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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피리 불며 서러운 이야기-
한하운의 소록도
김 채 석
형.
문득 아픕니다. 봄날이기 때문일까요. 흔히들 봄날은 간다고 그래요. 하지만 저는 가는 것이 아니라 봄날은 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분분히 내려앉는 꽃잎마다 서러운 이야기가 세월의 페이지로 남아 한 잎 두 잎 떨군 눈물이 되어 잔인한 달 사월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기억이 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한 기억 속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는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이라며 ‘소록도 가는 길’의 아픔을 노래한 한하운 시인이 생각납니다.
발가락을 잘려가며 시인이 가던 전라도를 달리 호남지방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호남에 관한 지명들을 넘나드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호남가湖南歌’라는 노래로 판소리 단가의 하나입니다. 함평·광주·해남·제주(오래전 제주의 행정구역은 전라남도에 속함) 등 호남지방 50여 곳의 지명을 넣어 문장 식으로 엮은 것인데 원래의 작자와 창작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구전되어 오던 노래를 19세기 중엽의 인물로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립하신 동리 신재효 선생이 고쳐 지은 것이 사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항간에 이서구가 지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명확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장단은 중머리이며, 조調는 평우조平羽調로 부르는 것이 원칙인데, 혹 평조에 계면을 섞어 부르기도 하는 서정적 노래로 이 지방 송정리(광주광역시 광산구) 출신의 국창 임방울林芳蔚 선생이 잘 불렀다고 합니다.
내용은 호남지방의 여러 지명을 하나씩 들어가며 뜻을 잘 살려 그 지방의 특색과 풍경 등을 노래하고 있는데 신재효 본으로 전해지는 내용으로 “함평咸平 천지 늙은 몸이 광주光州 고향 바라보니 제주濟州 어선 비러 타고, 해남海南의로 건너올 제 흥양興陽의 돋은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 있고, 고산高山에 아침 안개 영광靈光에 둘러 있고, 태인泰仁하신 우리 성군 영학을 장흥長興하니, 삼태육경은 순천심順天心이요. 방백 수령은 진안민鎭安民이라, 인심은 함열咸悅이요, 풍속은 화순和順이고,고창高敞 성에 홀로 앉아 나주羅州 풍경 바라보니 만장 운봉雲峯 높이 솟아 층층이 익산益山이요, 백리 담양潭陽에 나리는 물은 구비구비 만경萬頃이요 …… 여산礪山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았으니 어떠한 방역객이 놀고 가기를 즐겨하랴.”에서 ‘흥양’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낯설지만 흥양은 현재 고흥의 옛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고흥은 한반도의 또 다른 반도로 우주선을 쏘아 올린 나로도를 비롯한 팔영산과 능가사, 역도산의 제자로 박치기 한 번이면 상대 선수는 녹다운이 되고야 말았던,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유명한 레슬러 김일의 고향 거금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유자생산의 70%를 차지하는 곳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이름과는 달리 아픔을 간직한 섬이 있는데 바로 작은 사슴을 닮았다는 섬 소록도가 있는 곳입니다. 천형의 병이라 일컫는 한센병을 치료하는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는 곳으로 양말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어졌다 말하는 한하운 시인의 발이 멈춘 곳 소록도에 오래도록 예전에 다녀왔던 기억을 유추해볼까 합니다.
형.
소록도는 고흥반도 끝자락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습니다. 더 남쪽은 앞서 말씀드린 김일 선수의 고향 거금도와 인접해 있고, 그사이에 대화도, 상화도, 하화도 등 작은 섬이 있는데 소록도는 지형이 마치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하여 소록小鹿이라 했다고 합니다. 최고지점은 118m로 섬의 북쪽에 솟아 있으며, 대부분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로 살고 있는 주민이래야 나병 환자와 국립소록도병원에 근무하는 직원과 그 가족이 대부분이고, 마을은 주로 북동쪽 바닷가에 자리하며,환자촌은 도로를 중심으로 병사지대와 직원 지대로 구분됩니다. 도로는 해안을 따라 참으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록도를 통해 거금도까지 연륙교와 연도교가 개통되어 차량으로도 접근이 용이하지만, 녹동항에서 출발하는 소록도병원 전용 도선과 일반용 도선이 매일 수시로 운항한다고 합니다. 저는 녹동항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오래전의 시절에 다녀왔지만, 지금도 그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기에 형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녹동항에는 제주를 오간다는 ‘선 페리호’라는 배가 시골 항구에서 그나마 위용을 떨치는 곳 언저리에 씻지 않은 부랑인의 얼굴처럼 땟국이 덕지덕지 부식되어 검버섯처럼 녹이 온 배에 부스럼이나 백선과 같이 피어있는 철 부선에 몸을 담고, 600여 m 지척의 접안시설에 도착하니 일반 아파트의 경비실보다 작은 알루미늄 상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에 담겨있는 관리소의 직원에게 출입을 요청하니 시간이 일러 곤란하다고 했지만, 세상에 태어나 가장 비겁한 표정으로 사정을 했더니 통하더군요.물론 그냥이 아니고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듯 주민등록증을 맡기고요. 그리고 걸었습니다. 마냥. 이유는 당시에 택시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은 아예 없고 아마 지금도 있을까 싶으니까요. 그러면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는 풍경과의 조우는 여러 종교 시설이었습니다. 다만 사찰은 못 보았고 성당이나 기독교 시설은 자주 접했던 터라 아무런 이유 없이 지나쳐 가다가 만난 원불교 시설에서 잠시 쉬어가기 위해 청을 했지만, 문은 열려 있는데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 그리고 쪽 진 머리의 정녀인 교무는 아무도 안 계셨습니다.
하나 유는 무로 무는 유로, 계시면 어떻고 안 계시면 어떻습니까. 인생사 가졌다고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적수공권으로 왔다가 적수공권으로 가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안 계시니 시설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더 편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른 아침부터 텅 비어있는 공간, 흔히들 생각하는 생각 자체도 버리고 비우라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걷다가 만난 시골 우체국. 그것도 섬의 우체국은 참으로 초라하고 겸손했습니다. 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하얀 봉투에 침 발라 붙이던 우표처럼 제 마음은 오도 가지 못하고 우체국 창문에 딱 붙어버렸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청마 유치환의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에메랄드빛 하늘은 아니었습니다. 시야는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의 안개처럼 몽롱할 지경으로 마치 재첩국 물을 흡사 닮았을까.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것처럼 흐릿한 아름다움이 연어의 수컷이 뿌린 수정액처럼, 그 어떤 몽롱한 꿈처럼 희미했으니까요.
형.
소록도는 섬 전체가 빽빽한 산림과 바다가 하나 되어 아름다운 연출할 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유야 어떻든 나환자 집단거주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나환자 치료를 위해 건설된 국립소록도병원은 강점기 1916년 도립자혜의원으로 출발하였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하튼, 이 섬의 면적이나, 해안선 길이나, 인구가 몇 명인가에 관해선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유라면, 어떤 고찰에 가면 실지 보이는 모습에서 세월을 유추하며 보이는 것에 대해 그냥 느끼면 되는 것을 굳이 창건연대가 언제이니 하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한 소록도 길을 걸으면서는 무심했지만,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생각하니 박범신의 산문 중에 ‘사슴에 관한 은유’가 줄곧 상념의 바다에 생채기처럼 파도로 일렁이게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랑만을 이야기할 뿐 부끄러움이나 어두운 과거는 빗장을 채우고 숨기려 하듯, 푸른 초원에서 야생을 살아가던 한 마리의 수컷 사슴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상징물처럼 솟은 뿔이 하도 멋있어 우쭐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가늘고 비약한 다리는 부끄럽도록 감추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맹추격을 해오는 갈깃머리 사자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하나 도망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 힘껏 달려 사자를 따돌릴 지경으로 껑충껑충 뛰었지만, 아뿔싸. 클레오파트라의 왕관보다 더 멋있어했던 뿔이 나뭇가지에 고만 걸리고 맙니다. 결과, 사자의 한 끼 식사의 제물이 되면서 그제야 부끄럽도록 감추고 싶었던 빈약한 다리에 감사하면서 눈물 한 방울과 함께 마지막 눈을 감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만물의 영장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흔히들 속된 표현으로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에서 기인하는데 이는 물불 안 가리고 여자라면 오로지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족속을 일컫는 것이고, 실지는 개만도 못한 여자도 적지 않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현실이, 달리 이번에는 속됨이 아닌 점잖게 말해서 머릿속은 백설이 내린 것처럼 하얗고 맑은 분들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백치처럼 든 게 없는 이들의 특징이 하나의 양심인 자신의 얼굴을 사기라는 사전적 용어와 다르지 않은 미용성형으로 수리 또는 구조변경 해버리고, 몸을 매매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마는 아르바이트를 하든, 얼간이 하나를 이용하든, 어떻게든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명품 따위를 가지려 하는 천박한 의식을 가진 부류들 말입니다.
형.
제 말이 많이 과했습니까. 언어도단이었습니까. 말이면 다냐고 꾸짖겠습니까. 그랬다면 사과하겠습니다. 하나 성형수술은 화상이나, 교통사고나, 불의의 사고로 원형이 상실되었을 때 부득불 그 원형을 최소한이나마 복원하기 위한 것이 성형수술이지 여성으로서의 신체를 부정하고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어찌 보면 멀쩡한 얼굴에 칼을 들이대어 테러를 가하는 행위나 짓거리에 불과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돈을 들여 말입니다. 그런데 성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얼굴이 문드러지고, 눈썹이 사라지고, 손가락이 뒤틀리고, 발가락이 없어지고, 신체라 말하기엔 너무나 사치스러운 천형의 병을 얻어 삶을 죽음처럼 살아가는 한센병 환자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사기와 같은 성형으로 거짓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와도 같이 맑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더 행복한지는 모르겠으나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가는 동안 만나는 얼굴들은 모두가 편안해 보였습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미소와는 달리 국립소록도병원을 지나자 만나는 붉은 벽돌의 오랜 건축물이나 병사지대 환자들이 미감아 자녀와 저만치서 눈으로만 만나던 수탄장愁嘆場과 환자들을 또 한 번 비탄에 빠지게 하는 검시실과 단종실, 그리고 비탄을 넘어 마음을 갈기갈기 헤집어 놓는 구북리 화장터 등 삶을 짓밟는 현장들에 비해 병원 뒤 중앙공원의 수목과 조경은 어디에 견주어도, 성형미인의 얼굴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풍경을 선사합니다. 다만 그 조경을 위해 수많은 한센인들의 땀과 한이 스며있다는 것을 생략한 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풍경 속에 가장 상징적인 것이 있다면 미카엘 대천사가 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의 구라탑救癩塔인데 ‘나병은 낫는다.’는 확신적인 언어는 개그맨 따위의 이름 구라와 다름이 없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보는 한편에 스스로가 문둥이라 했던 한하운 시인의 시비 ‘보리피리’가 입석이 아닌 와석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참으로 편해 보였습니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ㅡㄹ닐리리. /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 피ㅡ ㄹ닐리리. /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ㅡ ㄹ닐리리. /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 / 눈물의 언덕을 지나 / 피ㅡ ㄹ닐리리.” (‘보리피리’ 전문)를 읽고 그때 떠오른 생각은 천형 이전의 소년 한하운이었습니다. 보리피리 불며 뛰어 놀았을 그의 원래 이름은 태영泰永으로 함경남도 함주가 본향입니다. 학교는 1932년 함흥 제일 공립보통학교와 1937년 이리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 세이케이고 2년 수료 후 중국 북경으로 옮겨 북경대학 농학 원을 졸업했습니다. 이때가 1943년으로 대동아 공영이라는 기치 아래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어 가는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나병의 악화로 1945년에 사퇴하는 어려운 삶의 여정에 함흥 학생데모사건으로 체포되거나 나병의 치료비로 가산은 기울고, 유랑 생활을 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나환자 구제 사업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형.
‘나는 아프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해서 병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내 몸을 위해서 보약이나 좋다는 약을 먹고 높은 성벽처럼 보호막을 둘러도 어렵던 시절에 연탄가스 스미듯 스며드는 게 병입니다. 덧붙이자면 초대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손님에게 빗장을 풀어야만 하는 게 한갓 나약한 우리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몹쓸 병이 오지 않아서 그나마 육체적으로 정상인으로 살아가지만, 실지론 정신과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많고, 몸에 장애가 없다고 해서 영원히 장애가 없으라는 법도 없습니다. 하나 나도 언제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예비 장애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평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불편함이 나와 둘이 아님을 알 때, 이 사회는 12월의 크리스마스트리에 따뜻하게 반짝이는 전구의 불빛처럼 너와 내가 아닌 하나의 인식이나 의식이 하나의 유리알에서 발하는 빛의 가치와는 달리 보이지 않은 따뜻한 빛의 주제와 의미가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빛의 주제와 같이 그 의미와 가치가 남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불러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신들의 천국’을 집필하신 이청준 선생님과 그 소설의 주인공인 옛 소록도 나병원의 원장 조창원(소설 속 조백헌. 당시 육군 대령)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태동하는 시기는 1976년으로 제가 군에 입대하기 한 해 전입니다. 그런데 그 해가 어떤 해입니까. 유신의 섭정을 위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던, 웃기진 않았지만, 매우 웃겼던 시절에 이청준 선생은 소록도 한센인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소설화해서 우리 사회에 남다른 반향을 일으킨 작품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사랑과 화해라는 큰 틀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부여의 의미는 실지로 원장으로 부임한 조 원장은 소록도 주변의 더 작은 섬 오마도五馬島를 간척하여 환자들의 낙원. 즉, 당신들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헌신을 다 하지만, 군사혁명정부의 하수인과 같은 정치인들의 방해로 큰 뜻은 태풍 앞의 촛불처럼 빛도 힘도 발하지 못하고 꺼져버립니다. 하지만 조 원장의 선진적 노력은 역사 속에서 소멸하지 않고 더 큰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데 한 군데 성한 곳 없는 몸. 손은 손가락이 없고, 발은 발가락이 없는데 손수레에 흙을 담아 끌고 돌을 담아 밀면서 바다를 막는다는 일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못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꿈과 희망이라는 명제와 기대가 어떤 어려움도 가로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장감을 전해주는 시가 있는데 당시 간척사업 현장에서 한하운 시인 감격한 끝에 직접 써서 조 원장에게 건넨 시 ‘그대들의 땅’은 그대들의 땅이 되지 못하고 비록 미발표 유고작으로 남았지만, 가진 자들과 반대만을 위한 자들에겐 어떤 의미일는지는 저도 모르겠으나 희망의 불을 꺼버리는 어둠의 세력이었던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시를 느껴보면 말입니다. “문둥이가 / 문둥이들이 // 배에 돌을 실어서 / 바다에 돌을 던져서 // 풍양(豊穰) 곶(串)과 오마도(五馬島)를 이어 / 도양(道陽)곶(串)을 둑 쌓아서 // 바다와 / 바닷물을 밀어낸 // 바다 330만 평 해면이 / 육지 330만 평의 5만석 옥토(沃土)가 된 // 이 간척지는 / 이 나라 영토(領土)를, 지도를 확장한 / 대붕(大鵬)의 뜻 // 문둥이가 / 땅에서 못 살고 쫓겨난 한(恨)은 / 땅에서 살아보려는 원(願)은 // 살아보지 못한 땅을 만들어 / 나라 사랑의 / 마지막으로 바치는 영원한 보국(報國) // 살아서 마지막으로 확대된 이름을 씻어 / 사람 구실하는 // 오, 영광(榮光)의 땅 /햇빛 가득한 오마(五馬)의 땅이여 / 어둠에서 빛나는 햇빛이여” (한하운의 ‘그대들의 땅’ 전문)
형.
아무튼, 지나온 소록도의 역사에는 어둠과 비극 속에 살아 있는 일본인 원장의 동상에 한 달에 한 번 참배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날. 27세의 이춘복은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취했듯이 칼로 취합니다. 그리고 처형을 당합니다. 이는 한센인들을 치료라는 명목으로 강제징용하여 중노동과 같은 무간지옥에서 인권을 유린한 행위의 정당한 방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붉은 벽돌을 구워야 했고, 그 벽돌로 지은 병사지대 환자들이 미감아 자녀와 저만치서 눈으로만 만나던 수탄장愁嘆場과 환자들을 또 한 번 비탄에 빠지게 하는 검시실과 단종실, 그리고 비탄을 넘어 마음을 갈기갈기 헤집어 놓는 구북리 화장터 등 삶을 짓밟은 현장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라던, 죄명은 문둥이로 참 어처구니없는 죄라던, 그리고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리라 던, 한 시인의 눈에 어떻게 남았을까요. 청산 언덕에서 문둥병은 물론이고,세상의 어떤 고난도 몰랐던 그 보리피리 불던 소년에게......,
형.
세상일 천만사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억울함을 당한 사람의 처지를 대변하는 말이 있는데 실지로 권력이나 부, 기득권 등을 가진 사람들이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위로할 수 있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하지만 정치인이나 갑부나 졸부나 가진 자들의 탐욕은 끝이 없는 우주와 같습니다. 고위관료 청문회에 보면 위장전입이나 병역, 투기, 납세 등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천형이 있다면, 이들이 모두 신도시 아파트 우선순위 대상자와 같은 순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아픔 속에서도 긍정하며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 한센인들은 다시 태어나 누군가를 위하며 이 사회를 맑고 밝고 훈훈하게 할 근원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작은 사슴을 닮았다는 섬을 뒤로했던 오래전의 기억을 유추해 보았습니다. 다시 소식 전언하겠습니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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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서 제가 문득 아팠군요... ㅎ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