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4.
마음은 언제나 비워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비어 있으면 정의(正義)와 진리(眞理)가 와서 산다. 마음은 언제나 채워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꽉 차 있으면 욕심(慾心)이 들어오지 못 한다.(채근담: 採根談)의 말씀이다. 사람의 마음에 잡념(雜念)이 없으면 마음속에서 정의와 진리가 자라게 된다. 또 마음이 정의와 진리로 차 있으면 욕심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 한다.는 것이다. 복(福)은 마음대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니 즐거운 마음을 길러 행복(幸福)을 불러들이는 근본(根本)으로 삼아야 하고, 재앙(災殃)은 마음대로 피(避)하지 못하는 법(法)이니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버려 재앙을 멀리하는 방법(方法)으로 삼아야 한다. (채근담에서)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좋아하고 재앙을 싫어한다. 그러나 애써 구(求)한다고 해서 반듯이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며, 애써 피한다고 해서 재앙이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즐거운 마음을 기르면 행복이 찾아오고, 남을 해(害)치려는 악(惡)한 마음을 버리면 재앙이 멀어지게 마련이란다. 이것이 재앙을 멀리하고 행복을 불러들이는 길이란다. 그러니 행복 원하거든 다른 생각일랑 할 것 없이 즐거운 마음만을 갖추려면 될 것이고, 재앙을 맞으려면, 누구를 해치려는 악독(惡毒)한 마음을 품으면 된다니 그렇게 하면 될 것 이다. 요즘 내가 본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에 보니 누구를 해치려는 마음 가지고 무죄(無罪)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자기가 돌이 킬 수 없는 죄악(罪惡)을 저지르고 죽을 처지(處地)에 떨어지고 말더군요. 그러니 그런 처지가 부럽거든 한 번 해 보시기를..... 물론(勿論) 그럴 분은 없으시겠지요.
공자 왈; 순천 자(順天 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 者)는 망(亡)한다. 고 하였습니다. 서당(書堂)에 가서 공부(工夫)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요. 요즘은 그 반대(反對)더라. 하는 것이 현실(現實)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 대로 따라 살아보라지요.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자식(子息)들도 그렇게 가르쳐 보시지요. 그대로 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니까요. 요즘 세상(世上)에 고리타분하게 윤리(倫理)니, 도덕(道德)이니 하며 그 구시대(舊時代)에 낡은 고물(古物)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면 그 누가 성인군자(聖人君子)라고 할 것이며 그렇다고 무슨 복이 굴러들어올 것 같으냐? 할지 모르지만, 마음에 헛된 욕심이 없으면 걱정과 괴로움이 사라지므로, 험하고 악(險惡)한 세상에서 살아가더라도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이나 잔잔한 바다와 같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거문고와 책을 옆에 두고 이것으로 마음을 밝게 한다면, 세속(世俗)에 살고 있을지라도 선경(仙境) 사는 것처럼 즐거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어른들의 말씀이다. 어른의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게 된다고 한다. 잠을 자는 사람의 몫은 없어도 심부름을 간 사람의 몫은 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자다가도 떡을 받게 된다는 것은, 행운(幸運)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니 어른의 말씀을 듣고 안 듣는데 대한 차이(差異)는 화복(禍福)의 갈림길과 같다는 것이다. 전(前)에는 부모(父母, 어른의)의 말씀이라면 소금 가마니를 물로 끌라면 끌어야(이유(理由) 여하(如何)를 묻지 말고 소금 가마니를 물로 처넣어야 한다.)한다고 하였다.
위에 말씀 중에 듣기에 불편(不便)하거나 마음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독자(讀者)가 틀린 것인지? 이렇게 쓴 내가 틀린 것인지 생각해 보고 틀린 사람이 누구인지 고치도록 해야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 될 것이니 행복의 길과 앙화(殃禍)의 길이 내가 가기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원효대사(元曉大師)와 같이 귀향(歸鄕)합시다. 가다 힘들면 쉬었다 갑시다.
거이(居易) 김 토마스
.......................................................................................................
.
1779년 이벽을 중심으로 학자들이 천진암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의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하여 학자들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한국 교회 최초의 정식 세례자가 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여러 학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호남의 사도라 불리던 유항검은 신자들 스스로 성사를 집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하기로 하였다. 1789년 윤유일이 북경에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평신도에 의한 성사 집전의 부당함을 깨닫고 돌아온다. 1790년 윤유일은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다시 북경의 주교에게 파견되었고, 이 요청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곧 신부의 파견을 약속하였고, 아울러 윤유일에게 미사경본 등의 성물을 들려 보내고 포도주 담그는 법 등을 알려주면서 성직자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1791년 2월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가 조선으로 파견되어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기로 하였으나, 신해박해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조선 교회에서 사람을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써 첫 사제의 영입은 무위로 끝난다. 조선 교회는 1793년 다시 윤유일과 지황을 북경에 보내 사제 파견을 거듭 요청하였고, 이에 주교는 학문과 인품을 갖춘 조선 사람과 비슷한 풍모를 지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의 신자들을 만나 조선 땅을 밟은 주문모 신부는 1795년 1월 4일 한양에 도착하고,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마련한 북촌심처(北村深處) (가회동 관할 구역)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그로부터 언어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그곳에서 주문모 신부는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를 봉헌하였다.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가회동은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가 집전된 장소요,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의 거점으로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