떠나오기 전 아버지 이성계의 당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번 사행 길에 너의 신분은 서장관이라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돌아오는 날까지 많은 것을 보고 듣되 입은 열지 말고 기록하는 직분에 충실하여라. 세치 혀가 모든 화(禍)를 자초하느니라."
그랬다. 자신의 신분이 정사를 수행하는 서장관이요 모든 과정을 기록하는 서원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이에 덧붙여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인질 아닌 인질이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황제의 심사에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고 귀국 후에 정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참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무슨 말을 하였느냐?" 명황제 주원장은 알아듣고도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것인지 짐짓 위엄을 부리며 되물었다. 얼마 전에 다녀간 주청사도 똑같은 청을 하였을 터인데 알아듣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색이 우물쭈물하자 예부(禮部) 관원이 통역하고 나섰다. "오랫동안 중국에 들어와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말이 자못 어려워 통하지 아니한 듯하옵니다."
"그대의 중국말 하는 것은 꼭 나하추(納哈出)와 같구나." 이색의 청을 철저히 무시하고 경멸하는 황제의 말이다. 원나라 공신의 후예로 원나라 녹봉을 먹던 나하추가 자신이 충성하던 원나라가 쇠하자 심양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며 고려와 명나라에 위세를 부리다 주원장에게 항복한 것을 빗댄 말이다.
너희들 일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 북방에서 원나라와 전투를 벌이며 대륙통일을 목전에 둔 주원장은 고려 내정에 간여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들 마음대로 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주제에 얼마 전에 다녀간 주청사도 친조(親朝)를 청하더니만 하정사도 친조를 청하니 귀찮았다. 이색이 다녀간 후. "고려 사신은 들이지 말라"고 요동 도총관에게 엄명을 내린 것으로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원나라와 마지막 쟁패를 벌이던 명나라는 고려가 원나라와 손잡고 그들의 배후를 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고 경계했다.
그 으름장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는 위협이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철령위 문제가 유야무야 된 것이 명나라의 속셈을 반증한다. 황제에게 신년하례를 드리는 하정사의 명분으로 금릉을 찾았지만 이색의 복안은 친조(親朝)였다.
그 목적이 실패한 것을 인식한 하정사 일행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외교도 상응한 힘을 비축했을 때 서로 통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돌아오는 길을 단축하기 위해 등저우에서 배를 탔다. 해로를 이용하여 발해만을 건너기 위해서다. 서장관 신분으로 정사 이색의 '친조외교'를 지켜봐야 했던 이방원은 국력이 곧 외교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색은 외교를 통하여 정치를 하려했고 이방원은 정치와 외교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들의 사신행로를 조선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李穡), 첨서밀직(僉書密直) 이숭인(李崇仁)
이 경사(京師)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창왕의 친조(親朝)를 청하고 왕관(王官)으로 국사(國事) 감독하기를 청하였다. - <태조실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물며 태조실록은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있을 때 하륜이 총책임을 맡아 편찬했다. 이성계와 대척점에 있던 이색을 우호적인 시각으로 기록할리 없다.
그렇다면 초야에 묻혀있는 야인들이 집성한 야사는 어떨까? 이색의 금릉행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기에 뒷얘기도 풍부하다. '동각잡기' '연려실기술' '필원잡기' 등에 이색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같이 비판적이다.
여기에서 잠간, 왕관(王官)을 짚어보자. 왕관이라 함은 명나라 황제의 특명을 받은 명나라 조정의 관리로서 고려에 파견되어 고려의 국왕을 감독하는 관리를 일컫는다. 현대적인 의미의 대사와는 격이 다르다. 왕위의 왕이며 옥상옥(屋上屋)이다. 명나라의 악의적인 운영에 따라서는 신탁통치도 가능한 위험한 제도이다.
등저우에서 배에 몸을 실은 방원은 망망대해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황제가 정사의 주청을 받아들여 친조를 명하고 왕관을 파견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황제의 명을 봉행하기 위하여 대동강 이북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하겠다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왕관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명나라 군대를 수도 개경에 주둔시켜야 하겠다고 나오면 어떠한 명분으로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고려반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원나라와 패권을 가르는 북방전투에 몰두하고 있어 다행이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방원은 평소 이색을 아버지의 정적을 떠나 나라의 큰 어른으로 존경했다. 성리학도의 한사람으로 이색의 깊은 학문에 매료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존경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난세의 외교술, 과연 어떤 것이 애국일까? "신라가 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외세를 끌어들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동강 이북 영토를 내 주어야 하는 쓰라림을 당하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그 영토를 찾아오기 위하여 천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명나라로부터 철령위를 세워야겠다는 협박을 받는 수모도 모두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은가?"
바람이 분다. 수평선 너머에 먹구름이 밀려온다. 뱃전을 노닐던 갈매기 떼가 자취를 감추었다. 배가 심하게 요동친다. 일엽편주(一葉片舟)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조각배를 삼킬듯이 파도가 밀려온다. 바다위에서 역사의 바다를 주유하던 방원은 두려움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이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인륜의 덕목이지 않은가? 소국이 대국을 공경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만약 국가를 경영하는 통치자가 된다면 내실을 튼튼히 하여 국력을 기른 다음에 대등한 위치에서 상응한 외교를 해야겠다. 대국을 공경하드래도 민족의 자존을 지키며 사대하고 국력을 기른 다음에 맞대하여야 이러한 낭패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신 일행이 탄 배가 반양산(半洋山)을 지날 무렵이었다. 천기를 어지럽혀 하늘이 노(怒)했을까? 약관을 갓 넘긴 21살 풋내기가 언감생심 국가경영 운운하는 불충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어 바다가 노한 것일까? 사신 일행이 탄배를 향하여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왔다. 폭풍을 동반한 파도앞에 조각배는 뒤집히고 말았다.
태종•이방원^다음 제28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