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범의 아들, 국민을 먹여 살리다
역적의 아들에서 농업의 성자로
우범선과 우장춘, 엇갈린 부자의 운명
풍운아(風雲兒)라는 말은 바로 그를 위해 있는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그 사전적 의미는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해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19세기 후반 신문물과 외세가 함께 밀려오던 시절, 그는 개화파의 일원으로 민첩하고도 기세 좋게 활동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라의 역적’이 됐다. 그러나 스물세 번째 ‘악인전’의 주인공은 이 코너의 다른 인물과 달리 그의 사후 거대한 반전(反轉)이 일어났던 희귀한 인물이다.
일본 근대화 흠모하던 개화파 무관
“대원위 대감께 인사 여쭙니다. 훈련대 대대장인 우 참령입니다. 지원군을 이끌고 충성을 바치러 왔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 아소당에 병력이 들이닥쳤다. 조선 군대였고, 그 지휘관은 우범선(禹範善·1857~1903)이었다. 충성을 바치겠다는 말과는 달리 어투는 자못 위협적이었다. 경복궁에 침입해 왕비를 시해하려는 을미사변 계획의 일부로, 흥선대원군을 끌어내 사건을 조선 내부 분쟁인 것처럼 꾸미려 했다. 이때 대원군이 최소 한 시간을 나오지 않고 늑장을 부린 결과 ‘동트기 전 모든 일을 끝낸다’는 일본 측 당초 계획이 틀어져 많은 목격자가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이 우범선이라는 조선인은 도대체 누군데 을미사변의 시해범들인 일본인과 같은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가?
우범선은 충청도 단양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병법을 배웠으며 1876년 19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1876년 개항 이후 김옥균 등과 교유하면서 개화파의 일원이 됐다. ‘동양의 대세와 조선의 앞날을 생각했다’는 것이다.(‘친일파 99인’ 중 김도형이 쓴 ‘우범선’) 1878년 훈련원 판관, 1879년 교련관 등을 지냈다.
이때 조선은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고 우범선은 그것이 조선 군제를 근대화하는 길이라 생각해 별기군 참령관이 됐다. 이 무렵 별기군 훈련생에게 하극상을 당해 고변했으나 오히려 곤장을 맞았다고 하며, 참령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한 뒤 이 일을 문제 삼아 우범선을 체포했는데, 이렇게 해명했다고 한다. “난국을 헤쳐 나가자면 일본과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정을 알려고 간 것입니다.” 분명 메이지 유신 이후 진행되던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 흠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빠꾸 테토남’의 거침없는 행적
여기까지 보면 우범선은 (1)근대화에 뜻을 두고 (2)초지일관 그 뜻을 지킨 신념의 소유자였으며 (3)무인답게 민첩하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요즘 말로는 ‘노빠꾸 테토남’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랬다. 훗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망명했으며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명이 됐던 권동진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범선이 출중(出衆)한 줄 알았다. 그는 무엇보다 담력이 출중하였다. 대담하고 학식 있고, 학식 중에도 군사학에 특히 뛰어났었는데, 그 자신뿐 아니라 그의 조상도 대대로 군벌 집안이었다. 그래서 군부대신도 늘 그에게 물어 매사를 처리할 지경이었다.”
이후 훈련원 첨정, 황해도 청단의 찰방(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6품 관직) 등 무관직을 수행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척족들이 그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성품이 제멋대로고 행동이 정상이 아니다’라는 모호한 이유로 1886년 평안도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됐다. 이 유배는 6년 뒤인 1892년에야 풀렸다. 그는 조선 정부의 무능에 환멸을 느껴 ‘차라리 중이 될까’ 고민했다고 한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그해 6월엔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민씨 정권이 무너지고 다시 개화파가 집권했다. 우범선에겐 마침내 때가 온 셈이었다. 8월, 우범선은 갑오개혁의 주도 기관인 군국기무처 의원이 됐다. 엄밀히 말하자면 갑오개혁 당시 ‘친일파’는 훗날 러일전쟁 이후 ‘친일파’와 구별해야 한다. 갑오개혁의 주도 세력은 근대화를 지향하는 전술적 차원에서 ‘친일’을 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민족 반역’ 차원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1895년 4월 갑오개혁의 하나로 훈련대(訓練隊)가 창설되자 우범선은 제2대대장으로 발탁됐다. 훈련대 창설을 건의한 사람은 주조선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는데, 우범선은 잠시 이노우에의 수종무관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 5월에 김홍집이 사임하고 박정양 내각이 들어섰다.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정치 집단이 대두하는 분위기에서 왕비(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됨)는 친일 세력인 박영효를 쫓아내려 했다.
박영효는 여기서 ‘고종 폐위’의 맞불 작전으로 반격하려 했다. 이것이 ‘기사회생의 밀계’라고 표현되는 1895년 6월의 정변 계획이었다. 훈련대 장교를 끌어들여 왕궁을 점령한 뒤 고종을 폐위하겠다는 플랜. 당연히 이 계획에 우범선도 참여했다. 그러나 곧 누설돼 박영효는 변복을 하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조정은 친일 세력 대신 친러 세력이 장악하게 됐다. 9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새 일본 공사로 부임한 뒤 ‘위축된 세력을 만회하고 자파 세력을 부식하는 데 최대의 장애가 되는 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바로 왕비였다. 왕비를 시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조선인으로는 누가 좋을까?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암살 직전 일본에서 촬영한 우범선의 가족 사진. 오른쪽 여성이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다. 가운데 일본 옷을 입은 어린 아들의 이름은 기사 맨 마지막에 나온다.
일본과 손잡고 어긋난 길을 걷다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미우라는 우범선을 만난 자리에서 넌지시 물었다. “난국을 헤쳐 나갈 방도가 있겠소이까?” 우범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무부(武夫)요. 어떤 정견이 있을까마는 다만 조선의 정치 개선은 즉결적으로 그 당우(黨羽·패거리)를 일소하지 않으면, 비록 어떠한 고재(高才) 양책(良策)이 있을지라도 변개하기 어렵소.”
얼핏 고어를 섞은 심오한 문장 같지만 ‘그냥 정적을 다 제거해 버리자’는 단순무식한 말이었다. 왕비 시해를 미우라가 먼저 암시하고 우범선이 동조했는지, 미우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우범선이 먼저 이 말로 왕비 시해를 주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두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첫째, 우범선은 분명 미우라와 왕비 시해에 합의했다. 둘째, 우범선은 ‘일본인과 한패가 돼 왕비 시해에 가담했다’는 것이 향후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더구나 ‘시해 주범은 조선인 우범선’이라 선전하려 했던 일본 측의 속셈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여기서부터 분명 어긋나고 잘못된 길을 걸었다.
당시 서울에선 훈련대와 순검이 충돌해 난투가 벌어지는 일이 잦았고, 고종과 왕비는 훈련대를 해산하려 했다. 해산 위기에 직면한 훈련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비를 시해한 것처럼 꾸미려는 것이 일본의 계획이었다. 10월 7일 고종은 훈련대 해산을 하교했고, 8일 새벽 우범선은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궁궐로 들어갔다. 긴 칼을 찬 일본 낭인 뒤를 일본 공사관 수비대가 따랐고, 우범선이 이끈 훈련대가 그 뒤를 따랐다. 낭인들이 시해를 저지르는 동안 우범선의 부대는 그들을 좌익 후면에서 엄호했다. 낭인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산에서 불태웠다. 우범선은 부하 윤석우에게 지시해 그 유해를 땅속에 묻도록 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 사건은 내각 주요 인물의 척살을 명한 친위 쿠데타이기도 했고, 김홍집과 정병하 등이 광화문 앞에서 피살됐다. 우범선 역시 더 이상 조선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두황·황철 등과 함께 황급히 일본으로 망명했다.
술 마시던 중 칼과 철퇴가...
미우라 고로가 우범선에 대해 “사람은 좋은데 언제 피살당할지 모르는 사람”이라 표현했듯, 우범선의 일본 생활은 늘 암살당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 삶이었다. 도쿄와 고베, 히로시마 근처 구레로 거처를 계속 옮겨 다녔다. 만민공동회 사건 등으로 1899년 일본으로 망명한 전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은 ‘왕비 살해의 괴수 우범선’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암살을 결심했다. 1894년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처럼 출세하길 기대했다는 시각도 있다.
고영근은 우선 구레로 가 집 한 채를 빌렸고, 우범선과 안면을 튼 뒤 급속히 가까워졌다. 1903년 11월 24일 저녁 우범선이 고영근의 집을 방문했다. 고영근은 앉은 자리에서 그와 술을 마시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우범선의 뒤로 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단도를 꺼내 오른쪽 목을 찔렀다. 이어 고영근의 노비인 노윤명이 철퇴로 우범선의 머리를 수차례 내리쳤다.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고영근은, 고종이 이 문제로 이토 히로부미와 통화하는 등 사건이 외교 문제로 비화되자 징역 5년으로 감형됐고, 복역 뒤 귀국했다. 반면 참혹하게 암살당한 우범선은 ‘비참한 말로를 맞은 반역자’가 돼 세상에서 잊혔다.
그리고, 에필로그
하지만 그의 사후(死後)에 반전이 일어났다.
우범선이 일본인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망명한 지 2년 뒤인 1898년 얻은 아들이었고, 암살 사건 때 불과 다섯 살이었다. 부친이 죽은 직후에 고아원 생활을 했을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 도쿄제대 농대 실과에 다니던 중, 훗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되는 와세다대 유학생 김철수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네 아버지는 역적이자 매국노다! 속죄하기 위해선 네가 배운 것으로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
충격을 받은 우범선의 아들은 이후 정말 그렇게 살았다. 1936년 도쿄제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50년 신생국이자 세계 최빈국이며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던 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환국했다. 초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등을 지내며 한국의 농업 발전을 위한 육종 사업에 전념했다. ‘출중한 능력’과 추진력, 한 번 설정한 목표를 위해 돌아보지 않고 매진하는 것은 부친을 닮은 듯했으나 이번엔 방향이 어긋나지 않았다.
빈약했던 한국 배추가 그로 인해 비로소 풍성해졌고, 벼·감자·무가 새롭게 개량됐으며, 제주도에선 감귤 농사가 제대로 시작됐다. 한국인의 밥상이 그에 의해 업그레이드됐다. 그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주려 했던 농림부 장관직도 거절하고 1959년 별세할 때까지 농작물의 연구와 개발에 헌신했다. 그의 이름은 우장춘이었다.
그는 과연 부친의 죄를 갚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긴다.
오늘 아침 페이스북에 게재된 페친 오제학님 글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