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여보… 오늘은 바람이 제법 차네요.
이제 정말 겨울이 오려나 봐요.
그래서… 동치미를 담갔어요.
당신 좋아하잖아요.
동치미 국물 한 그릇에 밥 비벼서 후루룩 먹던 그 모습이…
문득 보고 싶더라고요.
할아버지:
또 무리했구려…
이제 좀 쉬어도 된다 했잖소.
자식들 줄 거 준비한다고 당신 몸 아픈 걸 또 감추고…
당신은 늘 그래요.
속으로만 앓고,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할머니:
그런 건… 괜찮아요.
나는… 참는 데 익숙한 사람이잖아요.
살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부부란 서로 기대는 것도 좋지만,
때론 한 사람이 무거운 걸 들어줘야
함께 오래 간다는 걸요.
할아버지:
…그래도 너무 혼자 버텼잖소.
나도 같이 늙었고, 같이 지쳐갔는데…
왜 그걸 나눠주지 않았소, 여보.
할머니:
나눠주면… 당신이 더 아팠을까 봐요.
당신은 말은 툭툭 해도, 마음 여린 사람인 거
내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할아버지:
그래도 말이오…
우린… 이제
내 말 받아주는 사람,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
당신밖에 없잖소.
할머니
그러니까… 동치미 담갔잖아요.
그 국물에 겨울 내도록 속 시원하라고.
우리 아들 올지도 모르니까…
할아버지:
그놈은 언제 오겠다고만 하지.
사업한답시고 여기저기 돈만 퍼다주고,
우리가 죽어라 모은 거 다 허공에 날리고…
할머니:
그래도… 내 새끼인데요.
어릴 때는 손만 잡고 있어도 행복해하던 놈이잖아요.
아직도 그 조그마한 손이 기억나요.
그 손 놓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걸 잊을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
…맞소.
우리 둘이 밤새워가며 업고 재우고,
먹을 거 없어서 서로 안 먹겠다고 싸우던 날도 있었지.
그 아이들 키운다고…
우린 평생, 우리 자신은 뒷전이었지.---
할머니:
그게 부모지요.
사랑이란 게… 늘 손해 보는 것처럼 보여도,
남는 건 결국… 마음이잖아요.
할아버지:
당신은 늘 그런 말 해요.
그러니까… 당신이 더 고운 사람이었구먼.
나는 늘 잔소리만 하고, 괜한 화만 내고…
그래도 당신은 나를 끝까지 안 떠났소.
할머니:
왜 떠나요.
우린… 싸워도 결국 같은 방에서 자고,
티격태격해도 한 상에서 밥 먹었잖아요.
그게… 부부 아닌가요?
할아버지:
…맞소.
결국… 남는 건 당신밖에 없었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자식들이 아무리 커도…
나는 늘 당신만 바라봤어요.
할머니:
여보…
혹시 나 먼저 가더라도
너무 오래 슬퍼하진 말아요.
난… 당신 옆에서 평생을 충분히 사랑받았어요.
그거면 돼요.
할아버지:
그런 소리 말아요…
이제 나 혼자 남으면 어쩌라고 그래요.
동치미 국물 혼자 퍼먹으란 말이오?
할머니:
당신, 알죠?
동치미는 그냥 무 담근 물이 아니에요.
그 속에… 내 손맛이, 내 정성이,
그리고… 내 사랑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 그걸 한 숟가락 뜰 때마다…
내가 당신 곁에 있는 줄 아세요.
할아버지:
…당신…
그럴 거면 아프지 말았어야지.
숨기지 말았어야지…
(목이 메어 잠시 멈춤)
할머니:
(조용히)
여보…
미안해요.
고마웠어요.
그리고… 정말… 사랑했어요.
(할머니의 손이 조용히 풀려나간다. 할아버지는 흐느끼며 손을 꼭 붙든다.)
할아버지:
당신…
이 사람아…
우리, 다음 생에도 또 만나서
티격태격… 다시 시작합시다.
그땐 더 오래, 더 많이 웃읍시다.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부모는 자식이 올 날만 손꼽다
조용히 떠났다.
동치미 국물처럼 맑고, 시린 그 마음을…
자식은 부모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인생은 참 짧고,
사랑은… 말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서로를 바라봐 줄 수 있을 때…
한 숟가락 국물처럼 따뜻한 말,
그게 마지막까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