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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9일 [연중 제33주일]
마태오 25,14-30
사랑도 일종의 투자다
사제가 되어 보니 저에게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액수라면 일단 줍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처음에는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하고, 그다음은 마지막이라고 하다가, 결국엔 계속 달라고 하고 그 액수는 점점 커집니다.
결국엔 재정적인 부담도 되고 내가 호구가 되는 느낌도 들고 심지어 돈을 갈취당하는 기분마저 듭니다.
그럴 때라도 사랑은 주는 거니까 계속 주어야 할까요?
그들은 아마도 사랑은 한없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확장되다 보면 하느님의 사랑도 오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옥’의 존재도 부정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무한한 사랑인데 인간을 만들어놓고
어떻게 지옥에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했다고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일종의 ‘투자’입니다.
투자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주인은 하인들에게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맡기고 떠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텔렌트를 받은 하인은 주인이 무자비하다고 여겨 무서워서 그 돈을 땅에 묻어놓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불리지 않은 종의 운명은 그 한 탈렌트를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빼앗기고 영원한 불 속으로
추방당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주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주고 그 열매를 살핍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존재에게는 그동안 주던 사랑마저 거두어들입니다.
쓸데없이 자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줍니다.
그런데 이것도 투자입니다.
자녀가 자신들처럼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사랑에 감사하여 그렇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그런 자녀는 심지어 부모의 돈을 훔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부모가 준 은총은 그에게 저주가 된 것입니다.
그를 도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이들만이 그 은총이 구원의 은혜가 됩니다.
1994년 5월 서울 삼성동 고급 주택에서 불이 나서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한약 유통업을 하며 그 부부는 200억 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 박한상 군이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고 방화로 위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유학 중에 많은 돈을 유흥과 도박으로 날리자 부모가 돈을 주기를 거부하자 그러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동안 그 아이에게 무분별하게 주었던 돈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옥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루카복음 13,6-9절엔 포도밭에 심어진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밭에 한 그루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삼 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베어버리라고 하였으나, 종은 1년만 더 가꾸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여기는
바리사이를 상징합니다.
오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입니다.
불만을 가진다는 말은 자신은 더 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받은 것에 감사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 그것은 당신께 되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 열매 맺지 못하여 하느님 사랑의 투자가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에 마련한 장치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만을 자아내는 뱀의 말에 솔깃하여 그 소출의 십분의 일도 바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고 결국 에덴에 살 자격을 잃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모반이 있어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결국 끝까지 감사를 찾아내 기쁘게 살아가는 김희아 씨는 자신의 두 딸에게도 감사를 가르칩니다. 딸들은 남들보다 외모가 못난 엄마를 보면서도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참 불쌍하다!”라고 하며 엄마 없이 산 엄마를 불쌍하게 여깁니다.
이때 부모는 자녀에게 목숨까지도 내어놓습니다.
자녀가 본인이 투자한 대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주가 아니라 은혜로 만들기 위해 무조건 받은 것에 감사의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면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에 살게 되지만, 불만을 품으면 뱀의 소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 사랑의 투자에 수익을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9일 [연중 제33주일]]
마태오 25,14-30
<모든 것이 다 선물입니다>
시각장애인 이재서 교수님 자전 에세이「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아픔이지만 창조를 위한 기회입니다.
고난은 언제나 설명서 없이 불쑥 찾아옵니다.
하지만 설명서는 언제나 나중에 옵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고난이 끝인 줄 알고 쉽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 인내하고 참아야 합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기쁨과 감사로, 그 고난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말해주는 설명서를 받아 읽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에세이에는 15살 때 찾아온 실명(失明)을 다정한 친구로, 축복 중 축복으로 여기는 이 교수님의 특별한 인생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실명한 것에 대해 억울해 하지 않고, 원망도 않으시는 교수님은 이렇게 외칩니다.
"실명,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실명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실명한 이후 기나긴 좌절과 고통의 세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네 가지 눈'이라는 제목의 강의였답니다.
"사람은 사물을 보는 육안(肉眼), 지혜를 터득해 가지는 지안(智眼),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 종교의 힘으로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靈眼) 등 네 개의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비록 육안은 잃었지만 나머지 세 개의 눈은 정상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기에 겪어야만 했던 모진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돼준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의 눈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그런대로 견딜 만하게 됐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가끔씩 마주서는 절벽 앞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됐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찾아냈고, 그것을 키워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 교수님은 보란 듯이 우뚝 섰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강단에 서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북한 장애인 지원 사업에 열정적으로 투신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귀감이자 큰 빛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할 것을, 그래서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이웃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노심초사했던 종에게 주인은 화가 잔뜩 나서 호통을 칩니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주인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성실하게 노력해서 맡긴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빈둥거리며 게으름을 피운 종을 주인이 잘 봐줄 리 없습니다.
그는 주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결실 없는 인생, 자신의 인생에 불충실한 삶,
숱한 은총의 선물을 받고도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나이가 만만찮게 들어가면서, 수도생활 연륜도 점점 늘어만 가는데도 제대로 된 열매 한 번 맺지 못하니 하느님 앞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아무런 장애도 없으면서, 특별한 불편이나 어려움도 없으면서 '나는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하며 자신을 비관만 해왔습니다.
그 숱한 황금 같은 시간들을 아깝게도 그저 '죽이며' 지내왔습니다.
아직도 새파란 나이에 '이 나이에!' 하며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건강한 몸 하나만으로도 저는
참으로 큰 은총을 넘치도록 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꾼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약점, 상처, 고통, 십자가조차도 일종의 달란트들입니다.
우리를 보다 큰 그릇으로 만들고자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들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하루, 어떠한 시련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하루,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일 강론>
(2023. 11. 19.)(마태 25,14-30)
<탈렌트의 비유>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여기서 ‘탈렌트’는 ‘재능’을 뜻합니다.
그 재능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재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재능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재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탈렌트를 ‘성령의 은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7-9.11.29)”
우리는 세속의 사회적 불평등을, 즉 빈부 차이, 교육 여건과 환경의 차이, 주거 여건과 환경의 차이, 정치적 여건과 환경의 차이 등을 ‘탈렌트의 차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히 악이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명백하게 ‘죄’입니다.
사회의 ‘악’을 모두 ‘탈렌트의 차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착각했던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탈렌트의 차이’는 그런 불평등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설명한 것처럼 ‘은사의 차이’이고 ‘직분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더 좋거나 덜 좋은 것이 없고, 더 높거나 낮은 것이 없습니다.
<다섯 탈렌트가 가장 좋은 것도 아니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가 덜 좋은 것도 아닙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6-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입니다.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을 땅에 숨겼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다가 실패한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만일에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으로 투자를 했다가 원금까지 잃어버렸다면?
주인은 그를 꾸짖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려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돈을 땅에 숨기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돈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쓴 것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죄’의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린 그 두 사람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한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라는 자신들의
직분을 더럽혔고, 그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을 모독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헤로데가 물었을 때, 그들은 미카서 5장 1절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이라고 곧바로 대답했습니다(마태 2,4-6).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 지식도, 또 그들의 직분도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주인이 첫째 종과 둘째 종에게 한 말을 보면 똑같은 말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결과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맡긴 일을 잘한 것에 대한 ‘상’으로 ‘많은 일’을 맡긴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일’은 지상에서의 신앙생활로,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주인이 맡기겠다는 ‘많은 일’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29절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주신 은총에 합당하게, 또 충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받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0절의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5,13).
아무것도 안 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