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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히 먼 곳에서 가느다란 별무리가 나비처럼 춤추는 것이 보였다. 홀린 듯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내렸다. 눈물 고인 그녀의 눈은 밤바다에 비친 검은 별 같았다. 그녀는 괴로운 듯 눈을 내리깔며 입속말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소리 없이 춤추었다.
'조슈아'
'조슈아…….'
흰 입김이 검은 허공으로 날아가 이내 부서져 버렸다.
시내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했다. 거리를 지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윤아는 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힘없이 걷는 중이었다.
조용히 걷던 그녀는 'Once is a blue moon'이라고 쓰인 바(Bar)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고풍스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향이 확 퍼지고, 낯설지만 편안한 멜로디가 귀에 감겼다. 무대 위에서 한 남자가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아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자리에 안내했다. 무대 바로 앞의 맨 구석 테이블, 예전에 조슈아가 연주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곤 했던 바로 그 자리. 무너지듯 자리에 앉은 윤아는 무엇을 시키시겠냐는 물음에 조금 고민하다 조슈아가 좋아하던 것을 주문했다.
가게 안은 크리스마스 특유의 묘하게 가슴 설레는 분위기으로 가득했다. 윤아는 칵테일을 조금 마셨다. 잔에 꽂힌 레몬 조각을 바라보며, 그녀는 만일 조슈아와 함께 있었다면 자신도 이 분위기에 동화되어 마음껏 행복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연 돌아올까. 윤아는 스스로에게 수천 번도 넘게 던졌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제발 그가 돌아왔으면,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올 수 있으면,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녀는 떠난 그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눈앞에 눈빛 피부를 한 청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닌, 아름답고 아름다운 청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그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윤아는 왠지 어지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벌써 1년이 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 같았다.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조슈아의 모습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 서늘한 기운이 흐르는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조슈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친구들 중 하나이자 그의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릿키가 윤아의 눈길이 조슈아에게 고정된 걸 보고는 나중에 그녀에게 찾아와 그의 이름이 조슈아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또 피아노과의 선망 받는 학생이란 사실, 잘 생긴 외모 때문에 여학생들로의 동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지만 정작 본인은 여자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윤아는 조슈아를 자신과는 전혀 관련 있을 수가 없는 동화 속 왕자님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희망자에 한해 신청 받은 듀엣 연주 수업에서 자신과 파트너가 될 연주자의 이름이 Joshua Roche라는 걸 들었을 때에 조슈아가 그 조슈아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꽤 흔한 이름이니 동명이인일 거라 여긴 것이었다.
처음 두 사람의 연습 날짜가 잡혀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 조슈아는 그들이 함께 공연하게 될 슬픈 듯하며 웅장한, 매우 아름다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었다. 윤아는 그 뒷모습을 보며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물결처럼 굽이치는 옅은 벌꿀빛 머리칼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윤아가 안녕, 하고 인사하며 곁에 놓인 피아노 의자에 앉자 청년이 연주하던 곡이 잠시 멈추더니 곡조가 바뀌었다.
기본 멜로디는 같지만, 좀 더 조용하고 서정적이며 슬픈 분위기였다. 30초 정도 더 연주되던 곡은 곧 무겁고 조용한 느낌으로 끝났다. 건반에서 손을 뗀 청년은 몸을 돌려 윤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어서 와, 네가 Yuna구나."
그 순간 잠깐 숨이 멎은 듯했던 그 기분을 윤아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본 조슈아의 얼굴은 마치 섬세히 만든 밀랍 인형 같았다. 우아하게 치켜 올라간 눈매며 또렷한 얼굴선이 사내다운 느낌을 주었다.
조슈아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뒤돌아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윤아가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는 동안 조슈아는 방금 쳤던 피아노곡의 멜로디를 오른손만으로 장난처럼 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교복 소매를 조금 걷어 올린 후 다시 한 번 그의 파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건반에 손이 닿을 때마다 그의 고개가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졌다.
두 사람은 매일 밤 식사 후에 만나 2시간씩 연습했다. 둘 사이엔 대화가 별로 없었다. 조슈아는 본래 말이 없는 듯했고, 윤아는 조슈아를 보면 왠지 가슴이 뛰어 도저히 먼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들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대화만 나누었다.
어느 날, 늦은 시간까지 연습실에 조슈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늘 먼저 와 있었던 그였기에 윤아는 곧 오겠지 생각하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도 조슈아는 오지 않았다. 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조슈아가 연주하곤 하던 피아노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아노와 바닥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슈아가 늘 앉던 그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았다.
늘 옆모습만 보이던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어떤 표정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을까,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윤아는 조슈아가 하던 대로 고개를 반쯤 기울이고 소매를 조금 걷은 뒤 피아노 위에 그대로 놓여 있던 악보를 폈다. 조금 망설이다가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 연주하기 시작했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옆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했을 때는 조슈아가 너무도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실은 이렇게도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윤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연주를 계속하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볼을 감쌌다. 왜 자신이 울고 있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이 뜨거웠고, 괴로웠고, 답답했다. 소리를 내어 흐느껴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 곁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옅은 금발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 윤아는 급히 눈물을 닦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곁을 흘끔 보니 조슈아가 피아노 건반에 한 팔을 괴고 턱을 얹은 채 비스듬히 앉아 윤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있었다.
"훌륭한 연주였어, Yuna."
"아, 아냐."
조슈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아는 고개를 푹 숙여 건반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색한 정적을 참기 힘들어 검지로 '도'를 누르려 하는 순간, 조슈아가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Jo, Joshua? 너 취했니?"
"으응, 아니, 아냐…. Yuna의 이 검은 머리, 참 예뻐."
"으, 응?"
"동양인들은 본래 너처럼 예뻐?"
윤아가 당황해서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잔뜩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조슈아는 그녀의 머리칼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마주봤다.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조슈아가 윤아의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그녀에게 살짝 입 맞추었다.
"…!"
곧 입술을 뗀 조슈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생긋 웃더니 이내 윤아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윤아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조슈아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그 아름다운 사람과 입 맞추었다는 것이, 먼 곳에 고고히 앉아 피아노만 연주하던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기대어 새근거리며 자고 있다는 것이 꿈속에서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처럼만 느껴졌다.
조슈아에게선 묘한 향기가 났다. 시원하면서 달콤한, 눈(雪)을 연상시키는 향이었다. 어지러워진 그녀는 볼이 붉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조슈아는 늘 다가갈 수 없을 사람처럼 느껴져 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윤아는 고개를 조금 돌려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도 살며시 소년의 머리에 기대어 두 눈을 감았다. 가슴이 너무도 떨려 행복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싶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벌써 새벽 2시였다. 아직도 자신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조슈아를 발견한 윤아는 그를 조심스레 피아노 의자에 눕힌 뒤 릿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릿키는 그가 술을 마신 거냐고 물었다. 윤아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녀석, 몸이 무척 약해서 술 마시면 안 되는데. 봐, 열 나잖냐, 나 참…아무튼 고마워 Yuna."
릿키는 다급하게 조슈아를 업고 가 버렸다. 윤아는 그들이 가 버린 후에도 연습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앉아 조슈아의 잔상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숙인 채 입 언저리를 가리고 있었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윤아는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 저녁 연습실에 갔을 때, 조슈아는 평소처럼 일찍 와 앉아 있었다. 윤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안녕, Yuna."
"응, 안녕."
조슈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두어 번 그것을 반복한 뒤, 그는 겨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어젠… 미안했어."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의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건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잠시 윤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려 평소처럼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이후로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윤아는 조슈아가 'Once in a blue moon'에서 연주하곤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가끔 그를 보러 몰래 들르곤 했다. 조슈아가 관객들 틈에 끼어 연주를 듣고 있는 윤아를 발견하는 날이면, 그는 피아노 너머 그녀에게로 시선을 보내 가며 연주를 했다.
행복한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언젠가 깨지는 법이다. 어느 날 저녁, 연습실에 조슈아 대신 릿키가 나타났다. 그는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윤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푹 쉰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입모양을 길쭉하게 만들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Yuna, 잘 들어. Joshua 말이야, 음악 공부는 한동안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대. 아마 이제 보기 힘들 것 같다."
윤아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왜 고향으로 가는 거냐고 따져 물어도 릿키는 고개만 흔들 뿐 대답하지 않았다. 릿키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나서 윤아는 한동안 절망에 빠져 지냈다. 조슈아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날 밤도 윤아는 혼자 자신의 원룸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힘없이 누구세요, 하고 말한 윤아는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조슈아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절박한 표정을 지은 조슈아가,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조슈아는 멍하니 서 있는 윤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맞춤이 길어졌다. 곧 조슈아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문을 닫고 들어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Joshua, 대체 왜, 왜 가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윤아의 볼 위로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조슈아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는 것이 느껴졌다. 윤아는 심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시 돌아올 순 없는 거야? 언제든…,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 있는데…….”
“…….”
“돌아와 줘. 묻지 않을게. 원망하지 않을게. 내, 내년 크리스마스는 너와 보내고 싶어…….”
윤아는 어깨를 들썩였다. 끝내 고향으로 가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그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해 주지 않는 그가 밉게 느껴졌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너를 너무도 좋아하고 있다고. 너도 알고 있냐고, 그리고, 너도 나를 좋아하냐고. 그러나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새콤한 맛이 나는 칵테일을 마시며 지난 일을 생각하던 윤아는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여덟 시였다. 문득 바라본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짙은 보랏빛을 하고 있었다. 윤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눈을 살짝 감았다. 그녀는 조슈아에게 한 말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나타나지 않는 그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그에게 끝내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 자신을. 그 말을 했다면 그가 돌아오지 않았을까. 지금 그가 나타나지 않는 건,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깊은 통증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어 왔다. 그녀는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슬퍼하고 있었다. 돌아온다면, 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이곳에 나오기 전 윤아는 한동안 갈등했다. 떠난 뒤에도 연락 한 번 없던 조슈아였다.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 윤아였지만, 그녀는 덧없는 소망에 기대를 걸고 온 것이었다. 덧없는 소망은 늘 그렇든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어지러워 제대로 돌아갈 수 없을 듯했다. 취한 것 같았다. 윤아는 칵테일 잔을 이리저리 기울여 보다가 테이블에 엎드렸다.
머릿속이 온통 검게 되어버린 그녀의 귀에 듣기 좋은 피아노 소리가 감겼다. 그녀의 오감을 사로잡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연주였다. 윤아는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갔다.
피아노는 두 대였다. 오른쪽 피아노에 그녀가 털썩 앉자 연주하고 있던 아가씨가 깜짝 놀라 연주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윤아는 타오르는 듯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당장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다. 그녀는 건반에 손을 올리고, 폭풍과 같이 맹렬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윤아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연주를 시작하자 아가씨는 그녀가 또 다른 고용인인 줄 알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윤아의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그녀의 심경을 담은 그 곡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거칠었고, 덧없이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 가슴 아플 정도로 슬펐다.
한참 연주를 계속하던 그녀는 갑자기 연주를 뚝 멈추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별안간 연주가 멈추자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그 때, 옆의 피아노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노에 앉은 누군가는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귀에 익은, 아니 너무도 익숙한 곡이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그 곡. 윤아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곡은 분명 윤아가 알고 있는 곡이었다. 일 년 전, 그와 함께 매일 밤 연주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윤아는 도저히 옆 피아노에 앉은 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간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건반에 손을 올려 그녀의 파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마치 사랑에 빠져 혼자 속앓이하는 이의 노랫소리처럼 애상적으로 울려 퍼졌다. 간간히 옆 피아노 쪽에서 심한 기침 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본 그의 피아노에 그가 토한 피가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윤아는 연주를 멈출 수 없었다. 조슈아가 그렇게도 힘들게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를 막을 권리가 없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던 연주는 이윽고 지난번과 같이 잠깐 멎는 듯했다가, 조용하고 애달픈 느낌으로 조금 더 이어졌다. 곧 연주가 끝나자 감동한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아까 피아노를 치던 아가씨도 홀린 듯한 표정으로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곧 아가씨는 조슈아의 피아노며 바닥에 잔뜩 떨어진 것이 선혈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비명을 지르며 걸레를 찾아 달려왔다. 윤아는 조슈아를 부축해 무대 뒤의 간이 의자로 데려가 눕혔다.
그의 입가에 피가 맺혀 있었다. 윤아는 울면서 자신의 옷소매로 그의 피를 닦아 냈다. 흰 소매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슈아는 미소 짓고 있었다.
“왜 말 안했어?”
윤아가 말했다.
“조슈아 너, 아파서 돌아갔던 거지? 다시 발병한 거야? 왜, 왜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어. 말해줬으면 나, 네게 돌아오라고 조르지 않았을 건데, 왜…….”
"좋아해."
조슈아가 조용히 말했다. 윤아는 더욱 더 심하게 흐느꼈다. 조슈아는 기침을 하더니 다시 말했다.
"너에게 걱정 끼치기 싫었어……."
"그만 말해, Joshua, 그만 말해!"
윤아는 다급하게 외치며 그의 피를 닦았다.
"아픈 네게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윤아가 진정하려 하면서 말했다. 그녀가 한 말은 진심이었다. 조슈아의 미동 없는 눈동자가 순간 부풀어 올랐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윤아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슈아가 그러지 못하게 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조용히 말했다.
"실은, 내 의지였어, 여기 온 것. 너와 함께 보내고 싶었거든. 크리스마스 말야."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행복했다. 하지만 무서운 죄책감의 늪이 그녀의 발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윤아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그의 차가운 입술에서 전해지는 혈향에 그녀의 머릿속이 마비되었다.
혼란스러웠고, 슬펐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울고 싶어졌다.
그저, 행복했다.
정말이지 붉고도, 붉은, 크리스마스였다.
-왜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거냐고, 조슈아?
글쎄, 얘기 아직 안 끝났으니까 들어 보란 말이야.
그날의 그 지독한 붉은 색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네 입술에서 나는 피 냄새도,
네가 내게 던진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다'는 말도,
엉망으로 혼란스러워진 내 마음도,
모두 지독히 붉고 또 붉었어.
…보고 싶어, 조슈아. 정말, 너무나 보고 싶어.
네가 다시 한 번 와 주면 좋겠어.
다시 한 번 그 때처럼, 내게 다시 돌아와 주면 좋겠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말야, 정말 그랬으면 너무너무 좋겠어.
너, 참 이기적이야.
이렇게 가 버린 뒤에도,
네 생각밖에 할 수 없게 만든 이기적인 사람이야.
실은 네 마지막 말대로 널 잊으려 해 보았어.
꽤 필사적이었어, 나.
네가 서운해 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거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싶은 말은,
나는,
붉은 너를,
지금까지도,
사랑하고 있어-
[Once upon a crimson Christmas] Fin.
071130, Written by Seiren
와우 너무 멋져요ㅋㅋ 조슈아 죽은 줄 알았다가 끝에 여주가 하는 말 보고 안심ㅋㅋ
비오는날†님/ 죽이기엔 너무 안타깝더라구요... 조슈아 녀석은 마음 약한 작가 덕분에 살아남은 겁니다ㅋ.ㅋ 감상평 감사드려요~!
정말 멋집니다ㅠ_ㅠ.....!! 정말 저도 윗님처럼 조슈아가 죽으면 어쩌나 했닥우요ㅠㅠㅠㅠㅠ..!ㅠㅠㅠ그럼잘보구갑니다! 크리스마스때도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많이 슬퍼질것같네요ㅜㅜ..
예이아붕님/ 감상평 정말 감사드려요~~! 사실.. 조슈아는 죽이기 아까운 녀석이었어요... 잘 생겼고.. [뭐라는거지;;;] 앗 크리스마스때는 행복하게 보내셔야죠 ㅠㅠ 모쪼록 즐거운 일만 있으시길 바랄게요-*
노래랑 소설이 너무 잘어울려요 ㅠㅠㅠ 꺄악 소설에도 반하고 노래에도 반하고 >< ㅋㅋ
하늘을날자♬님/ 감상평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노래와 소설이 어울리나요? 아무래도 소설은 들으면서 쓴 노래의 분위기를 닮게 되는 것 같아요^^ 노래 정말 좋죠? 전 Acoustic cafe의 노래를 정말 좋아한답니다^^ 노래가 좋으셨다면 다른 노래들도 한 번 들어보세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