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들 듣거라. 우리 할아버지 칭기즈칸께서는 벽돌집에서 농경민족과 어울려 정착해 살면
그때가 곧 할아버지께서 세우신 몽골제국이 망하는 날이라고 하셨다.
거란족과 여진족은 비록 유목민이었지만 불행히도 할아버지 칭기즈칸의 훈계를 듣지 못해서
마지막에는 한족 돼지처럼 게으른 사대부 집단으로 변했다.
금나라의 마지막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너희도 잘 알것이다.
여기 공종이 내 구달 앞에 코를 받고 엎드려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첫째, 이 조카는 전쟁을 할 줄 모른다.
군신유의나 부자유친이니 장유유서니 남녀유별이니 하는 말이나 주워섬기면서
손을 손으로 쓰지 못하게 하고, 발을 발로 쓰지 못하게 하며,
머리를 머리로 쓰지 못하게 하고, 가슴을 가슴으로 쓰지 못하게 한다.
그저 왕후장상은 씨가 있는 것이니 체념하고 분수에 맞게 살라고 한다.
남송을 말아먹은 사대부란 것들은 유학이란 묘한 것을 자기들끼리만 배우고 익히는 데
따지고 보면 세도를 지키려는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네 사대부끼리 자리를 나누어 먹고,
적당히 백성을 나누어 고혈을 짜먹으려는 수작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내 후손들은 그래서는 안 돤다.
누구든지 군대를 잘 통솔할 수 있는 자손이 대칸의 자리에 앉아야 할 것이다.
황금씨족들은 반드시 칭기즈칸의 자손 중 가장 유능한 인물을 골라
몽골제국의 대칸으로 선출해야만 한다.
장자든 막내든 손자든 사촌이든 그런 것은 따지지 말라.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기술은 끝없이 바뀐다.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반드시 방법이 있음을 믿고,
아무리 하찮은 적이라도 우리하고 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한시도 잊지말라.
내가 최고라고 자만하지 말라.
몽골제국이 앞으로 영원할 것이라고 믿지 말라.
칭기즈칸께서 세우신 몽골제국은 오로지 힘으로 지키고, 전통적인 유목정신으로 이어가야 한다.
옆을 보고, 앞을 보고, 뒤를 보아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라.
상대가 강하면 너희를 바꾸고, 너희가 강하면 상대를 바꾸어라.
한 번 떠났으면 고향이라도 돌아볼지 말 것이며, 헤어졌으면 부모라도 그리워하지 마라.
세상을 살되 한뼘이라도 더 넓게 살고, 사람을 사귀되 한명이라도 더 사귀며,
기술을 배우되 한 가지라도 더 배워라.
그러나 우리의 유목정신을 잊고 남만들의 농경사고에 물들여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러므로 내 후손들은 몽골어로만 말하고, 몽골 복시만 입고, 몽골음식만 먹어야 한다.
남만은 첩으로도 삼지 말라.
말이 바뀌고, 옷이 바뀌고, 음식이 바뀌면 사람도 변한다.
절대로 몽골의 풍습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내가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다.
'농경'을 배척하고는 국가경제의 유지가 안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몽골제국 오고타이 칸 때 요나라 출신의 야율 어쩌구 를 재상으로 삼았는데 그의 주장대로 농경을 강조했더니 국가수입이 얼마가 늘었더라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목문화 강조는 멋있어 보일 지는 몰라도 경제적으로 현실성은 없습니다.
농경이라.... 농경과 유목이 단위당 생산 능력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인류 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농경 문화에 시작 원인은 정설이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유목 문화를 그렇게 깍아내리려 하는 겁니까? 그리고 기원전 6세기에서 2세기에 한족과 북방민족에 신장 차이는 10Cm이상 차이 납니다.
이는 북방에 경제 생산 능력과 이를 통제할 사회적 제도가 한족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실증적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농경이 국가 경제에 핵심이 되어야 한다면 실크로드에 도시 국가들에 융성과 농경국가인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 폴리스에 힘, 역대 북방 민족에 풍요로움과 강력함은 뭡니까?
먼저..음.. 로마사람들은 고트족이나 켈트인..갈리아인들보다 신장이 작았다고 나옵니다.그런데 종전엔 결국 로마에 점령되거나 속국이 되죠.둘째,그리스 역시도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았다 뿐이지 그게 페르시아 심장부를 타격해서 멸망시킨것은 아니며,그리스나 폴리스 국가야 말로 정주국의 표본 아닌가 합니다.
나중에는 빈곤해지자 청나라에 보호받기 위해 종속 관계를 유지하는 몽골부도 나오더군요. 한가지 더 본다면 인구자체나 무역시장 규모는 정주국들이 컸고 실제 얼마안되는 인구로 올라운 정복을 보인것은 사기나 무장,정주국들의 불안정한 시대를 틈타 확장한 이유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열세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대군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상업으로 농업 생산력에 불리함을 극복하고 이를 통해 막강한 해군을 양성했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에 농업 생산력에 격차로 볼 때 그리가 그 정도로 선전한 것은 대단한 일이고 이는 농업
외에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나라가 발전하고 강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도 농경 국가 아닙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이 자신들에 상품을 수출하기 위하여 티베르강 하구에 만들어 놓은 항구 도시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영토가 넓어지고도 농업이 발달하였다고 하나 상업에
비중도 적지 않기에 지중해 해상권을 잡으려고 카르타고, 그리스, 이집트와 연이어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농업과 상업이 동시에 기반이 된 로마와 전형적인 농경 사회인 중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걸맞지 않습니다. 즉, 결론적으로 농업 생산력 만으로 사회를 평가한다는 것은 편견이고 현 시대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참고로 켈트 인, 갈리아인들은 로마보다 앞서 전차를 타고 바지를 만들어 입었으며 맥주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상당한 문화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안트림Antrim 지방의 데리키엄Derrykeigham에서 발굴된 수달 가죽 망토는 그들에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며 이들을 야만인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당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닙니다. 당나라에 황족은 선비족이였으며 따라서 이민족에 개방적인 전혀 중국적이지 않은 왕조였습니다. 한나라에 주력은 농경 중심에 보병입니다. 비록 기마 부대를 양성하는 등에 노력을 하였지만 북방이나 고구려등에 적수는 되지 못하였으며 말은 장수등 지휘관이 타는 것이였지 일반 병사들은
보병이 대다수였습니다. 기마 부대가 있기는 하였지만 전체 전력상 차지하는 비율로는 동이나 북방에 열세이며 만리 장성을 중심으로 한 보병 중심에 체제였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에 주력이였던 황하 지역은 최후에 동이 세력인 래이가 존재하는 등 북방계 몰골리안에 가까웠으니 이들에 키 차이는 켈트와 로마같은 인종적
잠깐요. 당나라 말기에 기병양성은 대규모로 이뤄져서 말값이 비단 한필과 맞먹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장교만 탔다고 치면 엄청난 수의 장교가 육성됐을테고 서양 중세마냥 퓌델 맨앳암즈 같은 계급들이 확장됐겠네요..? 그리고 한족이 장사를 안했다는건 좀 이해가 안가는게 고조선과 한의 싸움도 중계무역이 차지하
는 비율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네요.중국 안에서의 발명품이나 문화전반에 걸친 생활용품도 대부분 한족들의 것이 유명했고 중국 안에서의 문화안에 흡수된 이민족 층이 많은데 이것이 농사만 짓는다고 가능할까요..아니라고 보네요.한나라 유물전시를 보면 가히 놀랄만 하거든요.
당나라는 선비족에 나라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방, 동이 출신 장수들도 많이 있어쑈으니 그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중계 무역보다 삼한이 중국에 입조하는 조공 무역에 성격이라고 봅니다. 즉, 중화적 세계관에 반하는 행위를 한 우거를 응징하겠다는 것이지 무슨 동방에 상권을 중시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이 섭하를 보내 전쟁에 빌미를 만들려고 한 것은 우거왕이 조선을 통하여 다른 나라에 사신들이 한나라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에 의한 것이지 무역권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중국에 화려한 문물들은 부에 집중이 그만큼 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사회 체제에 효율성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한 화려한 건물뒤에는 일반 백성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찌들어서 살아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나라에 독재 정권이라도 독재자와 그 일당에 집은 우리나라 재벌을 능가합니다. 님은 그럼 그 건물들에 주인이 평범한 백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명나라 같은 경우에는 서양 사람들
이 찾아오는 것을 앉아서 기다린 것이지 시장을 개척하고 상권을 놓고 외국과 일대 전쟁을 벌이고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정화에 원정 이 후에는 막강한 기술력과 항해술에도 불구하고 해양 활동이 없었으며 말기에는 왜구 때문에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까지 시행되었습니다. 님에 말씀대로라면 명나라는
글쎄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먼저 그 부가 중국 왕조 안에만 집중되어 대도시 형성이 없고 일반 사회는 지지리도 가난한 사회였다면 개봉의 풍경화 같은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그리고 선비족의 국가라 할지라도 한족화 된 영향도 있는데 그것을 선비족이라고만 한다면 이것도 문제죠.
그리고 사대부의 이상향이나 그 문화의 유행도 중국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건너가 영향을 미치고 회화,문화 전반에 걸친 것도 특권층들에 의해 주로 꾸며지죠.그럼 생각해 봅시다.조조님이 생각하기에 근대이전 국가들의 문화적 우수함을 나타낼때 주로 어느층 유물이 집중적으로 거론될것 같습니까?
고구려만 보더라도 몇명만이 갖을수 있는 벽화를 통해 고구려 문화를 알립니다.그리고 중국은 무슨 왕이나 대신댁만 잘살고 나머지 층은 초가집에서 사신다고 생각하는지요.대도시는 기와집들로 빼곡한 당대의 기록화들이 많습니다.이도 대부분 상권이 발달한 곳이죠.중국인들 장사근성은 옛부터 유명한데 오직 농업위주라
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 문제입니다.한가지 예를들어 굳이 피부색이 다른 외국이 아니더라도 동아시아권 국가들에 한해선 분명히 활발한 무역을 합니다.임란을 예로 들면 명나라 군인들이 고기 음식을 좋아하고 기타 그들이 중국에서 살때 쓰던 생필품들을 조선에서구하지 못하자 명 조정에선 요동의 상인들을 명군의 행군
을 따르게 하고 다음 행선지마다 기다리게 합니다.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명나라와의 은 시세문제나 거래에 익숙치 못해서 장사는 커녕 입에 풀칠도 못했죠.조조님이 생각하는 농경으로 떼우는 식의 국가운영은 사실 조선을 지목해서 말을해야 맞는 것입니다.왜냐구요.정조때 백동수란 사람이 목축을 하는데 조선이 가난
한 이유가 목축을 하지 않음이요 상거래 또한 농업보다 천시되어 크게 활개를 못피니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나중에 이렇게 가다가 구한말때 확연히 들어납니다.중국이나 일본은 꾸준히 상업을 육성 합니다.여기서 틀어지는게 바로 삼국의 강철함 수입 건조 및 신식군대 창설에 얼마만큼의 능력을 발휘했냐가 나타나죠.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중국의 왕궁도도 아닌 번화한 거리풍경이나 생활 관련 기록화가 그려진 그림들을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뱀다리 하나 짚자면 ~님은 이런식으로 글을 쓰면 잘못된 것 입니다.호칭명사가 들어간다음에 님을 붙여야지 그냥 ~님은 이라고 쓰면 잘못된 글 입니다.
첫댓글 이재운 작가님의 글에서 발췌하신 모양이군요. 이 작가님의 "칭기즈칸"은 신선한 생각들이 적지 않지만 고증면에서 불안한 부분이 많은 작품인 것도 사실입니다.
역사소설은 역사를 소재로 소설로 쓴거져. 따라서 작가의 생각이 들어가져;; 이재운 작가님의 칭기즈칸은 고증은 불안하기 보다는 거의 작가의 상상이라 하는게 더 나을듯합니다. 하지만 칭기즈칸 소설중에서 제일 재미나게 읽었던거 같습니다.
'농경'을 배척하고는 국가경제의 유지가 안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몽골제국 오고타이 칸 때 요나라 출신의 야율 어쩌구 를 재상으로 삼았는데 그의 주장대로 농경을 강조했더니 국가수입이 얼마가 늘었더라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목문화 강조는 멋있어 보일 지는 몰라도 경제적으로 현실성은 없습니다.
농경이라.... 농경과 유목이 단위당 생산 능력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인류 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농경 문화에 시작 원인은 정설이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유목 문화를 그렇게 깍아내리려 하는 겁니까? 그리고 기원전 6세기에서 2세기에 한족과 북방민족에 신장 차이는 10Cm이상 차이 납니다.
이는 북방에 경제 생산 능력과 이를 통제할 사회적 제도가 한족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실증적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농경이 국가 경제에 핵심이 되어야 한다면 실크로드에 도시 국가들에 융성과 농경국가인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 폴리스에 힘, 역대 북방 민족에 풍요로움과 강력함은 뭡니까?
먼저..음.. 로마사람들은 고트족이나 켈트인..갈리아인들보다 신장이 작았다고 나옵니다.그런데 종전엔 결국 로마에 점령되거나 속국이 되죠.둘째,그리스 역시도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았다 뿐이지 그게 페르시아 심장부를 타격해서 멸망시킨것은 아니며,그리스나 폴리스 국가야 말로 정주국의 표본 아닌가 합니다.
또 이들 역시도 중장보병의 기동성을 무시하고 비대하게 육성한 결과 로마군의 동지중해 진출때 열세를 보였다고 하더군요.셋째 아이러니 하게도 몽골이 16세기를 넘어가면서 지금과 같이 쇠락한 이유는 가장 크게 의존하던 <육로무역>이 농경 정주 국가들에 의해 막혀서 인데..
나중에는 빈곤해지자 청나라에 보호받기 위해 종속 관계를 유지하는 몽골부도 나오더군요. 한가지 더 본다면 인구자체나 무역시장 규모는 정주국들이 컸고 실제 얼마안되는 인구로 올라운 정복을 보인것은 사기나 무장,정주국들의 불안정한 시대를 틈타 확장한 이유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열세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대군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상업으로 농업 생산력에 불리함을 극복하고 이를 통해 막강한 해군을 양성했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에 농업 생산력에 격차로 볼 때 그리가 그 정도로 선전한 것은 대단한 일이고 이는 농업
외에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나라가 발전하고 강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도 농경 국가 아닙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인이 자신들에 상품을 수출하기 위하여 티베르강 하구에 만들어 놓은 항구 도시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영토가 넓어지고도 농업이 발달하였다고 하나 상업에
비중도 적지 않기에 지중해 해상권을 잡으려고 카르타고, 그리스, 이집트와 연이어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농업과 상업이 동시에 기반이 된 로마와 전형적인 농경 사회인 중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걸맞지 않습니다. 즉, 결론적으로 농업 생산력 만으로 사회를 평가한다는 것은 편견이고 현 시대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참고로 켈트 인, 갈리아인들은 로마보다 앞서 전차를 타고 바지를 만들어 입었으며 맥주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상당한 문화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안트림Antrim 지방의 데리키엄Derrykeigham에서 발굴된 수달 가죽 망토는 그들에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며 이들을 야만인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근데 한나라가 농경만으로 모든 것을 했다곤 볼수가 없지 않습니까.먼저,유목민 군대에 대항해 세계에서 몇 안되는 대규모 투사병기를 운용하고 흉노의 기병제를 도입해서 무제때는 흉노의 서방으로의 이동을 가져오기도 하죠.종전엔 좀 이상한 결말이 났지만,당나라 이후로는
안티 오크나 바그다드,콘스탄티노플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번성한 항구도시들을 갖죠. 전에 중국 문화방송인가..? 당나라때 발굴된 무덤 비석들인데 서양식과 이슬람식 비석들이 즐비하더군요.거기서 살다 죽은 외국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그만큼 번성했던 것이겠죠.
당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닙니다. 당나라에 황족은 선비족이였으며 따라서 이민족에 개방적인 전혀 중국적이지 않은 왕조였습니다. 한나라에 주력은 농경 중심에 보병입니다. 비록 기마 부대를 양성하는 등에 노력을 하였지만 북방이나 고구려등에 적수는 되지 못하였으며 말은 장수등 지휘관이 타는 것이였지 일반 병사들은
보병이 대다수였습니다. 기마 부대가 있기는 하였지만 전체 전력상 차지하는 비율로는 동이나 북방에 열세이며 만리 장성을 중심으로 한 보병 중심에 체제였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에 주력이였던 황하 지역은 최후에 동이 세력인 래이가 존재하는 등 북방계 몰골리안에 가까웠으니 이들에 키 차이는 켈트와 로마같은 인종적
차이로 보기보다는 영양 상태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잠깐요. 당나라 말기에 기병양성은 대규모로 이뤄져서 말값이 비단 한필과 맞먹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장교만 탔다고 치면 엄청난 수의 장교가 육성됐을테고 서양 중세마냥 퓌델 맨앳암즈 같은 계급들이 확장됐겠네요..? 그리고 한족이 장사를 안했다는건 좀 이해가 안가는게 고조선과 한의 싸움도 중계무역이 차지하
는 비율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네요.중국 안에서의 발명품이나 문화전반에 걸친 생활용품도 대부분 한족들의 것이 유명했고 중국 안에서의 문화안에 흡수된 이민족 층이 많은데 이것이 농사만 짓는다고 가능할까요..아니라고 보네요.한나라 유물전시를 보면 가히 놀랄만 하거든요.
그토록 주변 민족의 침략의 대상이 되어왔던 땅인 중국이 곡창지대로서의 이익만 가지고 침략만 당했다면 좀 그렇거든요.송나라 까지 치는건 그렇지만 당대의 개봉 거리의 그림을 보면 말그대로 2층 기와집이나 대부분 기와집들로 이뤄져 있고 굉장히 화려한 거리를 이루거든요?
명나라도 폐쇄적이었다고는 하는데 실제 해외 장사를 맡는 광저우나 소주나 남중국 항구지역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구요.활발하죠.명나라때 국가재정으로 은이 1280만냥 정도 장거정이 아끼고 아껴서 남기는 때가 있었는데 이 은들의 대부분은 스페인과의 무역이죠.
그때가 16세기 중 후반이니까 이때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은 보유국이 명나라였어요.한나라때도 카이사르가 중국제 비단 을 걸치고 원혛극장 안에 나타나 로마인들이 그 옷을 보느냐고 공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거든요..이것도 진위에 대해 궁금하네요?
8세기경에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라고 하던데 여기 사람들은 장안이 다음으로 큰 도시라고 생각했다는걸 본적이 있거든요.근데 이런 토대가 이전 왕조들의 기틀없이 정권의 민족이 바뀌었다고 이뤄지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나라는 선비족에 나라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방, 동이 출신 장수들도 많이 있어쑈으니 그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중계 무역보다 삼한이 중국에 입조하는 조공 무역에 성격이라고 봅니다. 즉, 중화적 세계관에 반하는 행위를 한 우거를 응징하겠다는 것이지 무슨 동방에 상권을 중시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이 섭하를 보내 전쟁에 빌미를 만들려고 한 것은 우거왕이 조선을 통하여 다른 나라에 사신들이 한나라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것에 의한 것이지 무역권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중국에 화려한 문물들은 부에 집중이 그만큼 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사회 체제에 효율성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한 화려한 건물뒤에는 일반 백성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찌들어서 살아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나라에 독재 정권이라도 독재자와 그 일당에 집은 우리나라 재벌을 능가합니다. 님은 그럼 그 건물들에 주인이 평범한 백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명나라 같은 경우에는 서양 사람들
이 찾아오는 것을 앉아서 기다린 것이지 시장을 개척하고 상권을 놓고 외국과 일대 전쟁을 벌이고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정화에 원정 이 후에는 막강한 기술력과 항해술에도 불구하고 해양 활동이 없었으며 말기에는 왜구 때문에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까지 시행되었습니다. 님에 말씀대로라면 명나라는
국운을 걸고 왜구를 토벌하여 바다를 수호하고 바다에 상권을 지켰어야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대하여 어떤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농경을 주력으로 하는 중국 한족에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글쎄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먼저 그 부가 중국 왕조 안에만 집중되어 대도시 형성이 없고 일반 사회는 지지리도 가난한 사회였다면 개봉의 풍경화 같은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그리고 선비족의 국가라 할지라도 한족화 된 영향도 있는데 그것을 선비족이라고만 한다면 이것도 문제죠.
그리고 사대부의 이상향이나 그 문화의 유행도 중국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건너가 영향을 미치고 회화,문화 전반에 걸친 것도 특권층들에 의해 주로 꾸며지죠.그럼 생각해 봅시다.조조님이 생각하기에 근대이전 국가들의 문화적 우수함을 나타낼때 주로 어느층 유물이 집중적으로 거론될것 같습니까?
고구려만 보더라도 몇명만이 갖을수 있는 벽화를 통해 고구려 문화를 알립니다.그리고 중국은 무슨 왕이나 대신댁만 잘살고 나머지 층은 초가집에서 사신다고 생각하는지요.대도시는 기와집들로 빼곡한 당대의 기록화들이 많습니다.이도 대부분 상권이 발달한 곳이죠.중국인들 장사근성은 옛부터 유명한데 오직 농업위주라
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 문제입니다.한가지 예를들어 굳이 피부색이 다른 외국이 아니더라도 동아시아권 국가들에 한해선 분명히 활발한 무역을 합니다.임란을 예로 들면 명나라 군인들이 고기 음식을 좋아하고 기타 그들이 중국에서 살때 쓰던 생필품들을 조선에서구하지 못하자 명 조정에선 요동의 상인들을 명군의 행군
을 따르게 하고 다음 행선지마다 기다리게 합니다.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명나라와의 은 시세문제나 거래에 익숙치 못해서 장사는 커녕 입에 풀칠도 못했죠.조조님이 생각하는 농경으로 떼우는 식의 국가운영은 사실 조선을 지목해서 말을해야 맞는 것입니다.왜냐구요.정조때 백동수란 사람이 목축을 하는데 조선이 가난
한 이유가 목축을 하지 않음이요 상거래 또한 농업보다 천시되어 크게 활개를 못피니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나중에 이렇게 가다가 구한말때 확연히 들어납니다.중국이나 일본은 꾸준히 상업을 육성 합니다.여기서 틀어지는게 바로 삼국의 강철함 수입 건조 및 신식군대 창설에 얼마만큼의 능력을 발휘했냐가 나타나죠.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중국의 왕궁도도 아닌 번화한 거리풍경이나 생활 관련 기록화가 그려진 그림들을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뱀다리 하나 짚자면 ~님은 이런식으로 글을 쓰면 잘못된 것 입니다.호칭명사가 들어간다음에 님을 붙여야지 그냥 ~님은 이라고 쓰면 잘못된 글 입니다.
으음.....두분 논의 잘읽었습니다.상권을 주의로 해야했다는건 한교님 말에도 일리가 있씁니다.그리고 조조님의 반박에도 타당성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다만 아쉬운것은...이건 정말 아쉬운 부분인데.한교님에게 아쉽군요.전에도 이성적인 논의를 하겠다고 말하신걸로 아는데 솔직히 마지막 반박에...좀 강하게 감정이 드러나신것 같습니다.솔직히..
한교님의 반박때문에 두분이 감정을 뒤섞어서 싸우시기라도 할것 같습니다.그것은 두분 논의로 지식을 퉁당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누가 되지 않을까하네요.
감정 없이 진심으로 서로 토론하는 자리가 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교님의 마지막 반박하고 처음반박...조금은 부드럽게 쓰셨더라면 보기가 좋앗을것 같습니다.
아직도 공부하는 저에게는 두분에게 가타부타 여러말하려는건 아니고 오해는 서로 푸셨으면 하고 인터넷 에티켓을 존중하여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셨으면 합니다.역사가 사람이 만들어가는것인데 꼭 누가 옳고 그르며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분의 논의는 참 재미있었지만 마지막에서 약간 눈쌀을 찌푸렸답니다.오해는 마시고 논의는 하시되 그렇게 해주십사하고 부탁합니다.물론 결점이 있다면 알려주어 고치지만 서로의 자존심을 긁는 내용은 없었으면 하네요.