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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교회에 일꾼 된 바울
골 1:24-2:7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4)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1:24-2:7 / [교회의 일꾼 바울] 여러분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도 내가 맡은 한몫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을 기꺼이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어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워 가고 있는 것입니다. 25)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돕고 여러분에게 그분의 숨은 계획을 알리려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26-27)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구원의 계획을 비밀로 해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드디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이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이 영광으로 가득 찬 계획에는 여러분 이방인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계획의 깊은 뜻은 `너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곧 영광을 얻을 유일한 희망이시라'는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을 다해서 경고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 베푸신 일을 생각하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빌고 있습니다. 29) 이것이 나의 임무입니다. 나는 내 속에서 강한 힘으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이 일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2:1) 여러분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또 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기도하면서 싸우고 있는지 알아주기 바랍니다. 2)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위안을 받아 사랑의 강한 줄로 서로 결합되고, 또 참된 확신과 분명한 이해로써 그리스도를 깨닫는 풍부한 경험을 갖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밝혀진 하나님의 계획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이 그리스도 안에 모든 능력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그대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4)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의 교묘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염려되어서입니다. 5) 비록 몸은 여러분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에 질서가 잡혀 있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신앙이 견고하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6) [세속 원리에 대한 경계]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일상생활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생기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7)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분의 터 위에 서서 살아가십시오.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진리 안에 서서 강하고 건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일에 감사하며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단 사상에 흔들리고 있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교회를 위한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24-29)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다해 수고하는 일꾼입니다. 바울은 바로 교회를 위한 일꾼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 고난과 어려움을 감당했고, 이 일을 위해 생명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고난을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을 그리스도께서 남겨두신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말하며(24), 교회의 일꾼이 되어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25). 본래는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어진 비밀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에 오심으로 이제는 이방인(골로새 교인)에게 전해졌고(26-27), 이제는 각 사람에게 전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수고하라’ 권면하는 것입니다(28).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걸어본 사람은 능력과 권능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애쓰는 것 입니다(29).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7)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본적 없는 골로새 교회의 문제를 위해 걱정하고 애쓰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오로지 자기 교회만 생각하는 목회자들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바울은 자기 교회중심의 이기적인 교회관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 중심의 차원 높은 목회관으로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1). 바울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골로새 교회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는데, 이단의 교묘한 말에 속지 않기 위해 이렇게 중보기도를 합니다(5). 첫째,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기 위해 기도합니다(2). 교회가 다투고 마음이 나누어지면 이단이 그 사이를 파고 들어옵니다. 성도간 서로 사랑의 위로로 연합하여 공동체가 사랑으로 묶여 있을 때, 성도의 마음이 잘못된 거짓 가르침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확실히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깨달아 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2).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이 있다면, 아무리 이단 사상이 들어와도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에 뿌리를 박고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7).
적용: 오늘 당신은 내 교회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회와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우리의 열정을 쏟기고 하고 수고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수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소중이 여기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영광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골 1:24-29 / 이수영 목사
골로새의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는 바울은 그 이유를, 자기가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그 사역이 골로새의 교인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첫 절에서 쓰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합니다. 비록 자기가 세운 교회가 아니지만 골로새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심과 수고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온 인류를 구하기에 충분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기쁨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일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특히 이 편지에서는 골로새의 교회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몸을 아끼지 않고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세우지도 않았고 한 번 방문한 적도 없는 골로새 교회인데 그 신자들을 위하여 그가 무슨 괴로움을 자기 육체에 채웠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24절 상반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한 데서 "너희"는 골로새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24절 하반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할 때의 그의 몸 된 교회는 한 지역교회인 골로새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할 때 "거룩한 공교회"의 "공교회"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한 교회만을 돌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아니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많은 고난을 받도록 세워진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며 돌에 맞기도 하고 파선하여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사방의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열매를 비록 그가 직접 세우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골로새 교회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갖고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평안 가운데 살고 있는 것도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운 그 사역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자신의 사역이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한 마디로 골로새 교회 신자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한다"는 말입니까? 구약성경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해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게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비밀입니다. 본문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비밀"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려는 뜻과 계획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비밀은 오랫동안 감추어졌었고 하나님께서 간간히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리시기는 했지만 알아듣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고 사도 바울과 같은 전도자들에 의해서 이방인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되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이고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는 죄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는 그 비밀한 뜻과 계획을 알게 하셔서 그들이 소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의 소망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 2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알리려고 힘쓰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후 다시 본문 28절에서 그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뿐 아니라 그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을 잘 가르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라 한 데서 "완전하다"는 말은 "흠이 아주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성숙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함을 갖춘 신앙인"이란 뜻으로 "완전한 자"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가르쳐 성숙한 신앙인 되게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 사역이 자기의 힘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직분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직분을 감당할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을 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도 이방인이었다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와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심히 배우며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누리기만 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힘껏 전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며 복음 증언하는 일로 인하여 고난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해도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이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모든 수고를 다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골 1:24-29 / 김광일 목사
빅터 프랭클(Victor E. Frankl)의 단편소설 ‘곡예사의 헌신’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난쟁이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거꾸로 서서 공을 돌리고 접시를 돌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돈을 던져 주면 그것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그나마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신부가 성당에 데려다가 심부름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난쟁이가 성당에 온 뒤로부터 차츰 얼굴에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어느 날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가진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난쟁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거꾸로 서서 공 굴리는 것과 접시 돌리는 것 밖에 없는데 이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자.” 밝은 낮에 드리자니 창피하여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예수가 달린 십자가상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발가락으로 접시를 돌리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재주를 부렸습니다. 최선을 다해 가지고 있는 재주를 다 부렸습니다. 그는 이 일을 매일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난쟁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보람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청소부가 성당에서 청소를 하는데 난쟁이가 거룩한 십자가상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라 신부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청소부의 말을 들은 신부는 이를 확인하려고 새벽에 숨어 지켜보았습니다. 그러자 난쟁이가 무릎을 꿇고 “주님, 제가 가진 재주는 이것뿐입니다” 하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리며 십자가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신부가 혼을 내려고 나가려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더니 무릎을 굽히고 한쪽 손으로 난쟁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대가 나를 기쁘게 했노라 그대의 땀을 내가 받았노라. 그대의 눈물을 받았노라 그대의 재능을 내가 받았노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신부는 무릎을 꿇고 “오, 주여, 나도 저 난쟁이와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땀을 쏟아 주께 드릴 수 있는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진정한 일꾼은 과연 누구입니까?
‘일꾼’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또는 시중드는 하인, 청지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야 바른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겸손과 성도들을 섬기는 봉사자의 모습을 통해 교회 일꾼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은 교회가 세운 것이 아니고, 자의로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라고 바울은 증거합니다. 우리는 바울을 교회의 일꾼 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도 교회의 일꾼 되게 하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임명받은 교회의 일꾼들은 신앙 공동체에 섬기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운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말씀을 이루려함이니
어느 성도가 정년 퇴직기념으로 독일제 그랜드 피아노(Grad Piano)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본당 피아노가 낡았기에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본당에서 사용하던 피아노를 처리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퇴하신 권사가 이십년전에 권사 임직기념으로 바친 피아노인데 그냥 치워 버릴 수가 없기에 담임목사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권사직분기념으로 피아노 바치셨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바쳤지요” “어떤 성도가 새 피아노를 바치셨는데 설치해도 되겠지요?” 그런데 한참 말이 없습니다. 얼마 후 “목사님, 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눈물로 기도하고 바친 건데 치우면 안 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 피아노를 본당에 들여놓지 못하였습니다. 안타까운 목사는 선배에게 방법이 없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배 목사가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라고 대답합니다.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오늘부터 기도를 시작하시오” “어떤 기도입니까?” “간절히 구하오니 하루 속히 그 권사의 눈에 흙이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그 권사는 교회를 위해 일한다면서 자기 기분대로, 자기 마음에 맞추어 일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면 내 마음에 안 들고, 뜻에 안 맞고, 기분에 안 들어도 반대하고 나서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생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울은 복음 전파를 사명으로 하는 일꾼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일꾼이란 말 앞에 교회를 붙여야 합니다. 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까? 왜 교회 봉사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집니까? 예수의 복음과 그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한다는 의식이 없이 일꾼이라는 말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이 죽도록 일만 한다면 일꾼 되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자부심이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알고 섬기기에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인이 되어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을 지라도, 교회에 공로가 있다 할지라도,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였다 해도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주인이 되고 있다면 사람의 일꾼은 될 수 있어도 교회의 일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자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을 세우려함이니
최고의 휴머니스트라 불리어지는 아베 피에르(Abbe Pierre) 신부는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프랑스의 투사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돕는 일에 데 한계를 느낀 그는 직접 뛰어 들어가 집 없는 사람들과 노숙자, 전쟁고아들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빈민구호활동을 50년이 넘도록 하였습니다. 피에르 신부가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국회의원이던 어느 날, 자살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복역한 후 딸을 만나러 갔으나 딸이 외면하였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자살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피에르 신부가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월급은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느라 다 들어가고 도리어 빚까지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죽기를 원하니 거치적거릴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집이 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짓기가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지 않겠소?”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신부를 도와 집짓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신부께서 돈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다면, 아마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절망한 자에서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의 엠마우스 공동체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피에르는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이 엠마우스 공동체 운동의 일원이 되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이 ‘단순한 기쁨’입니다. 기쁨 중 단연 최고의 기쁨은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도와 세워줌으로 누리는 기쁨입니다. 나의 것을 혼자 누리지 않고, 다른 이와 함께 공감하며 다른 이를 도와 그를 세우는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곧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여기의 완전한 자란 ‘성숙한 자’를 가리키며,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모습을 갖춘 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세우는 일은 소망을 지닌 교회의 일꾼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꾼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훈계하고 충고하여 바로 잡아주어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간직한 교회 일꾼들의 충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괴로움과 수고의 일을 기쁨으로 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소망이신 예수로 충만하게 함으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입으로만 하는 전파로는 불가능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의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로 수고를 다하려함이니
1866년 9월2일 대동강 모래사장은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탄 사람들이 평안감사 박규수 군대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이 모래사장으로 끌려나오는데 그 와중에 한국 사람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모래사장으로 끌려나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에 대동강 모래사장을 피로 붉게 물들이며 죽어간 27세의 청년, 그는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로 순교를 당한 토마스(Robert J. Thomas)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나누어준 성경을 받아든 홍신길, 최치량, 또 성경책을 뜯어 벽지로 사용한 박영식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개척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벤 박춘권도 평양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토마스 선교사가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토마스의 목숨을 내놓는 수고는 그와 함께 역사하신 하나님에 의해 복음의 문을 여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여기의 ‘힘을 다하여’는 달리기 선수가 골인지점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리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고 ‘수고하는 것’은 피곤하여 지치도록 노력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땀 흘리고 공들인 만큼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수고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일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억지로 일하지 마십시오.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를 따라 일해야 합니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는 과연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맡겨진 일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따라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여야 합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교회의 일꾼의 모습입니다.
어느 중학교에 음악교사가 부임하여 학교 밴드를 조직했습니다. 여러 악기들이 제 소리를 내려면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에 문외한인 학교장은 일방적으로 연주회 날짜를 결정했습니다. 관악대는 당황하였지만 열심히 준비하여 연주회 날이 되었습니다. 시작되기 전에 지휘하는 교사는 긴장하는 관악대원들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은 연주를 하는 척만 하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교사가 지휘봉을 흔들었지만 놀랍게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하는 척만 했을 뿐 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척하는 사람은 수백 명이 있어도 음악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척하는 일꾼들로는 어떠한 역사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몸 된 교회의 일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누구의 일꾼입니까? 사람이 세운 일꾼입니까?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교회의 일꾼입니까? 임명받은 임원들은 사명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람을 권면하여 세우는 교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의 일꾼이 되는 임원들과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