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과학계는 몸집이 큰 동물들이 암에 걸릴 확률도 높다고 여겼다. 세포가 많을수록, 그만큼 암세포로 변이될 여지가 많다는 분석이 기반이었다. 발암 확률이 세포 전체에서 일정하다면, 아무래도 고래와 같은 큰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암세포가 생길 확률이 높다. 우주에서 미사일(암)이 무작위로 떨어졌을 때 태평양 작은 섬나라(작은 육체) 보다 광활한 러시아(큰 육체)가 맞을 확률이 더 높은 것처럼.
영국의 의학통계학자 리차드 페토의 생각도 처음엔 그랬다. 여러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했다. 개를 봐도 그렇다. 소형 품종보다 대형 품종이 암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은 것으로 증명됐다. 우리 인간을 보더라도 다른 환경적 요인을 통제한 뒤 실험한 결과, 키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보다 암에 더 잘 걸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키와 암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발견된 셈이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할수록 통념과 반대되는 결과들도 잇달아 도출됐다. 세포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실험용 쥐가 인간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암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쥐의 암 발병 빈도를 인간에게 적용했다면 우리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을 정도였다. 실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니다. 코끼리나 고래와 같은 거대한 동물들의 암에 전혀 걸리지 않는 듯 보였다.
같은 종끼리는 신체가 클수록 암이 더 많이 발생하는데, 다른 종으로 범위를 넓혀보면 신체 크기와 암 발생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었다. 1975년 이를 처음 발견한 학자 페토의 이름을 딴 ‘페토의 역설’(Peto’s paradox)이라고 부른다. 이 역설을 설명할 요인을 찾기 위한 학자들의 연구가 줄을 이었다. 2015년 마침내 페토의 역설을 설명할 유의미한 논문이 발표됐다. 유타 대학교 소아 종양학과 조슈아 쉬프만은 코끼리 혈액 표본을 구해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한 유전자를 주목했다. ‘TP53’으로 불리는 종양을 억제하는 유전자로 세포나 DNA가 손상을 입으면 작동해 세포를 복구하거나 이상세포를 제거한다. 연구팀은 코끼리 신체 내에 20쌍의 TP53을 발견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1쌍보다 무려 20배나 많았다. 코끼리 세포 수는 100조개. 인간의 37조개에 비하면 2.5배 정도 많다. 그에 비해 이를 보호하는 ‘병원 시스템’은 20배나 많으니 건강할 수밖에 없다. 이상 세포가 발견된 즉시 TP53는 출동한다.
인간의 신체 내 병원 시스템은 코끼리에 비하면 조약하기 그지없다. 1쌍의 TP53이 37조개 세포를 관리해야 하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 이 한 쌍이 고장이 나기라도 하면, 인간은 난치병에 직면하게 된다. 실제로 암 환자 중 50%는 TP53에 이상이 생긴 경우로 추정된다. 세포가 더 많아지는 방식으로 진화할수록 더 많은 암세포에 노출될 위험이 커지는 만큼 이를 방어할 체계 역시 함께 진화했다. 실제로 고대 매머드는 14쌍의 TP53을 보유했지만, 현생 코끼리는 더 많은 20쌍을 보유하고 있다.
인간은 그러나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진일보해 왔다. TP53을 활용한 암 치료법 연구에 나선 것이다. 모든 세포를 사멸하는 기존의 항암 치료법은 부작용이 크지만, TP53을 재활성화하는 치료법은 신체에 무리가 덜하다. 항암 치료에 저항성을 갖는 암세포들은 TP53에 보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도 조기 노화 등의 부작용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기존 치료법보다 진일보한 건 분명하다. 의학계에서는 TP53을 활용한 치료법이 5~10년 안에 개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