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문무겸전 열전의 이야기가 너에게 더 쉽고, 재미있게 받아 들여지고, 또 깨달음을 주며 이들을
귀감으로 삼아 많이 배우길 바란다.
지난 이야기에서 고려 때의 명재상이자 장군인 문숙공 윤관 장군과 동북9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오늘 이야기도 고려시대 인물을 다뤄볼까 한다.
아빠는 고려(高麗)하면..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동북아의 균형자, 강소국(强小國).
아들아, 그런 고려의 문무겸전 인재들 중에서 최고봉에 있는 분들이라면, 세 분을 꼽겠는데..
장위공 서희, 인헌공 강감찬,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해당되지 않나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문신 출신의 장군이면서, 여요전쟁에서 활약했다는 것이 되겠다.
이분들이야 말로,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넘볼 수 없는 강소국 고려를 만든 주역들이다.
이들 최고의 문무겸전 인재들을 차례로 소개해볼까 해.
오늘은..이분들 중에서 첫번째 인물인 장위공 서희(章威公 徐熙, 942~998)선생 얘기를 하려한다.
먼저 장위공 서희 선생의 부친이 되시는 정민공 서필(貞敏公 徐弼,901~965)선생은 고려 제4대 왕인
광종대왕 대 활동한 명재상인데..이분은 조선 태종과 세종대왕 대의 문신 허조 선생과 비슷한 분이야.
그러니까 미스터 쓴소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겠다.
광종대왕과 정민공 서필 (드라마 제국의 아침)
광종대왕이 그의 치세에 수많은 업적을 남기긴 했는데..상당히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에 수많은
호족들을 숙청하며 피를 많이 흘리게 만들었지.
조선의 태종대왕하고 비슷한 케이스의 인물이긴 한데 심지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 태자 주(후일의 경종)마저
의심하고 죽이려 들었을 정도이니..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제 명에 살기 힘들지.
서필 선생은 이런 광종대왕의 면전에서 목이 두개도 아니면서 수없이 쓴소리를 한 대단히 강직한 인물이야.
장위공 서희 선생은 960년에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출사했는데, 약관도 안된 젊은 나이였단다.
다른 이도 아닌 정민공 서필 선생의 장자이니..꽤 많은 주목을 받고 기대를 받았겠지.
이후 나름 순조롭게, 단계를 밟아가며 승진하고 순탄한 벼슬생활이었던 것 같아.
고려 성종 때인 982년, 중국의 송(宋)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를 수립하면서 외교전선에서 활약했고,
다음 해인 983년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었단다.
병관어사는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관의 장이니..지금의 국방부 장관 쯤되는 벼슬이라 보면 된다.
외교와 군사분야의 업무를 차례로 맡으면서 기량을 발휘하니..바로 이게 문무겸전 아니겠느냐.
훗날 제1차 여요전쟁 때 활약하게 되는 전설의 출발점이 되겠다.
거란족 전사
아들아, 10년이 지나..993년, 고려는 위기 상황이었단다.
거란은 해동성국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을 압박해서 연운16주를 탈취하면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지.
또 몽골의 초원과 사막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해서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최강의 전사들, 가장 잔혹한 전사들..그들은 동북아를 공포로 몰아 넣었지.
그 요에 젊고 야심찬 군주인 성종(聖宗), 야율융서가 즉위했는데, 요가 전성기에 접어 들고 있었는데
이들이 고려를 노리고 침공해 왔어.
918년 고려 건국이래 최악의 위기상황이었지.
아들아, 고려의 하늘을 연 태조 왕건은 요가 동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 해서 화친하러 온
요의 사신을 귀양보내고, 선물로 가져온 낙타 50마리는 만부교라는 다리에 묶어 굶겨 죽여 요를 자극했고,
북진(北進)을 국시로 천명하였으니 당연히 북쪽의 요와는 충돌을 빚게 되지.
뿐만인가? 고려는 또 요와 적대관계에 있는 송(宋)과 국교를 맺고 교류하면서 요를 적대시했고
요는 본격적으로 송을 압박해서 중원으로 나아가려 하는데..계속 후방의 고려가 신경쓰여.
본격적인 중원 진출 전에 고려를 미리 손을 봐서 후방부터 안정적으로 다질 필요가 있겠다 싶었지.
이런 상황이니..고려와 요의 전쟁은 필연이고, 시간문제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요 성종은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했지.
993년 10월..요의 소손녕 왈(曰), 8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성종은 시중 박양유(朴良柔, ?~?)를 상군사(上軍使),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中軍使),
문하시랑 최량(崔亮,?~995)을 하군사(下軍史)로 삼아 북계를 방비하며 요에 맞서게 했고
성종도 서경으로 행차한 후, 장병을 독려하고자 안북부(현재의 안주)로 나아가 머물렀어.
고려는 윤서안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봉산군(평북 구성과 태천 사이)에서 첫 전투를 벌였지만,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단다.
강력한 요의 대군과 직접 맞붙어 싸워보고, 또 80만 대군이라는 수에 기가 눌려서..
어처구니 없게도 서경(평양) 이남 황주와 절령 이북의 땅을 넘겨주고, 화의를 청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고려 성종도 이 말에 따르려 했었단다.
그래서 서경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등 일대 혼란이 벌어졌지.
이때에 민관어사 이지백과 중군사 서희 선생이 나서 항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단다.
일단 제대로 싸워보고서 안되면 항복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어떻게 쉽게 국토를 내어줄
생각을 하는가 하고 질타하면서.
결국 고려 성종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고, 고려는 다시 항전하기로 했단다.
요의 소손녕은 고려의 회신이 없자, 청천강 하류의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해 왔는데,
겨우 1천여의 병력으로 대도수 장군이 요의 대군을 잘 막아내어, 승전을 거두며 분위기 반전에도
성공했지. 이제 칼자루를 쥔 것은 요가 아니라 고려가 되었다.
드디어..고려와 요는 전쟁을 두고, 한자리에 앉아서 협상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거란다.
아들아, 드디어 고려는 중군사 서희, 요는 정벌군의 지휘관인 소손녕이 나서 요군 진영의 협상장에서
마주앉았다. 처음엔 기싸움. 중군사 서희 선생의 승리.
고려가 요 보다 나라는 작고, 요의 힘이 더 셀지는 몰라도 고려가 신하국이 아닌 동등한 나라임을 각인시켰지.
다음엔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서 소손녕이 선공을 했지.
'요는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났고, 고려는 옛 신라 땅에서 일어났는데..왜 고구려 땅을 넘보는가.
마땅히 잠식한 옛 고구려 땅을 넘겨라.
또 고려는 국경을 맞댄 요를 멀리하고 멀리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으니 군사를 몰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듣고있던 서희 선생은 짐작하고 있던 요와 소손녕의 의도를 알아차렸어.
요의 영토 요구는 사리를 따져 논박할 수 있는 것이고, 요의 양보를 받아 낼 수 있는 조건.
하지만 요가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요의 적국인 송과 고려의 관계를 끊게 하고,
요의 후방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서희 선생은 소손녕의 논리를 받아 넘기면서 역공을 가한다.
첫째, 진짜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고, 고구려 왕도였던 평양에 도읍해서 서경이라 했다.
오히려 귀국(요)의 서울 동경도 그렇게 따지고 본다면 우리의 땅을 당신들이 점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아국과 귀국 사이에는 생여진(生女眞)이 점거하여 길을 막고 있어 바다로 통하는 것보다 더 험하고
어렵게 되어 있으니 여진 때문인 것이다.
이번엔 서희 선생이 결정적인 한 수를 던지지.
고려와 요 사이..여진을 몰아내고 성보(城堡)를 쌓아 길을 내어 통하면 어찌 조빙(朝聘)하지 않겠는가.
협상,담판은 주고, 받기다. 나와 상대의 이익과 명분을 따져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인가를 다투는 것이야.
소손녕이 뛰어난 장수인지는 모르지만, 학문과 언변, 전체 대국을 보는 눈까지 중군사 서희 선생의 상대가
될 순 없어. 이 담판은 서희 선생의 완승이다.
고려는 요에게 조빙, 즉 황제국 요에 대한 입조와 교류를 약속하는 명분을 주고, 대신 전쟁의 종결과
압록강 이남의 땅을 고려에 귀속시키는 명분과 실리, 이에 대한 요의 승인과 지지를 얻었으니까.
강동6주
이 협상의 결과로, 고려는 새로운 땅을 얻게 되니..바로 이게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구주, 곽주를
포함한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의 새로운 땅 여섯 고을, 강동6주(江東六州)란다.
그리고 서희 선생은 강동6주의 땅을 빠르게 확보하고 안정시키는 한편 이곳에 굳건한 성곽을 축조,
다음 요와의 전쟁에 대비해 요새화 시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