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포곡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사적.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산성동 2번지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동쪽과 서쪽에 보조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흙으로 쌓은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돌로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 등의 남문·북문은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다. 적에게 보이지 않게 누각없이 만든 암문(暗門),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 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도 남아 있다.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한강 유역에 자리 잡아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한성백제의 수도가 위례성이다. 위례성은 백제 1대 온조왕이 건국했을 때부터 개로왕이 전사할 때까지 약 5백 년간 도읍으로 있었던 곳이다. 한성백제 시대는 백제의 초대왕 온조왕 1년(BC 18년)부터 21대 개로왕 21년(AD 475년)까지의 493년간이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공격으로 한강 이북 지역을 잃게 되었고, 그의 아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게 된다. 그 후 성왕이 백제의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백제는 크게 세 번 도읍을 옮긴 나라가 됐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泗沘)는 지금의 부여이다.
공주 공산성에서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은 해발 110m 공산(公山)의 높은 부위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왕궁터다, 아니다는 논란이 있지만 발굴이 진행될수록 왕궁지로서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서기 475년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살해되고, 아들 문주왕이 급히 남쪽으로 피신했다. 당시 웅진은 마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변방이었다. 문주왕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다시 왕조를 열었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밀려오고, 남쪽에선 마한이 버티는 상황에서 백제의 망명세력들은 생존 그 자체에 급급했을 것이다.
웅진성은 도읍지라기보다 방어의 진지로서 적합한 곳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해자 역할을 하고, 능선이 3면을 에워 싸고 있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 지휘소를 마련했다. 언제라도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있기로 했던 웅진 피난살이가 60여년이 흘러갔다. 처음 와서 세웠던 사령부가 그대로 왕궁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공주는 22대 문주왕 1년(475년)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서 26대 성왕 16년(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웅진백제의 도읍지였다.
웅진백제 시기에 다섯 왕이 거쳐갔다. 왕조가 약해지면 배신자도 많아진다. 2명의 왕은 반란세력에 죽임을 당했다. 정권이 불안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한성을 되찾으려는 꿈은 고사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다. 웅진은 백제 왕실의 임시거처였을 뿐이다. 사비(泗沘)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지금의 부여(扶餘)이다. 사비시대는 성왕 16년에 사비로 천도한 이후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를 말한다. 사비백제 시대는 26대 성왕 16년(538년)부터 27대 위덕왕, 28대 해왕, 29대 법왕, 30대 무왕,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왕인 31대 의자왕 20년(660년)까지의 122년간이다.
공산성을 쌓은 연대는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城柵)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2.2㎞ 정도인데, 돌로 쌓은 부분이 약 1.81㎞이고, 흙으로 쌓은 성벽은 약 390m이다. 성벽은 2중으로 축조되었지만, 만하루(挽河樓)터 주변에는 동성왕이 쌓았다고 전하는 무너진 성벽이 있어서 모두 3중으로 축조된 셈이다. 이것은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 북쪽의 영은사(靈隱寺) 밖에도 높이 7.4m, 길이 43m의 성벽이 2중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돌 홈통인 석루조(石漏槽) 2개가 있고, 그 위에는 너비 2m의 수구문과 문의 주춧돌 2개가 남아 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높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은데, 대체로 높이는 1m이고, 너비는 아랫부분이 8.5m, 윗부분이 3m이다. 성 안에는 깊이 약 2m의 호(壕)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가운데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일부는 속을 다지고 겉을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구간도 있다. 협축으로 쌓은 성벽의 윗부분 너비는 약 0.7m 정도이며, 안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백회를 발랐다. 진남루 주변에 사용된 돌은주로 긴 네모꼴이나 네면이 같은 네모꼴인데 반해, 영은사 밖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 편이다.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의 주문(主門)은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이다. 진남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누각이며, 공북루는 1603년(선조 36)에 옛 망북루(望北樓)터에 세운 것으로 고주(高柱)를 사용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다락집이다. 서문은 1975년에 보수공사하였을 때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받침 부분만 복원되었고, 동문도 발굴 결과 길이 6.45m, 너비 2.46m였음이 확인되었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동문은 서문·남문·북문처럼 2층이었으며, 동쪽 외곽의 토성에도 약 4m 크기의 문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0년에 발굴조사한 결과,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그 뒤 1983년에도 조사되었는데, 길이 10.23m, 높이 1.67m, 너비 13∼0.8m의 암문이 발견되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하여 광복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정주필사적비·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곧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뒤 822년(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켰던 반란은 이곳에서 진압되었고, 1623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공주 공산성 관광안내도
공주 [공산성&무령왕릉]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