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트레인
황유원
담배는 끊었지만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한 대 빌리고 싶지만
곁에 그럴 누군가도 없을 때
블루 노트 음반을 듣는다
고등학생 때 용돈을 모아 산
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
같은 앨범을 듣는다
기차는 여전히 잘 달린다
그때 이후로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듯
잔기스만 조금 난 채
새 기차처럼 어둠 속을 달린다
기차는 물론 증기 기관차고
그럼 어두운 방안은 어느덧 하얀 연기로 가득 차는 것이다
담배를 빌릴 그 누구도 방에는 없지만
기차가 대신 담배를 피워주며
이 밤의 끝까지 나와 함께
달려주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기차를 달리게 하는 이 친구들을 태우고서
트럼펫에 리 모건
트럼본에 커티스 풀러
테너 색소폰에 존 콜트레인
피아노에 케니 드루
베이스에 폰 체임버스
드럼에 ‘필리’ 조 존스
이름만 나열해도
이렇게 호명해보기만 해도 담배 연기인지 기차 연기이지
어쨌든 뽀얀 연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이름들
그럼 어느새 내 입에는
끊었던 담배가 물려 있고
담배 피우던 시절에도 피우지 못했고
맛보지 못했던
담배의 이데아 같은 게 주변에 온통 편재하고
나는 어느덧 그들이 모는 기차가 되어 이렇게 밤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는 음반처럼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돈 자리를 또 돌고 돌며
마치 지구가 그러하고
달이 그러하듯
어쩌면 은하계가 그러하듯
그렇게 돌고 돌고 돌고 돌며
모두들 함께
심지어 이제는 다 죽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 멋진 흑인 친구들과 함께
칙칙폭폭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깊어지고 말았을 때
거기서 딱 한 발자국만 더
깊어져보는 것이다
이 밤이
담배 연기보다 더 깊숙이
폐부로 빨려 들어오는 것이다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佛陀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게 그 안에 들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것은 불과 하나가 돼
그것은 하나인지 여럿인지도 알 수 없는 것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알아봤자 뭐 하겠느냐고 자폭하며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산의 정상에 이르기 전에
목이 말라 목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누가 그에게 물병을 건네준다
참 좋은 사람!
불타는 물을 조금만 마시고 다시 물병을 돌려준다
물과 불은 음소 하나 차이지만
정반대의 성질을 지녔다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 모양 그 꼴이다
영원히 물타오르고 있었다는 말은 없고
영원히 쏟아지는 물이 영원히 불타오르는 산을
다 식혔다는 말도 없다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영원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영원은 도롱뇽목 영원과의 동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초시간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후자의 영원은 영원히 망가진 대형 괘종시계의 얼굴 같은 것이고
전자의 영원은 그 괘종시계 얼굴 위를 느릿느릿 기어가던 분침 같은 것이다
무슨 영원이 됐든 영원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영원한 시간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영원이 물갈퀴가 달린 짧은 발로 영원히 불타오르는 시간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헤엄치는 와중에 통구이가 되어가고 있었고
너희는 그것을 소주와 함께 맛있게 씹어 먹었다
불타오르는 시간 속에서
불타오르는 산을 바라보며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이제 도중에 쓰러져 열반에 들어
열반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물처럼 하늘로 올랐다가
물처럼 추락하지 않고 하늘에서 더 높은 하늘
하늘 위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올라
모두가 불타오른 후 불의 손길에서 벗어나
불타오르는 아래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진입하며 소멸하고 있었다
찬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영원의 뼈가 오도독
씹히고 있었다
다들 입가에 시커먼 재가 묻어 있었다
영화 없는 OST
음악보다 사운드에 더 관심이 가는 이유는 아무래도 후자가 덜 인위적이기 때문인 듯하다. 음악은 뭐랄까, 때로 너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턴가 프레임을 꽉 채운 서양화를 보면 속이 좀 거북해지다 못해 미술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졌는데, 가끔은 음악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적인 것이 더 낫다는 식의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 귀에서 이어폰을 뺀 지도 십 년이 넘었다. 나는 시끄럽다고 귀를 틀어막는 것보다는 온갖 소리에 노출되는 것을 좋아한다. 낯선 거리를 걸으며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살아있는 소리를 채집하는 것을 좋아한다(오늘은 베를린에서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앞을 걸으며 우연히 9시에 치는 종소리와 누군가가 부르는 가라오케 노래 소리와 도로의 소음을 녹음했다). 때로는 무의미한 잡음이 ‘꽉 채운 서양화’ 같은 음악보다 훨씬 낫다. 결국 그런 잡음을 영감으로 지극히 인위적인 장르인 ‘시’를 쓴다는 게, 순수한 사운드보다는 불순한 음악에 더 가까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게 굴욕적이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최근의 가장 인상적인 소리 체험은 뒷산에서 한 것이다. 사는 게 지겨워져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질 때면 혼자 뒷산에 가서 무작정 걷곤 하는데(그렇다, 이 세상에는 딱히 도망칠 곳도 없다), 작년 초가을이었던가,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이 급격히 평안해져서 그대로 멈춰 서버린 적이 있다. 나는 거기 주저앉아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나를 전부 내맡겼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아주 멍하니. 나의 지저분한 존재 전체가 연한 풀빛으로 온통 물드는 듯했다. 그때 떠오른 문장. 어쩌면 오래된 질문의 변주. “숲에서 풀벌레가 울 때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면 그 풀벌레는 소리를 낸 것인가?” 물론이다.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듣지 못했을 뿐. 나는 모든 걸 듣고 마음속에 녹음한 다음, 그것을 시에 샘플링하는 쪽을 택한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존재하지 않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OST를 만든 적이 있다. 정작 영화는 없고, OST만 있는 영화. 그런데 신기하게도 요즘 내가 틈틈이 해나가는 여러 작업 중 하나가, 사카모토의 저 작업과 거의 정확히 반대되는 작업이다. 즉 어떤 영화의 OST만을 듣고 거기서 떠오르는 느낌으로 시를 써나가는 일. 사운드트랙은 모두 서른한 개로 이루어져 있고, 각 트랙의 제목은 거의 한두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계획은 트랙마다 한 편의 시를 써서 모두 서른한 편의 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서른한 편은 한 편으로 읽혀야 할 텐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편의 시-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영감을 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지 않기로 한다. 순전히 소리에만 집중해서 한 편의 시-영화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물론 이 영화는, 다른 모든 영화가 그렇듯, 도중에 엎어질 수도 있겠다. 완성되더라도 상영관은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알 게 뭔가. 나는 나를 즐겁게 하려고 시를 쓴다. 일단 내가 즐거워야 한다. 시를 쓰는 동안만이라도 즐거워야 한다. 내 시의 동반자는 여럿일 테고, 나는 그들을 다 인지하지도 못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언제까지나 사운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