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인정하라, 네 길을 지도 하시리라 (잠언 3장 6절)
-----------------------------------------------------------------------------------
오늘 말씀을 다른 번역본으로 살펴봅니다. 표준 새번역입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우리말 성경입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네 갈 길을 알려 줄 것이다” 바른 성경입니다. “너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리하면 그분이 네 길들을 평탄케 하실 것이다” 여러 번역본들을 요약해 보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모든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다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지도해주시고, 길을 곧게 하시고, 길을 알려 주시고, 길을 평탄케 하신 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성공의 필수 요소라는 말씀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3가지 소원을 아실 것입니다. “나의 첫 번째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요. 두 번째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요. 세 번째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요” 김구 선생의 역사적 상황과 그 분이 걸어 간 길들에 비추어서 대한민국의 독립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과연 제일의 소원을 무엇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원하십니까? 누구나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오붓하게 여행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하는 소소한 소원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잠언 3장 4절 말씀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소원이, 일확천금, 신분상승, 무한권력, 학벌과 스펙, 이런 큰 결과를 이루어내는 성취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제일의 소원은 언제든지,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함께 동행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누리기를 바라고 원하는 모든 부요함과 풍요함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얻게 되는 평안과 안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특히 잠언 3장은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듣고 나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함께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그를 인정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은 명령법으로, 인정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만 한다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조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정한다는 히브리어는 완곡한 어법으로 사용되었으며, “알아라”는 뜻입니다.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에서, 그가 하나님을 지칭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라”는 말이 됩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말하기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말했습니다. 공자의 말속에는 인간의 앎이 한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인데 다 아는 것처럼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기를 너무나 쉽게 합니다. 유홍준 교수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글쓰기의 대가인 그에게도 “아는 만큼만 쓸 수 있다”는 뜻이니, 실로 안다는 것은 그 깊음이 헤아릴 수 없는 경지를 이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라” 는 말씀은 공자나, 유홍준 교수의 말보다 더 난해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정해진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니 수시로 찾아가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뉴스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최신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sns로 하나님 근황을 살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카톡 이라도 개설해 놓으시면 수시로 대화하면 좋을 텐데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알라고 명령하셨는데, 막상 하나님을 알려고 하니 그 방법은 신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누구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까? 목사님이나,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원론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기도하면 돼, 마음을 집중해봐”“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고 말해 주지만, 그렇게 해 보아도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일까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불통의 대화만 계속 시도한다고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기도와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확실하다면, 나는 왜?, 나는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많은 질문들을 던져 놓았는데, 하나씩 생각해 봅니다.
먼저,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계셔서 존재하는 분이 맞는다면, 육체가 아닌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해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하셨으니 1년 365일 언제든지 우리와 만남을 가질려는 준비가 돼 있으신 분임이 분명하다면, 사실 이 조건들만 가지고도 하나님을 만날 완벽한 상황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들은 우리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교회를 다니면서 학습을 통해 지식적으로 이미 충분히 들어왔던 말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소위 ~카더라 통신(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추측)이 되지 않으려면, 내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알아야지만 내 것이 되고, 들어왔던 말들이 진실임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방법까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자주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됩니다. 또한 남과 남이 만나서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된다면, 서로의 감정 표현이나, 주고받는 말이나, 행동으로 보다 더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쌍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쪽의 일방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거나, 자주 접촉해 보려는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상황을 말할 때 방송에 대한 ‘예’를 자주 듭니다. 방송국에서 아무리 많은 다중 방송을 송출한다고 해도, 수신자가 수신용 장비가 없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전파 낭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다 채널로 우리와 교신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 쪽 수신기 본체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먹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압축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시도를 하지만 응답이 없다고 해서 중도에 쉽게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칼바르트(K.Barth)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말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시는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를 다른 말로 하면 ‘알려 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접촉하고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알려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 주십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실재하시는 분이고, 말씀(계시)해주시는 분임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알려 주는 분량만큼, 보여 주는 분량만큼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알려 주셔도 조금씩조금씩 알려 주시기 때문에 항상 부족한 것 같고, 어떤 때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경이롭고, 언제나 무한한 감동으로 다가 옵니다. 알면 알수록 신비한 경외감을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려는 무수한 노력을 계속 기울임과 동시에, 계시(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 하나하나를 정말로 소중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에 대해서 알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젊은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알려고 하는 일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지내는 것을 질책하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 앞으로 나아오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도 굳어져 버려 예배생활 자체만으로 만족해 버리고 마는 극도의 신앙 매너리즘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정작 중요한 믿음의 본질인데, 정해진 건물에서, 정해진 시간에 예배드리는 행위만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하며 안주하며 살아가는 나태하고 낮은 수준의 믿음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표면적인 이유보다 더 중요한 내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중도 포기하는 이유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며 짖고 있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제발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녀의 삶을 다시 태어났다는 말로, “중생(Born agin) 하였다”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태어났다면, 새롭게 되었다면, 새로운 인생패턴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흑 역사이건, 백 역사이건 우리의 과거가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 지금, 현재 시간부터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방향, 목표,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들이 완전히 새로워야 합니다. 다시 태어났는데도 예전과 똑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간다면, 진짜로 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이 맞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태어났다고 착각하고, 남이 그렇다고 불러주니 그런가 보다 하고 막연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에서 “인정”하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새롭게 된(거듭난,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말씀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찾아서 성경을 탐독하고, 계속 되는 의문과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 기도를 통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예를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데 나를 왜 만드셨을까?”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이라는데 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통과 수모를 당하고 돌아가셨다는데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을까?”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면 성령님이 오신다는데, 내 안에 항상 계시다는데, 성령 하나님은 정말 내 안에서 내 말과 행동과 생각을 속속들이 보고 계시는 것일까?” “성령 하나님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시고 도와주시고, 보여 주시고, 좋은 길로 인도 하신다는데, 왜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신가?” 이런 주제들을 떠올리며, 하나님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던져지는 현실을 지내고 있다면, 곧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품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 인식이라는 개념이, 다른 누군가가 “이런 생각 안 해봤어? 이런 것에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사람이라면, 예수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인식’이 계속 우리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요동을 쳐야지 지극히 정상입니다. 자연 발생적인 현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인식의 상황들로 인해 마음의 요동이 우리 안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없습니까? “나는 그런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인식한다는 것이 꼭 중요한 일인가요?” 이런 답변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알아가려고 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있는 ‘무 인식’의 상황 이라면,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사탄의 거짓에 속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죄’라는 수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불어넣어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통로를 통째로 막아 버립니다. 죄는 광범위하게 우리를 조종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됩니다. 죄는 우리를 재미있게 하고, 즐겁게 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사탄이 쓰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상황과 현실을 앞세워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못하게 합니다. 삶을 바쁘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들고, 때로는 넘어지게 만듭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하여튼 사탄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 합니다.
사탄이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라는 존재는 불화, 분리를 목적으로 거짓으로 우리를 꾀임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는 하나님을 알려고 시도하는 인식을 무력화 시킵니다.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에서 “인정”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식’하는 것 다음에는 ‘인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인지’라는 것은 삶의 모든 현장에서,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지는 내가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서 보고 계심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과정이 준비단계라면,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열매를 맺어 결과물을 내 놓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인지’하는 삶은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넘칩니다. 하나님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나의 모든 삶의 무게들을 대신 져주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든지 나를 행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깨지고 넘어지고 뒹굴어도 결국 나를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에 데려다 주실 분이라는 소망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인지’함의 결과들이, 원천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사탄이 기를 쓰고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 곳곳에서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앞서서 말씀드린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체를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시작을 못하게 하면 결과물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을 알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지’하라는 말이 담겨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 앞에 “범사에”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범사는 모든 일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일 때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저런 일일 때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조석변개의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자기자랑이 앞선 다면,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결코 영광을 받으시지를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을 알라”는 명령을 다시 한 번 들으십시오. ‘인식’과 ‘인지’라는 단어도 다시 한 번 새겨 보십시오. 나의 지금 생활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황이라면, 사탄이 주는 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 있거나, 사탄이 주는 환경과 현실적인 삶의 문제들로 인해 방해 받고, 거짓에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인식하고는 있는데, 삶의 매 순간순간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죄의 유혹과 상황에 굴복하고 있는 내 박약한 의지, 나태와 게으름을 살펴보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을 더 알려는 믿음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인식’하고, ‘인지’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을 헤아려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죄와 악을 완전하게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더 알아간다면, 우리도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이 명령임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열정을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쏟아서, 좋은 믿음의 열매들을 많이 맺고, 죄와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 하반절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이 말씀을 듣고 제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그러면 네 길을 지도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인정하라’는 말씀은 명령법인데, ‘지도 하시리라’는 말씀은 미완료 형입니다. 명령을 지키는 것이 전제가 되고, 그 명령에 순종하면, 그러면, 그 때마다 우리의 갈 바를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갈 수도 없습니다. 오직 명령에 기인하여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신다는 단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라는 조건과, ‘지도 하시리라’는 미완료형의 문법 속에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존재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시고, 성취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명령을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아가가려고 몸부림치고, 항상 하나님을 인식하고 삶에서 하나님을 인지하기를 놓치지 안는는다면, 하나님의 우리의 그 마음 중심을 보시고,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소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살 길이고, 우리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서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얼마나 하고 싶은 일, 가보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이 많겠습니까? 그렇지만 주님을 믿는 청년들 이라면, 이런 것보다 우선해서 먼저 주님을 인정하는 일, 주님을 알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일이 우선이 되면 앞으로의 인생은 만사형통입니다. 내 생각과 의지를 내세우기에 앞서, 내 삶에서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을 ‘인지’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조건입니다.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이유와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의 욕심과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배반하는 어리석음을 결코 범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라, 네 길을 지도 하시리라” 주님은,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젊은 청년의 시기에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알아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보장 받는 투자는 없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청년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능력의 하나님 아버지를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주님을 인정하고,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시는 그 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하시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셔서, 우리 삶의 방향과 초점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향하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말씀 하신 그대로 이제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알아 가는데 우리의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우리의 연약함도 헤아려 주시고,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주님께 더욱 기도하고 예배로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바라옵기는, 우리 교회의 젊은 청년들에게 주님을 알아가는 지식과 지혜가 날로 더하여지게 하셔서, 미래에 한국교회와 조국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여드리는 큰 재목으로 기름 부어 주옵소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