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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애국지사 장준하 선생님
어린 장준하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탓으로 국민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어린 장준하는 낮에는 밭에 나가 어른들 사이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밤에는 노인들로부터 만주의 넓은 들판을 주름잡던 고구려와 발해 군사의 무용담과 우리 독립군의 용맹스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통해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지역의 지도자로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는 책임자로 활약하였기에 일본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그의 가정 전체가 평북 삭주의 청게동이란 심산유곡으로 귀양살이 하듯 이사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선생이 열 세 살 되던 해, 완고한 성품을 가진 선생의 아버지는 마음을 돌려 장준하 선생을 삭주 대관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바로 입학을 시켰다.
늦은 나이에 그것도 1학년이 아닌 5학년으로 들어가서 교과과정과 학교 교율을 지켜야 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보고 들어도 잘 모르는 까막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학습 진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유로 학우들에게 놀림 받는 것도 일쑤였다.
이에 어린 장준하는 어른들한테 들은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독립군의 이야기를 신나게 떠벌려 뒤진 학과에서 잃은 체면을 가려보려 했으나 애들한테는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장준하가 아니었다. 비록 학교는 늦게 들어갔지만 피나는 노력과 성실함으로 1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다.
선생의 가정은 철저한 기독교 가정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고,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래서 중학교도 기독교 계통인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해(1932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한 장준하는 선친인 신성중학교 교목으로 전근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학, 1937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59년 9월 사상계 사무실에서 시드니후크 박사와의 좌담회를 마치고.
‘브나로드 운동’을 위해
장준하는 그의 아버지와는 불과 17세 차이여서 살뜰한 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한학자면서 투철한 반일 사상가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해방 후 일가가 월남하여 그의 아버지 장석인 목사는 서울 연희동교회의 당회장으로 시무하게 된다. 장준하가 일본제국주의와 첫 번째 부딪쳤던 것은 그가 16세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여름 방학을 앞둔 어느 날 교정 게시판에 동아일보사의 광고 포스터를 보게 된다.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하기(夏期)‘브나로드 운동’에 참여를 권유하는 내용의 포스터였다.
‘민중 속으로’란 의미를 지닌‘브나로드 운동(Vnarod 運動)’은 1870년대에 러시아에서 귀족 청년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농민을 주 대상으로 하는 사회개혁 운동을 일컫는다.
당시에 민족지였던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는‘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농촌 지역에서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배워야 산다’등의 구호와 함께 여름 방학 기간 동안에 농촌 계몽운동에 참가할 지원자를 모집하면서 자신이 활동을 원하는 지역을 적으라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참가를 지원하면서 자신의 고향 마을을 적었다.
방학을 며칠 앞둔 날 동아일보사의 평양 지사에서 공회당을 빌려 한글 신철자법의 내용에 대한 강습회가 열렸다.
이 강습회에서 한 강사가 다음과 같이 일러준다.
“우리 동포들 중에는 아직도 우리글을 모르는 동포들이 80%나 됩니다. 이대로 두면 우리글은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글이 없어지면 우리말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도 없어집니다. 말이 없는 민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은 장준하는 고향 마을의 주민들에게 열심을 다하여 한글을 깨우칠 결심을 하고는 방학을 하자말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도달하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방학을 맞아 두메산골의 고향 청계로 간 그를 맨 처음 맞이한 사람들이 엉뚱하게도 두 명의 일본 순사였다.
그들은‘브나로드 운동’의 개강 일자, 장소, 내용,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날짜 등을 꼬치꼬치 묻는 것이었다. 이때 얼마나 불쾌하였던지 장준하는 훗날 이 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일제에 대한 나의 반감의 싹이 노골적으로 트게 된 것은 실로 이때부터였으며, 이때 나는 갑자기 어른이라도 된 것같이 그들에게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이 굳어져버렸다.”
그들이 장준하를 놓아 준 것은 이런 장면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께서 그들을 나무라기를“이것들 봐요.
그 얘가 무슨 죄라도 지었소 방학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겠다는 게 무슨 죄가 되는지는 모르겠소만 이 찜통더위에 평양에서 사흘 동안이나 자전거를 타고 와서 더위와 허기로 녹초가 된 아이를 붙잡고 너무들 하지 않소?”
할아버지의 이런 일갈에 두 순사는 머쓱해져서 더 이상 캐묻기를 멈추고 돌아갔다. 한글공부는 그가 도착한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마을사람들이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보고 선생인 그가 감동을 받았다. 온종일 산비탈 개간지에서 밭일에 시달린 그들이건만 밤공부 시간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들어 글자를 익히는 데에 열중했다.
그러나 공부 시간마다 일본 순사가 번갈아 나타나 수업 내용을 적으며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어 우리글 공부에 더욱 열심을 쏟는 것이었다.
그런 중에 한 달이 꿈결처럼 지나가고 강습회가 마치는 날이 되자 학생들이 떡을 빚고 과일을 지게로 져다가 쌓고는 잔치를 벌였다.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장준하의 빈소에서 - 왼쪽부터 장남 장호권, 함석현, 계훈제.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신성중학교는 교육 목표가 둘이었는데 첫째가 신앙교육이었고 둘째가 민족교육이었다.
그래서 투철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애국자를 기른다는 목표로 운영되던 학교였다.
말하자면‘예수사랑’과‘겨레사랑’을 한 인격으로 실천하는 크리스천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한다는 목표로 세워지고 운영되던 학교였다.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선천의 신성중학교는 기독교계 학교들 중 배일(排日)독립사상이 가장 강력했던 학교들이었다.
숭실중학은 1897년에, 신성중학은 1906년에 개학, 두 학교는 모두 미국 북장로교회가 세운 학교다.
선천은 기독교의 고장이면서 애국자들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선천에 사는 목사나 장로치고 애국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전해지던 때였다.
당시에 안창호는 평양에서, 이승훈은 정주에서, 양전백은 선천에서, 세 사람의 민족 지도자가 마치 서로가 솥발같이 민족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선천을 근거지로 항일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세칭‘105인 사건, 선천3.1만세 사건, 선천경찰서 폭탄투척사건’등이 연이어 일어난 곳이다.
선천에서는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느라 읍내 전체가 철시되고 하늘에서는 교회의 종소리만 들렸다.
선천 인구 3천여 명 중에 2,600여 명이 교인이어서 선천서는 일본인들이 교인들의 세(勢)에 눌려 꼼짝을 못하던 곳이었다.
▲장준하 선생.
소학교 교사로 활동
1938년 3월 장준하는 신성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졸업 후 숭실전문학교를 들어가기로 했으나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당하게 된다.
그렇게 진학을 포기하고 있을 때 마침 정주군(定州郡)에 있는 신안소학교에 교사직으로 가게 된다. 이 학교는 3·1만세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이명룡(李明龍 1873∼1956)이 설립한 학교로써 학생은 5백여 명이 되었으나 학교의 설비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학교였다.
장준하의 아버지는 진학을 못하게 된 아들에게 그나마 그런 일자리가 생긴 것을 기쁘게 여기며 집을 떠나는 전날 아들을 앉히고는 교회에 잘 나갈 것, 여자를 조심할 것, 낭비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학교에 부임해 5학년 담임이 된 그는 먼저 여학생들의 긴 머리채를 가위로 무조건 잘라 버리고 치마저고리 대신에 신식 블라우스에 통치마를 입히는 일부터 시작했다.
정주지역은 보수성이 대단히 강한 지역으로 배일(排日)사상이 강하기로는 평양이나 선천과 다를 바 없었지만 평양과 선천에 비해 보수성이 강했다. 이런 보수성이 강한 지역에서 새로 부임한 어린 교사의 이런 튀는 행동에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준하는 막무가내였다. 모두가 반대를 해도 할 것은 하여야 한다고 흔들림이 없었다.
1941년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해다. 그해에 24세가 된 장준하는 3년간 봉직하던 신안소학교를 사임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동경에 있는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이듬해에 장준하는 동양대학에서 일본신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가 일본신학교로 가게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학은 자기와 타인 사이에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을 진리로 하는 학문이다. 고행에 장소의 구별이 없듯이 신학 훈련의 장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일본신학교에 꼭 들어가거라.”그가 일본으로 건너가던 때에 그의 아버지가 당부하던 말이었다.
오직 조국을 위하여
때는 일본이 전쟁 초반의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기고만장하던 때였다.
그때 동경에서는 박영출 목사가 일본신학교의 학생으로 있으면서 조선인 유학생을 위한 숭덕학사(崇德學舍)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숭덕학사는 동경에서 배일(排日)민족운동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장준하의 친구 김준엽이 쓴 장정(長征)에서 숭덕학사를 방문하였던 이야기를 다음같이 쓰고 있다.
“최기일 형과 함께 숭덕학사로 박영출 목사를 찾아간 일이 있다. 박 목사는 유학생의 숙소로 숭덕학사를 경영하면서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하고 예배를 보면서 은근히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장준하는 숭덕학사의 일꾼이 되어 정열적으로 일했다. 주일이 되면 학사 주위의 어린이들을 모아 와서는 하루 종일 찬송가와 동요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쳤다.
무슨 일을 하던 열심에 열심을 다해서 하는 것이 그의 체질이었다. 그러나 1943년서 숭덕학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조선인 유학생들을 일본군으로 끌어가는 일 때문이었다.
많은 조선인학생들이 일본군으로 끌려가거나, 만주, 중국으로 도망가거나, 감옥으로 갔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은 20대의 젊은 시절에 일본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생각으로 낯선 중국 땅에서 광복군에 참여하게 된다.
얼마 후, 조국은 일본의 항복으로 급작스레 해방을 맞게 되고, 준비 없이 해방된 조국은 도리어 조국의 분단과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 장준하는 혼란 속에서 민주주의 국가를 바로 세우고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투철한 민족자주정신과 기독교적 순교정신이 오직 조국을 위하여 산 그의 힘이었으며, 그는 끝내 그렇게 조국에 그 삶을 바쳤다.
장준하의‘돌베개’
그의 저항정신은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기 <돌베개>를 창세기 28장 10~2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라고 했는데, 일제의 군대를 탈출하여 중원에서의 2년을 그는 스스로 ‘나의 돌베개’라고 적고 있다.
1944년 7월 7일 장준하는 일제의 쓰카다부대를 탈영, 우여곡절 끝에 중국군 유격대에 들어가 거기서 김준엽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불로하(不老河)강변에서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 광복에 대한 결의를 한다.
그러던 중 중앙군과 팔로군의 전투를 겪으며 중국인들의 동족상잔을, 그것도 일본이라는 적을 눈앞에 두고 벌이는 전투를 경험하게 된다.
그곳을 떠나 중경까지 6천리 길을 가던 도중 임천에 한국인 부대가 집결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의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서 한국광복군 훈련반 과정에 입소하게 된다.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비서로도 활동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선생은 언론활동을 통해서 쿠데타를 비판하는데 앞장서 군부독재와 맞서기도 했다.
또한 한일굴욕협상이라고 한일협상을 맹렬히 비판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저버린 행위라고 주장하며 전국적인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이런 이유로 구속되고 한 달 만에 석방되면서 1967년 신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일본신학교 시설-왼쪽부터 김준엽, 장준하.
사상계(思想界)를 향한 그의 열정
우리가 알고 있는 월간『思想界』는 원래 1952년 8월 문교부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思想』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6·25의 와중에서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의의 확립 및 반공정신 양양 등 전시하에 있는 지식인층의 사상운동을 주도하는 사상지로의 역할을 하며, 통권 4호를 낸『思想』은 편집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장준하 선생이 1953년 4월에 단독 인수하여『思想界』라는 제호로 시판하면서 본격적인 월간종합교양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思想界』편집의 기본방향은 1) 민족통일문제 2) 민주사상의 함양 3) 경제발전 4) 새로운 문화창조 5)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으로 요약된다.“『思想界』란 …… 동서고금 사상을 밝히고 바른 세계관·인생관을 수립해보려고 기도한다”라고 밝힌 발간 취지에서 알 수 있듯이 발행 초기에는 정치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종으로 5000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으로 만방의 지적 소산을 매개하고 공기로서 자유·평등·평화·번영의 민주사회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이『思想界』의 역할이었다.
이후‘동인문학상’,‘사상계논문상’,‘사상계번역상’,‘신인문학상’등 사상 및 문예활동의 본산으로서 『思想界』의 역할은 실로 막중했다.
또한 자유언론투쟁에 앞장섰던 발행인 장준하 선생은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제3공화국 하에서『思想界』는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저항적·정치비판적 민족주의 논조에 비중을 둔 정치평론이 빈번하게 지면을 채우면서 정치탄압의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장준하 선생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1968년 이후『思想界』의 발행권이 부완혁 선생에게 넘어가게 되고 그 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영의 어려움은 가중되었고, 급기야 1970년 5월에 김지하의「오적(五賊)」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당국의 폐간처분을 받게 된다.『思想界』가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문제로 남는 것은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다.
1975년 1월 8일‘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면서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하고 나섰고 그 해 8월 17일 등산 도중 의문의 추락사고로 죽음을 맞게 된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사인(死因)이 밝혀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시절 국방부 국정감사 모습. - 조한배, 장준하.
장준하가 신성중학교 2학년에 편입할 때 교장은 장이욱(1895∼1983) 박사였다.
미국유학 시절에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도산 선생의 지기가 되었는데 1928년에 귀국하여 신성중학 교장이 됐다.
그런 후에 장이욱 교장이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목사를 교목으로 모신 것이다. 신성중학 시절의 장준하에 대하여 일년 후배였던 계훈제(桂勳悌)는 다음 같이 회고했다.
“준하 형은 그때도 피부가 하얗고 잘생긴 미소년이었다. 여자처럼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때로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잉어처럼 용맹스럽고 활달하였다. 그는 자주 창공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신성중학 학생들은 ⅓이 전도사고, ⅓이 애국투사고, ⅓은 문학가들이었다는 말이 있었던 때이다. 장준하는 문학에 소질이 있어 중국 문학의 선구자 노신(魯迅)에 심취하면서도 전도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시에 애국투사이기도 했다.
참조: (사)장준하기념사업회(http://www.peacewav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